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조희대의 5.1 사법 내란 이후 법원 내부 통신망인 코트넷에 게재된 글 중에서 울림 있는 몇 편을 가려 뽑았다. 글 쓴 법관들의 용기와 명문(明文)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남부지방에서 일하는 판사 박병곤입니다.
저는 판사로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합니다. 매달 두 번 나오는 판례공보의 열렬한 독자이고, 항상 대법원 판례를 잘 이해하려 애쓰고, 재판할 때에도 대법원 판례를 최우선 잣대로 삼고 있습니다.
각급 법원 판결도 마찬가지지만, 대법원 판결은 각급 법원 판사님들의 노력, 재판연구관님들의 헌신, 그리고 우리나라 사법체계 정점에 서 계신 대법관님들의 치열한 고민과 검토 끝에 나오는 결과물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제 전원합의체 판결만큼은 존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론이나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
판사들, 검사 및 변호사들을 비롯한 법률가들, 나아가 우리 사회 시민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상식과는 다르게 절차가 진행된 것 같다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 판결이 존중받으려면, 적어도 기본적 절차가 지켜져야 합니다. 당사자가 이재명이든, 윤석열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 절차 준수는 결론이나 내용과 상관없이 판결이 존중받기 위한 바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은 3월 28일 대법원에 접수됐습니다.
검사 상고이유서는 2025년 4월 10일. 변호인 의견서는 2025년 4월 22일 및 4월 28일 각각 대법원에 제출됐습니다.
1심과 항소심 판결 분량이 적지 않고, 상고이유서나 변호인 의견서 역시 매우 두꺼웠으리라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전원합의체 판결은 2025년 5월 1일 나왔습니다.
지금도 각급 법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 법원가족 여러분, 그리고 일반 시민들께서 대법원이 이 사건을 충실하게 검토하고 심리해서 선고했다고 생각하실까요? 유력 대선후보, 그것도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정치인의 피선거권을 박탈시킬 수 있는, 그래서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는 사건의 전원합의체 판결이 접수된 지 고작 한 달 만에, 상고이유서가 제출된 지 20일 만에 선고될 수 있다고 믿으실까요?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이러한 무리한 절차 진행이 왜 유독 이 사건에서만 일어났는지 궁금해하시지 않을까요?
이런 의문들이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저는 판사로서, 그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다른 판결들은 몰라도 어제 전원합의체 판결만큼은 존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석열이 일으킨 한밤중의 반란이 우리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남겼듯, 어제 전원합의체 판결이 법원을 바라보시는 국민들 마음속에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불신을 남겼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법원가족 여러분께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법원에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지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고결해서도 아닙니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께서 역사 속에서 불의한 권력에 맞섰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피를 흘리고 때로는 돌아가셨고, 결국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사법권 독립을 보장하는 헌법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작년 12월 3일 이후 아직 내란의 잔불이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잔불이 언제 꺼질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되살아나 민주주의를 태워버려 폐허로 만들어놓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철저히 새기고, 재판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이를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의무이고, 법원에서 일하게 해 주신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며, 법원이라는 사랑하는 일터를 지키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국민들은 한번 거든 믿음을 다시 잘 주시지 않습니다. 국민들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믿음을 언제든지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법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고, 국민들의 신임을 배반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 민주주의를 지킵시다. 국민들을 배반하지 맙시다.
저는 늦은 나이에 판사로 임관되어 지금까지 1심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세 살 정도 적은 당신은 저와 달리 법원의 주요 요직을 거쳐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가 당신과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권인숙 씨가 당시 국가배상금을 받아 설립한 노동인권회관이라는 가리봉동의 노동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포항공대를 졸업한 당신은 포항제철에 입사하였고, 그 후 가두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회사로부터 해고당하였습니다. 명민한 당신은 회사를 상대로 나 홀로 소송을 시작했고, 사실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권인숙 씨가 당신 언니의 친구라는 인연으로 한 번인가 저희 사무실에 온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당시 저희 사무실에 온 사람이 동생의 일을 상의하러 온 당신의 언니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당신이 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권인숙 씨로부터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회사가 한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저를 스쳐 갔습니다.
그 후 당신이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서울중앙지방법원 최초의 영장전담판사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으며, 많은 시간이 지나서는 당신이 대법관 후보가 되었는데 하도 재산이 많아서 문제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현재의 대법원장 외에 다른 대법관들은 이름조차 거의 알지 못합니다. 매일 같이 밀려오는 사건들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누가 대법관인지 알 시간도 알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그러니까 5월 1일, 대법원장의 진두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9명의 대법관이 의견을 같이하여 이재명 후보의 항소심 판결이 파기환송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전직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당시에도 아무런 입장을 나타내지 않다가 그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해제요구를 받아들인다고 발표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참으로 본인 입으로 하기 민망한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서부지방법원이 폭도들에 의해 망가질 때에도 그다음 날 현장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대법원장이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2번의 심리를 거친 후 즉시 선고기일 잡겠다고 했을 때 대충 어떤 결론이 나올지 짐작이 갔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특정인이 대통령 당선되는 것을 결단코 저지하게 위해 사법부 독립과 법관의 직업적 양심을 정치 한복판에 패대기친 조희대 대법원장이 아닙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를 따른 9명의 대법관입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입니다.
조희대 대법원장과 의견을 같이 한 9명의 대법관들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저는 실망하고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이지 아팠습니다.
회사의 부당한 해고 조치에 맞서 홀로 싸우던 20대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30년의 시간 속에 풍화되어 사라진 것입니까?
당신은 특정인을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그리고 상대 후보를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대법원장의 손과 발이 된 것입니까?
이러고도 당신이 대법관입니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니...
지난 선거 과정에서 상대 후보였던 윤석열은 한 터럭의 거짓도 없이 오로지 사실과 진실만을 말한 것입니까?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특정인을 기소하면 법원은 거기에 따라야 합니까?
정녕 그 피고인의 몇 년 전 발언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전직 대통령의 행위보다 악랄한 것입니까?
이 나라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일상이 있습니다. 대출금 이자와 피곤한 월요일이 무한 반복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입니다. 대한민국 시민들은 이런 보잘것없는 일상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내란 종식을 외쳐야 합니까?
12월 3일 시작된 내란사태를 끝내고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국민들의 바람은 짓밟혀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들이 주권자 같지? 아니야, 너네들은 내 밑이야”
저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계엄 당시에 보여준 모습에 너무도 화가 났지만, 게시판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서부지법 폭동 사태 다음날 현장에도 나가보지 않는 것을 보고 기가 찼지만, 그때도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에는 제 자신이 판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너무도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도저히 낯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니까짓 게 뭔데’라는 제 마음속 소리에 주눅이 들고, 제가 타인에게 쏜 화살이 몇 백 배가 되어 저에게 꽂힐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저의 이런 마음, 남의 행위와 판결을 비판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거나, 재판하고 판결 쓰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도저히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의 마음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어떤 짓을 하건,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하건, 한두 명의 판사만 비판할 뿐 대부분의 판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조차 침묵하니, 대법원장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법관대표회의는 판사들의 친목모임입니까?
계엄령을 선포한 전직 대통령이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고, 그 재판은 재판공개의 원칙을 무시한 채 깜깜이 상태로 진행되고, 대법원은 일사불란하게 특정인의 항소심을 파기환송하고 항소심은 급히 기일을 지정합니다. 이것이 정말 제대로 된 재판의 모습, 제대로 된 법관의 모습입니까? 저는 절대다수의 판사들이 이렇게 침묵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도 기괴합니다.
판사로서 숨 쉬고 판사로서 법정에서 부끄럽지 않은 재판을 하기 위해, 저의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씁니다.
침묵이 가장 안전합니까?
사법부 독립은 지금 안전합니까?
제가, 당신들이, 이러고도 판사입니까?
내심의 의사는 외관을 통해서 추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선고하자마자(2025. 3. 26.) 방대한 기록의 공람 절차를 모두 마치고 대법원에 기록을 송부한 일(2025. 3. 28.), 사건을 소부에 배당한 당일 소부 대법관들이 기록을 검토할 틈도 없이 대법원장이 재판장인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회부한 일,
원심의 판단을 “기록과 대조하여” 살펴볼 틈도 없이 선고기일을 지정하고 파기환송한 일, 선고기일 지정 당시부터 방송 생중계를 광고한 일, 대법원 선고 다음날 고등법원에 기록을 송부하고 고등법원은 당일 대통령선거운동기간 내인 2025. 5. 15.로 1회 변론기일을 지정한 다음 피고인에 대해 우편 송달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집행관 송달을 촉탁한 일,
이와 같은 절차 진행에 대한 이재명 후보 측의 극심한 반발과 의심, 대법원장과 대법관, 고등법원 판사에 대한 탄핵 논의, 반이재명 측의 대법원장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과 기대 표명, 이 모든 절차와 과정, 반응들은 당해 대선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후보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로써 대법원장의 내심의 의사가 어떠한지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이러한 상반된 반응을 조희대 대법원장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이재명의 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 있거나, 적어도 유권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쳐 낙선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법부의 명운을 걸고 과반 의석을 장악한 정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와 승부를 겨루는 거대한 모험에 나서기로 결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재판을 통해서 당사자를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확신에 찬 결론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판결문을 작성해도 패소한 당사자는 항소합니다. 대법원 판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심이라 불복할 방법이 없을 뿐이지 고명하신 대법관들의 판단이라 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이 후보자에 대해 유죄판결을 한다고 해서 다수의 유권자들이 지지를 철회할 거라고 믿는 것은 오판입니다. 오만입니다. 대법원의 높은 법대에 앉아 지극한 의전에 물들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입니다.
특히 이번 선거법위반 사건은 피고인 측과 정치적 반대 측의 주장, 검찰의 발표와 법원의 판결을 통해 기초적 사실관계가 드러났고 유권자들이 유·무죄 여부에 대한 각자의 견해는 물론, 그에 기초하여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에 대한 판단까지 형성한 상태입니다.
법원의 유죄 판단이 후보자에 대한 정치적 지지 여부 판단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제한된 사안입니다. 독선과 과대망상에 빠져 안이한 상황인식으로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선 대법원장과 이에 동조한 대법관들의 처신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당장 사법부는 과반 의석에 의해 좌우되는 의회권력과 적이 되었습니다. 대선 결과에 따라 행정부와도 그리 될 것입니다. 예산, 처우, 위상 모든 것에서 사법부와 사법부 구성원의 지위가 위협받게 생겼습니다.
대법원장의 정치적 신념에 사법부 전체가 볼모로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개별 사건의 절차와 결론에 대하여 대법원장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한 전례가 있습니까? 법관(대법관 포함)의 독립성에 대한 대법원장의 침해가 이토록 노골적인 적이 있었습니까?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해명할 수 없는 의심에 대하여 대법원장은 책임져야 합니다. 사과하고 사퇴해야 합니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됩니다(헌법 제27조 제4항). 그러므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사건의 피고인도 여전히 무죄로 추정되고 그의 대통령선거 피선거권에는 아무런 장애 사유가 없습니다. 적법하게 출마한 후보자의 선거운동 기회는 공평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민주국가에서 법원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민주적 정당성의 원천인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행사인 대통령선거는 종전 선거 낙선자에 대한 선거법위반 사건 재판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심판이 달리고 있는 선수 중 한 명만을 골라 멈춰 세워서는 안 됩니다. 따질 것이 있다면 레이스가 끝나고 따져야 합니다. 법원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 과정에 개입하여 일방 후보자의 선거운동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울고등법원은 마땅히 공판기일을 대선 후로 변경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민주법치국가의 운영원리에 부합합니다.
대법원장의 개인적, 정치적 일탈이 사법부 전체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초래하고 구성원 전체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현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은 내부에서 잘못을 바로잡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즉시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현 사태에 대해 진단하고, 대법원장에 대한 사퇴 권고를 포함하여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