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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생각났어, 마라톤에서

by 포레저

‘아직 살아있었다면 그 친구는 지금 나에게 뭐라고 얘기를 건넸을까?’


숨이 죽을 듯이 헐떡이며 끝없이 반복되는 듯한 언덕을 소살리토(Sausalito)에서 오르락내리락 달릴 때, 그 질문이 내 머리를 예고 없이 스쳐갔다. 정말 이 세상에 그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역경처럼 느껴졌던 2024 샌프란시스코 마라톤(San Francisco Marathon)에서의 나의 첫 하프 마라톤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의 사업이 망하고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었다. 촌구석 같은 조그만 도시를 떠나, 다운타운에는 고층 빌딩이 하나둘씩 있는 그나마 큰 도시로 이사한다는 설렘에 부풀어 있던 마음도 잠시, 나는 학교에서 맞이한 새로운 환경에 한두 달간 적응하지 못했다. 이미 친구 그룹이 형성되어 있던 곳에서 내가 끼어들기란 어지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점심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같이 밥을 먹을 친구가 없었고, 혼자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쓸쓸히 점심을 먹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싫어 밖을 정처 없이 걸어다니며,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던 기억이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지리학 수업에서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 같은 환한 미소를 가진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 특유의 편견 없고 스스럼 없는 성격으로 나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와 주었고, 언젠가 당최 말도 되지 않는 ‘ppg(ping pong gangster)’라는 별명을 나에게 지어주었었다. 왜 그런 미국 사람들 있지 않나? 인종차별적인 듯한 말들을 전혀 악의 없이 조크로 던지면서 ‘난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그가 지어준 별명은 마치 나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건네는 것과 같았다. 항상 날 보며 ‘What up ppg!’ 하며 인사를 건네면, 중2병에 걸린 마냥, 마치 힙합 갱스터 마냥 핸드셰이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린 친해져 있었다. 더 이상 난 혼자가 아니었고, 같은 친구 그룹으로 매일 세이프웨이(Safeway) 마켓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는 것도 일상이 되었었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놀았고, 랩 음악과 농구 얘기를 많이 했고, 수업을 째고 공원에서 농구를 하기도 했으며, 돌아보면 위험했지만 추억이 된 일탈들도 같이 공유했다. 그렇게 천진난만했던 나의 청소년 시절의 한켠을 그 친구가 차지해 주었다.


우린 꽤나 다른 길을 걸어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교를 갔지만, 공부에 특출나지도 큰 흥미가 없던 그 친구는 일자리를 구했고, 그렇게 우리는 졸업 후에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10년 이상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연락이 없던 만큼,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정착 직후 들려온 그의 사망 소식은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감이 없으니 얼마나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약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내 머릿속에 나타난 것은 예고에 없었던 것이었다.


달리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서 날 구해주길 바랐던 게 아니라, 나의 지난 1년을 돌아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나서 그 친구가 떠올랐던 것 같다. 인생이 바뀌었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인생이 바뀌었다는 말밖엔 달리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게 베이란 그런 곳이다. 베이로 이사 오기 이전 몇 년간 나의 대학원 생활은 거의 하루 종일 오피스나 카페에서 효율 없이 머리를 끙끙대다 집에 들어오면 방 구석에 쓸쓸히 있던 게 대부분의 날이었다. 친구들은 몇 안 되었으며, 심지어 한국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던 그 시절 내 인생은 참으로 고요하고 고독했었다.


예상치 못했기에 내가 받아들인 인생의 변화의 느낌은 더욱더 컸었다. 베이에서 새로 맞이하게 될 룸메이자 집주인이 한국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했고, 그 발판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인연들을 만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누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너 반 년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다”고.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많이 변해 있었다. 살은 5킬로 이상이나 뺐으며 안경도 더 이상 쓰지 않는 나는, 무엇보다 더 활기찬 사람이 되었고 덜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과의 모임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어색해하던 그전 모습을 벗어나, 직접 다가가 한국말로도 편히 말을 건네며 내 자신을 서스럼없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나의 나이 수 앞자리는 2에서 3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클럽이란 곳도 처음으로 가봤으며, 콘서트에서 어떻게 몸을 흔들며 음악을 즐겨야 하는지도 배웠다. 새로운 곳 여러 군데를 여행하며 내 마음속에 담았고, 편히 자는 걸 중요히 여기는 줄만 알았던 내가 어느새 캠핑의 묘미에도 빠졌다. 항상 무릎 옆 근육이 너무나도 아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달리기도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시작했다’는 말을 넘어 열정이 욕심이 될 정도로 달렸다. 나도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 누가 마라톤이라는 대회에서 내가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을 줄 알았을까?


혼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보고, 듣고, 느낀 경험들은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의 잊을 수 없는 서른 살 생일은 다른 이들의 계획하에 주도되었고, 콘서트는 항상 초대받아서 갔었고, 캠핑의 ‘캠’ 자도 몰라 모든 장비와 도움을 빌려 갔었고, 달리기의 꾸준함은 러닝 그룹 사람들에게 받는 에너지와 응원의 원동력으로 인해 이어졌다. ‘나’라는 존재를 좀 더 뚜렷하게 알아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너’라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찾았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베이에서 만난 모든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들이 내 마음을 난로마냥 데워주었다. 내 마음 한켠에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던 친구처럼.


아마 저 먼 곳 어딘가에서 그는 소살리토 아침의 바닷바람처럼 다가와 이렇게 대답해 주었을 것 같다. 나에게 먼저 힘내라고 말을 전해주었을 것 같다. 그리고 “너 열심히 잘 살고 있구나, 대단하고 대견하다”라고 칭찬했을 것 같다. 반대로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외로웠던 새로운 환경에서 네가 나를 맞이해주었듯이, 너무나도 많은 좋은 사람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고. 나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고.


편히 쉬고 있길.

From yo boy, ppg.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와 소살리토(Sausalito)를 잇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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