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살아가며)_엄마와 나

by 크렁 아저씨

오늘 오전 런던에 있는 딸과 통과를 하고 나니, 한국에 계신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딸이 장염에 걸려서 많이 고생했다. 아프니 집 생각이 너무 많이 난다며, 빨리 크리스마스 방학이 있는 12월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니, 내가 부모님과 함께 한 지난 세월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는 눈도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 중 어떤 부분이 나에게 있고, 또, 내게 엄마의 어떤 모습이 있는지도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런 모습인 나를 통해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도 이젠 더 잘 이해가 된다. 그런 점에서 나이 드는 것이 단지 서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남동생 중 동생은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고, 할아버지의 꽃미남 유전자를 몰빵으로 물려받았다. 반면, 나는 할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자를 받지 못했지만, 남에게 늘 따뜻하게 다가서는 엄마를 더 닮은 것 같다. 물론, 나는 엄마의 마법 같은 처세술을 완전히 물려받지 못했지만, 늘 그런 사람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수줍음도 많으시고, 누구 앞에 나서는 걸 그다지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시지만, 개별 만남에서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신지, 인기가 많으시다. 심지어 평생 공주처럼 본인을 여기셨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께서도 엄마에게는 본인의 속내를 다 이야기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위의 아무리 까칠한 사람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본인의 속 마음을 터 놓고 지내는 사이로 만드는 처세술 마법의 소유자이시기도 하다. 내가 어릴 적, 엄마의 그런 장점을 파악하신 엄마 친구분이 엄마를 보험회사 인사팀으로 스카우트하시려고 할 때, 엄마를 빼앗기는 것 같아서 내가 울고불고 떼썼던 때가 후회가 된다. 그때 내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TED에서 인간관계를 주제로 강의도 하시는 분이 되지 않았을까?


여전히 엄마 앞에서는 내가 늘 어린아이처럼 보일 테지만, 그런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이전보다도 점점 더 엄마랑 캐미가 잘 맞아간다.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몇 마디,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엄마의 상태나 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으신지, 어디가 안 좋으신지, 어떤 자랑거리가 있으신데, 누군가에 말씀하시고 싶은 상황이신지 등등


이번 주에는 전화를 드렸을 때,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건 누군가에 막 자랑을 하고 싶으신 것 같은 목소리시다. 역시,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다.


며칠 전, 평소 아파트 단지 내 산책을 같이 하시는 분들과 만나서 산책을 하시던 중에, 멀리 어떤 여자분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셨단다. 같이 계셨던 분들 중 한 분이 그분을 가리키면서 '저분 좀 특이한 분이라고 하시면서, 인사를 해도 잘 받지도 않는다'며 이야기를 꺼내셨단다. 그리고, '어떤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면서, 심지어 '아파트 헬스장에서도 책을 보면서, 다른 사람과는 절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얼마나 교양 있는 척을 하는지 다가갈 수도 없다', '책 볼 거면, 헬스장 말고, 아파트 도서관으로 가야지'하셨단다.


근데, 멀리서 보니, 엄마랑 아시는 분이랑 비슷해 보여서, 긴가민가하시다가 좀 가까이 오셨을 때, 그분이란 것을 알아차리셨단다. 우리 엄마는 눈이 많이 나쁘시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엄마를 보시고, 손짓을 하시며, 뛰어오셔서, 반갑게 손을 잡으시면서 인사를 하셨단다. 그분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같이 있던 주위 분들이 너무 놀라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으실 것 같은 분과 평소처럼 한 시간 넘게 공원벤치에 앉으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오셨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우리 장모님 친구분이시기도 하다. 지금도 장모님과 매주 만나시고 계시단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어찌어찌해서, 장모님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나도 엄마도 모르던 장모님의 속내를 그분을 통해 듣게 되셨단다. 그러면서, 본인이 친구 사돈인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엄마는 왠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엄마도 가끔 누구에게 본인의 속 마음을 털어놓고 싶으신 때가 있으신가 보다. 우리 형제 중에 여자형제가 없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 역할을 내가 담당하고 있다. 엄마도 나이가 드셔서 그러신 지,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점점 더 필요하신 것 같다. 그런 걸 알기에 일주일에 한, 두 번 연락을 드리면, 요즘은 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 중간중간 맞장구를 쳐드리면, 더 신나서 이야기를 하신다.


오늘도 엄마 이야기가 끝이 날 쯔음, "아직도 우리 엄마 친구분들에게 인기 많으시네~"하면서, "역시 엄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달란트를 가지셨네"하며 장단을 맞춰드렸다.


앞으로도, 딸이 없는 우리 엄마에게 기회가 닿는 데로 딸 역할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