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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하프 마라톤 경험기

by 오트밀앤티

작년 겨울, 덜컥 등록해 버렸다.

2025년 7월 말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마라톤 Second Half Course.


그때는 덜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에 등록한 10K 마라톤을 뛰지 못한 아쉬움

Golden Gate Marathon 응원 갔을 때의 흥분과 열기

러닝클럽에 들어온 지 햇수로 2년이 넘었는데, 한 번쯤 마라톤을 뛰고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하지만 별 욕심은 없었다.

즉, 빨리 뛰어 좋은 기록을 남기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등록한 이후에도 특별한 훈련은 하지 않았다.

그저 원래 하던 대로 일요일마다 러닝클럽 정기런(4마일)에 꾸준히 참석하다가 한 달 정도 한국에 다녀왔다. 그러다 어느새 봄이 되었다.

러닝클럽에서 샌프란시스코 마라톤에 등록한 사람들끼리 오픈 채팅방을 만들어 롱런을 기획했다. 정기런 이전에 모여 좀 더 길게 뛰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5마일 정도로 시작해 점점 거리를 늘려갔다. 마라톤을 앞두고는 8~9마일 정도를 달렸고, 이후 정기런에서의 4마일까지 참여하면 얼추 하프 거리 (13.1마일)를 뛰는 셈이었다.




완주가 목표였기 때문에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중간에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해 한 달 정도 달리기를 아예 쉬게 되는 일이 있었다.

Barry's Bootcamp에서 무리하게 트레드밀 경사를 올리다가 무릎을 삐끗했다. 다행히 마라톤을 약 세 달 남기고 일어난 일이라, 달리기를 한 달 쉬고 나서도 두 달 정도 훈련할 시간이 있었다.

쉬고 나서 복귀했지만, 무릎이 심하게 아프진 않아도 얼얼한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작년에 마라톤을 포기했는데 이번에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무릎에 밴딩을 했다. 다행히 밴드가 무릎을 잘 잡아줘서 달릴 때 통증이 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무릎 대신 왼쪽을 더 쓰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결국 양 무릎 모두 밴딩을 하고 뛰었다.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매주 훈련을 착실히 한 덕분에 거리에 대한 부담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대신 부상 관리가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러닝클럽에서 마라톤에 나가는 다른 사람들은 긴장되고 걱정된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긴장은 크게 되지 않았다.

어차피 목표는 완주였으니까.




마라톤 전날이 되자 긴장이 슬슬 되기 시작했다.


스트라바에 사람들의 훈련 기록이 하나둘 올라왔는데, 이미 마라톤 코스를 미리 한 번 뛰어본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하프 거리를 뛰어본 적은 있었지만 중간에 20분가량 쉬고 마무리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그저 막연히 ‘뛸 수 있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도 하프 거리를 한 번 뛰어봤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마라톤 전날 밤은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잊고 있던 불면증이 다시 찾아왔다.

몇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몇 달 내내 지지부진하던 eBook은 어느새 10분 넘게 읽게 되었고, 듣다가 잠들어 첫 챕터를 벗어나지 못하던 오디오북도 어느새 다음 챕터로 넘어갔다.

그 전날 밤에도 푹 자지 못했는데, 이날 밤마저 제대로 자지 못하면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질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스트레스가 확 치솟으면서 잠이 더 오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고, 몸속 장기들까지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저녁에 먹은 김밥이 소화되지 않는 듯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먹고, 열두 시가 지나자 결국 멜라토닌까지 먹고서야 슬며시 잠이 들었다.




얼마 잔 것 같지 않은데 알람 소리에 깼다. 새벽 5시 반이었다.

세수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생리가 시작된 것을 알게 됐다. 전날 밤 극도의 예민함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라톤 즈음에 할 것 같더니 정말 정확하게 찾아온 것이다. 이유를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다행히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어서 라이너만 착용하고 미리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긴 바지에 반팔 티. 아침에 정신없을까 봐 반팔 티에는 미리 배번을 붙여두었다.

오랫동안 야외에서 달려야 하니 얼굴과 팔에 선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이른 시각이라 완주할 때까지 자외선 차단이 유지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초반 한 시간 정도는 피부를 보호해 줄 것 같았다.

양 무릎과 발목을 꼼꼼히 밴딩했다.

“오늘은 아프면 안 돼. 아프더라도 완주하고 나서 아파야 해.”라는 생각으로 아스피린도 삼켰다.




출발 지점이 Ocean Beach 쪽 Golden Gate Park였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셔틀을 타고 갔다.

시작 지점이 번잡해지기 전에 도착해 화장실도 가고 짐도 맡기고 스트레칭도 할 생각이었다. 마라톤 시작 시각은 8시 30분이었는데, 나는 오전 6시 40분 첫 셔틀을 탔다.

첫 셔틀이라서 페이서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너무 멋져 보였다. 나는 첫 하프마라톤인데, 그들은 이미 익숙해 일정한 속도로 뛰며 다른 러너들을 이끄는 봉사를 하고 있었다.

같이 셔틀을 탄 러닝클럽 친구는 그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던지 자신의 목표를 ‘페이서가 되는 것’으로 삼을 정도였다.

셔틀 안에서는 마라톤 앱으로 풀마라톤을 뛰는 친구를 트래킹했는데, 금문교를 넘어 Golden Gate Park 쪽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됐다.

나도 잘 달릴 수 있을까?




출발 지점에서 러닝클럽 사람들과 스트레칭을 하며 출발 시간을 기다렸는데, 날씨가 너무 추웠다. 샌프란시스코 여름 특유의 흐리고 쌀쌀한 날씨 탓에 체온이 점점 떨어졌다.


더디가던 시간이 지나 드디어 8시 30분,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마라토너들 모두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업비트 음악이 흘러나오며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내가 따라간 페이서는 2시간 10분 페이서였다.

내 계획은, 다른 러너들이 앞으로 치고 나가더라도 침착하게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초반에 힘을 빼지 않고 중·후반까지 체력을 유지해 걷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초반 30분은 뒤쪽에서 치고 나오는 러너들이 많았고, 2시간 10분 페이서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이러다 2시간 20분 페이서와 합류하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됐다.

초반부터 Golden Gate Park 언덕 코스가 이어졌는데, 짧은 언덕 연습은 했지만 오랫동안 긴 경사는 익숙하지 않아 생각보다 버거웠다.


4마일 지점에서 에너지젤 하나를 먹었다.

아직 힘들진 않았지만 ‘4마일마다 하나씩’이라는 계획대로 미리 보충했다.

급수대에서 물도 마셨는데, 생각보다 받으면서 마시는 게 쉽지 않아 옷을 다 적셨다.


어느덧 호수를 한 바퀴 돌고 Golden Gate Park를 거의 다 빠져나왔다.

그때부터 다른 러너들이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오르막은 거의 끝났고 이제 내리막이라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힘이 났다. 조금 속도를 내보기로 하고 달렸다. 2시간 10분 페이서를 지나쳤다.

내리막길은 쉬울 줄 알았는데, 코어와 다리 근육을 많이 쓰게 되어 오히려 힘들었다.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때마다 낯선 이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친구를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든 러너를 위해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덕분에 지쳐도 계속 달릴 수 있었다.


그 즈음, 예상치 못한 친구의 깜짝 응원은 결정적이었다. 없던 힘이 솟구쳤고, 활짝 웃으며 사진과 영상을 찍을 여유까지 생겼다.

도심을 지나며 매주 주말에 뛰던 코스가 나타났을 때는 이미 다들 지쳐 있었다. 부상으로 길가에 앉은 러너들도 보였다.

나도 기계적으로 뛰고 있었지만, 익숙한 코스 덕분에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을 추월하는 기분은 짜릿했다.


어느새 결승지점이 있는 Embarcadero에 진입했다.

종착점까지 1마일 남짓. 그러나 그 마지막 구간이 가장 힘들었다.

밴딩도 하고 아스피린도 먹었는데, 왼쪽 무릎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프도 이렇게 힘든데 풀마라톤은 어떻게 뛰나 싶었다. ‘풀마라톤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러닝클럽 친구들이 결승점에서 응원할 걸 알기에,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숨이 가빠왔지만 계속 달렸다.

그러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을 받아 마지막까지 전력질주할 수 있었다. 응원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기록은 예상보다 잘 나왔다.

목표는 2시간 10~15분이었는데, 2시간 5분대로 완주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주저앉아 한동안 숨만 몰아쉬었다.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길었다면 끝까지 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프를 뛴 뒤 일주일 정도는 달리기를 멈췄다.

다음 날은 다리가 당기고 무릎도 아파 걷기도 힘들었다.

일주일 동안 푹 쉰 뒤, 이주일이 지나자 다시 다른 마라톤 대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년에 LA 풀마라톤을 뛸지, 올해 겨울 호놀룰루 풀마라톤을 뛸지, 아니면 또 다른 하프를 도전할지 아직 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군가 말했듯, 마라톤은 정말 중독성이 있다.


sf marathon.jpeg 마라톤 직전 Golden Gate Park 출발 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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