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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올 Oct 28. 2024

나보고 할머니래.

엄마 사시는 곳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세 문제가 아니고는 연락 없는 분인데 발신자에 그분의 이름이 뜬 걸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설거지하다 말고 얼른 고무장갑을 뺐다. 꼭 급할 땐 고무장갑이 더 잘 안 벗겨진다. 허겁지겁 장갑을 받고 “네 안녕하세요?”로 전화를 받았다.


요는 엄마집 텔레비전이 안 나오고 그것 때문에 주인 남자분과 엄마가 통화를 했고, 서비스센터에 연락했으며 그러니 서비스센터에서 전화가 올 거라는, 그 얘길 엄마에게 전해 달라는 전화였다. 아내분은 엄마의 전화번호를 모르셔서 내게 전화를 했노라 하셨다. 그렇다면 남편분에게 엄마의 전화번호를 물으면 될 것을 내게 전화하신 이유, 모르긴 해도 나랑 얘기하는 게 의사전달이 짧고 명확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텔레비전 안 나온다면서요?”

“어? 어떻게 알았어?”

“집주인이 전화했더라고요. 서비스센터와 통화했고요, 엄마한테 5분 이내로 전화가 갈 테니 전화받으세요. “

“근데 그걸 왜 너한테 전화를 했대?”

“여자분은 엄마 번호를 모르셔서 저한테 했대요. 할머니 번호를 몰라서 연락했으니 전해달라 하셨어요. “

“할머니.. 내가 할머니긴 하지.”

“아유 엄마, 엄마 손주가 군대도 갔다 왔어요. 그 녀석이 사고 쳤으면 증손자도 보셨을 나이예요.”

“그래도 사람들이 나보고 다 젊어 보인 대, 80이라고 하면 에이 무슨 80 이냐고 그래.”


스무 살 넘은 손주가 2명, 중학생 1명, 초등학생 2명의 손주들의 할머니인데 지금도 ‘할머니’라는 호칭이 엄마와 어울리지 않다 생각하시는 것 같다. 누군가 엄마를 ‘할머니’라 칭했을 때면 멋쩍은 내색을 꼭 하신다. 그런 마음이 오히려 엄마를 우울하게 만들곤 하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마음은 아직 5~60대이시니 집주인이 한 번씩 내게 연락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충분히 본인과 얘기 나누고 해결할 수 있는데 요즘 말로는 ‘패싱’되는 것 같으신 가 보다. 식구들 모였을 때도 주인공 자리에 앉고 싶으시고, 대화를 이끌어 가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하신다.



어제 누가 내게 나이를 물었다.

“저요? 윤석열 나이로는 47이에요. 자꾸 그 나이 말하게 돼요. ㅎㅎㅎ“

나도 엄마와 같은 마음인 거겠지? 그동안 세던 나이로 49, 생일 아직 안 지나서 만 나이로 47. 굳이나 어린 나이로 얘기하고 싶은 것, 49라고 하면 벌써 50이 된 것 같은 그런 마음말이다. 그렇다면.. 내 나이 80에 나는 어떨까? 우리 아이들에게 아직도 엄마가 다 할 수 있는 체, 아직도 모든 걸 다 아는 체 할까?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다. 흘러가는 세월 붙잡고 싶어 아등바등하지 않으며 모른 것은 모른다, 버거운 것은 버겁다 말할 줄 아는 유연하고 우아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 마음 잊지 말아야지.



오전엔 여유가 있으셨다.

“텔레비전 안 나와 답답해 어째요? 했더니

“괜찮아, 성경 쓰고 답답하면 밖에 산책 나갔다 오지 뭐.”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아니, 나쁜 놈이네. 나보고 어제 전화하지 그랬냬, 텔레비전이 오늘 고장 났는데 어제 전화하지 그랬냐는 게 말이 돼?”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날도 더운데 매일 오려니 힘들어 그랬나 보네요. 아니 언제는 많이 신경 써 준다고 너무 고맙다더니.”

“집주인이니까 자기네 집 신경 쓰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벌써 8년 가까이 많이 배려해 준 거 맞아요. 오늘 고장 났으니 오늘 연락했죠 정도는 말씀하셔도 되는데, 이따 오시면 번거롭게 해 미안하다 정도 인사하세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아니 말하는 태도가 그렇잖아. 아무것도 할 것도 없는데 답답하고, 나가기엔 날씨가 너무 덥고. “

“아니 불과 몇 시간만 해도 괜찮다고 그러시더니 몇 시간 만에 이렇게 짜증이 나셨어요. 정 답답하시면 슬슬 교회 다녀오세요.”

“안 그래도 그럴까 하고.”



다시 서너 시간이 지나 이번엔 내가 엄마에게 전화했다.

“다녀가셨어요?”라고 묻는데 이미 전화기밖으로 텔레비전 소리가 들린다.

“응, 잘 나와. 집주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고생했어. 줄게 뭐 있나 음료수 마시라고 한 병은 따서 주고 남은 거 들은 상자는 가져가 먹으라고 했어.”

“다행이네요. 여러 날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고. 기사가 따로 방문하지 않고 해결되어 다행이에요”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우리 엄마 ‘할머니’.

내일 기분은 또 어떠시려나?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엄마 마음의 평안, 돈으로도 건강으로도 사람으로도 상하지 않을 평안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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