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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후예 이란의 역사

by 박사력

역사의 반전(反轉)

이란-이스라엘 전쟁(국명은 한글표기 순서)이 2025년 6월 13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심 군사 및 핵 시설을 전격적으로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이란의 혁명 수비대 지도자, 핵 개발에 참여한 핵 과학자 다수를 제거했고, 이란의 방공망과 일부 핵 및 군사 시설을 손상시키거나 파괴했다. 이에 대응해 이란은 이스라엘의 군사 시설과 도시들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과 동맹 관계인 후티도 이스라엘에 여러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지원하던 미국도 전쟁 9일째 되는 날, 이란 핵 시설 3곳을 벙커버스터로 폭격하면서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전쟁 열흘 후인 6월 23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휴전 합의가 6월 25일까지 실행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 분쟁을 '12일 전쟁'이라고 불렀다. 반면 이란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부터 휴전 제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하며 선언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치열하게 싸우는 이란과 이스라엘도 2,5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할 수 없는 돈독한 관계였다. 즉 이란의 선조인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 2세 왕은 바빌로니아 정복(기원전 539) 후, 유대 왕국을 멸망시킨(기원전 586) 신바빌로니아 제국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에 의해 바빌로니아에 끌려와 살고 있던(바빌론 유수, 기원전 597~기원전 538)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었고, 수도 예루살렘의 성을 복구하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 내용은 "성경"에도 기록(성경에는 키루스와 네부카드네자르를 히브리어 표기인 고레스와 느부갓네살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유대인은 키루스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하나님의 목자' 등으로 찬양했다. 오늘날 죽고살기로 싸우고 있는 이란-이스라엘을 보면은 그야말로 역사의 반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란고원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과 마을

이란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엠마 포메로이(교수) 연구팀은 최근(2024년 6월) 2018년 이라크 북동부의 샤니다르 동굴 유적에서 발굴한 유골 화석을 통해 구현한 네안데르탈 여성 '샤니다르 Z'의 얼굴을 공개했다. 샤니다르 Z는 7만 5000년 전 이 동굴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뼈와 치아 등을 통해 추정한 키는 150cm, 나이는 사망 당시 40대 중반으로 나타났다. 이전에도 이 동굴에서 여러 네안데르탈인(미국 고고학자 솔레크가 발견한 6만 전 화석 등)의 화석이 발굴된 바 있어, 네안데르탈인에게 죽은 이의 시신을 특정 장소에 묻는 관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이를 네안데르탈인이 지능이 낮고 잔인한 종(種)이었다는 통념을 반박하는 증거로 보고 있다. 엠마 포메로이 교수는 샤니다르 Z의 얼굴 복원에 대해 “현대 해부학이 7만 50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라고 했다. 이란고원의 가장 오래된 사람에 이어 가장 오래된 정착촌은 기원전 5500~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란 중부에 있는 카산시(市) 근처의 유적지인 ‘시알크’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1933~1937년, 프랑스 고고학자 로만 기슈르만과 그의 아내 타니아 기슈르만이 이끄는 발굴팀에 이어 1999~2004년, 이란의 문화재 기구와 펜실베니아대 연구팀에 의해 문양이 아름다운 토기와 청동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지구라트는 기원전 3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수메르 문명 우르 지구라트는 기원전 2000년경) 세상에서 가장 오랜 된 지구라트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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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북동부 자그로스 산맥의 샤니다르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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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한 두개골 조각을 바탕으로 복원한 7만 5천 년 전 40대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얼굴과 이를 복원한 영국 케임브르지 대 엠마 포메로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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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알크 유적에서 발굴된 기원전 4000~3800년의 도자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란 최초의 문명, 엘람

엘람(기원전 3200~기원전 539년)은 이란고원에 아리안족이 이동해 오기 이전에 형성된 최초의 문명이다. 이란 서쪽 일람주(州)와 남서쪽 후제스탄주(州) 저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과 아카드 왕국 동쪽에 위치했다. 엘람인은 메소포타미아 산악지대에서 이란고원 남서부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의 기원, 종족, 언어, 문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로 갈린다. 고대문명은 대체로 큰 강가 주변 비옥한 땅에서 발생한다. 그래야 농사가 잘되어 풍요로워지고 그 여유를 바탕으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근처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반면, 이란은 국토의 절반이 산악지대라 문명적으로 보면 암담했다. 그런데 엘람은 이란 남서부, 즉 고지대 이란고원이 시작되기 직전에 위치해 있던 데다 테즈강과 카룬강 등을 가로질러 자리하고 있기에 비옥한 문명의 바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전한 데엔 엘람인의 역할도 컸다. 농산물은 풍부하지만, 건물을 세우는데 필요한 재료가 부족했던 메소포타미아에 엘람인은 이란고원의 풍부한 목재, 금속, 보석 등을 제공했다. 대신 엘람인은 부족한 농산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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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00년경 고대 근동: 엘람 문명이 노란색으로 표시돼 있다.)


엘람의 대표 유물

엘람의 대표적인 유물은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탑처럼 쌓아 만든 거대한 신전 건축물을 말한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비슷하게 생긴 신전 건물이다. 이란 최초 정착촌 시알크에서 발견된 지구라트는 엘람문명 초기인 기원전 30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또한 엘람의 운타쉬 나피리샤 왕(재위: 기원전 1275~기원전 1240)이 세운 종교 수도 초가잔빌에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가 발견되었다. 엘람을 침입한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이 왕궁을 초토화시켜(기원전 640), 종교 수도인 초가잔빌은 벽돌더미가 뒹구는 폐허가 되었다. 지구라트도 둥글게 마모되어, 황톳빛 언덕처럼 변했다. 다행히도 지구라트는 크게 망가지지 않은 채 발굴되었고, 초가잔빌 지구라트는 이란에서 가장 먼저 선정(1979년)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엘람의 거대한 흔적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지구라트와 함께 유명한 엘람의 또 다른 유물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머리 잘린 여신상이다. ‘나피라수’라는 실물 크기의 여신상은 지구라트를 건설했던 운타쉬 나피리샤의 부인, 즉 왕비 나피라수를 묘사한 청동상으로 추정된다. 긴치마를 입고 손을 가만히 포개고 있는 이 동상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얼굴, 왼팔, 왼쪽어깨, 목이 부러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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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잔빌 지구라트 유적: 메소포타미아 문명 외의 지역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지구라트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유명하다.)


엘람의 역사와 문자

엘람의 역사는 신비에 싸여 있다. 엘람인도 기록을 남기긴 했다. 이들도 문자를 찍고 새긴 점토판을 많이 만들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이 점토판들은 비슷한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과 모양이나 크기 및 제작 방식에 있어서 비슷하다. 다만, 원시 엘람 문자의 점토판들이 대부분 곡식이나 가축을 거래하거나, 노동인력들의 이동 등을 기록한 회계 장부로서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인 데 반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점토판은 문학 텍스트나 문자 수업 등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난다. 엘람의 역사는 성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석비, 점토판, 수메르 왕국의 문서로 알려졌다. 엘람문자는 쓰인 시기별로 구분되는 문자가 세 가지나 있었다. 어떤 문자는 해당 문자로 기록된 유물이 22개뿐이라 해독이 어려웠고, 어떤 문자는 토판은 1,600개나 있었지만 ‘양 24마리’ 등 회계 장부 쓰듯 기록한 터라 해석이 어려웠다. 유일하게 해석된 문자, 엘람 쐐기문자는 훗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이 문자를 포함한 세 가지 언어로 비문을 만든 탓에 밝혀낼 수 있었다. 영국인 문자 학자 롤린슨이 이미 해석된 다른 비문을 보고 엘람 쐐기문자를 해석해 냈다. 덕분에 이 문자가 새겨진 초가잔빌의 지구라트가 엘람의 유적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엘람어는 고립어로서,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파에 속하는 언어와는 물론, 인접한 지역의 셈어족의 언어들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데 아쉽게도 후손 어(語)를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다만 원시 엘람어가 인도의 드라비다어족의 언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은 엘람-드라비다어족 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이란과 인도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원시 엘람 문자에 사용된 기호들이 인도 문자와 비슷한 형태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 등이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근래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은 해석에 실패한 원시 엘람문자 점토판 사진을 학교 웹사이트에 올려 대중에 공개했다. 이란 최초의 문명, 신비에 싸여 있는 엘람의 비밀을 풀어 줄 고고학자가 언젠가는 출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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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엘람 문자 점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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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엘람 문자와 인도 문자 비교)


이란의 주인공, 아리아인

이란이라는 나라 이름은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란인은 이란 지역 최초 문명 엘람인의 후손이 아니라, 아리아인(註)이다. 아리안인은 이란 땅에 처음부터 살던 사람이 아니었다. 유목민인 이들은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800년 사이 이란고원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스텝)에 살던 그들이 굳이 말을 타고 이곳까지 온 건 생존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추위가 매서워졌으며 인구가 늘어나 복잡해졌고 적들의 노략질과 괴롭힘도 피곤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리아인은 말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참을 달려 이란고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원주민의 병사가 되거나 하수인이 되어 고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원주민에게 농사를 배우고 정착 생활의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했다. 현대 이란인의 외모가 유럽 사람과 비슷한 것도 같은 아리아인의 후예라 그렇다. 역사의 광풍을 거치며 현재 이란엔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지만 이란엔 아리아인 출신인 페르시아인이 60%로 가장 많다. 먼 옛날 아리아인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모두 이란고원으로 이동해 정착하진 않았다. 일부는 인도에 정착했고, 일부는 저 멀리 유럽으로 이동해 색슨족, 켈트족, 게르만족, 슬라브족이 되었다. 주요 유럽 국가를 이루는 민족의 조상이 아리아인인 셈이니, 이란인의 외모가 유럽 사람과 비슷하다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아리아인은 적응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유목민 특유의 적응력으로 원주민의 하인에서 이란고원의 정복자로 변해갔다. 그들은 또 말타기의 선수였다. 원주민이 아리아인을 병사로 쓴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기마 기술로 주변의 원주민과 적들을 제압해 가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이란 최초의 왕조 메디아 왕조(기원전 728~기원전 550)가 탄생했다. 이란에 당도한 아리아인 중 가장 대표적인 부족은 메디아족과 페르시아족이었다.


(註) 아리아인(Aryan)은 '고귀한', '훌륭한'이란 뜻으로, 원시 인도유럽인(얌나야 문화권 종족)에서 파생된 고대 인도이란인들이 자신들을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기원전 4500~3000년경 흑해 북부 우크라이나/남부 러시아에서 등장한 얌나야(Yamnaya) 문화를 향유한 고대 종족이 유럽과 이란, 인도 등지에 인도유럽어를 전파한 아리아인의 원류로 여겨진다. 이들은 목축을 기반으로 한 유목집단으로 최초의 수레 발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리아인이 유럽, 중앙아시아, 이란고원, 인도 지역으로 이동한 시기와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로 분분한데 아래 지도의 표기가 가장 객관적으로 보인다. 한편 18세기 후반 무렵 백인종을 코카소이드 인종(동아시아인: 몽골로이드, 흑인: 니그로이드)이라고 분류한 것은 독일의 괴팅겐 대학의 마이너 교수가 그의 저서 "인류사의 개요"(1785)에서 얌나야 문화권인 캅카스(코카서스) 산맥 일대에 거주하던 코카서스인을 유럽인의 원류로 생각하고, 코카서스인 외에 베르베르인, 이집트인, 아시리아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등을 코카서스 인종으로 분류하면서 시작되었다. 마이너 교수의 뒤를 이어 같은 대학의 인류학자 블루멘바하는 "인간 다양성의 기원"(1895)에서 골상학과 린네의 분류학에 근거해 코카서스인을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하고, 코카서스인 중 한 종족이 유럽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원래 백인이었던 사람이 햇빛 때문에 흑색의 니그로이드와 황색의 몽골로이드가 된 것으로 보았다. 이후 마이너와 블루멘바하의 가설에 힘입어 코카서스 인종 중 서구 유럽계 백인종이 가장 우수하다는 인종주의가 등장했고, 이와 같은 비과학적 인종주의에 의해 유럽인들은 다른 인종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근거로 삼았다. 더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망상적 인종주의에 근거해 아리안족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유대인(600만 명), 집시, 슬라브족 등 1,100여만 명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근세기 들어 고고학, 유전학, 생물학적 연구에 의해 모든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해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유럽, 아시아 등으로 분화했음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으므로, 블루멘바하가 내세운 인류의 코카서스 기원설은 명백한 허구임이 밝혀졌다. 또한 골상학과 분류학적 인종 구분도 과학적으로 근거 없음이 드러났고 인종 차별적 요소도 있어, 오늘날에는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그로이드, 오스트랄로이드와 같은 인종 분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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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나야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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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나야 문화권의 인도유럽인 이동)


이란 최초의 왕조, 메디아 왕국

메디아 왕국은 현재의 이란 북서부에 있었던 고대 국가를 부르는 이름이다. 대체로 오늘날 케르만샤 일부와 아제르바이잔, 하메단, 테헤란, 쿠르디스탄 지방에 해당한다. 메디아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이 지역이 메디아 또는 메데아로 알려졌기 때문에 붙여졌다. 메디아 왕국은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 기원전 11세기 전반 무렵 메디아족(族)이 세웠다.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3세(재위: 기원전 858~기원전 824)의 문헌에는 '마다'지역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들이 뒤에 메디아인으로 알려졌다. 수도는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였다. 메디아인은 아리안족의 한 갈래인 마다 또는 마타이 족으로 우르미아호(湖) 남쪽에서 말을 사육한 유목민이다. 이들은 엑바타나를 중심으로 강성해져 데이오케스 때에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그의 아들 프라오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까지 메디아는 흑해의 남부연안과 아란지방(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서 페르시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메디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이란의 첫 번째 국가를 형성했다. 이처럼 메디아족은 페르시아족보다 먼저 아리안족 최초의 왕조를 탄생시켰다. 메디아족이 왕국을 만든 건 어떻게 보면 아시리아 덕분이었다. 당시 강국 아시리아는 자그로스산맥에 흩어져 살던 메디아족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아시리아는 원래도 강국이었지만 메디아에서 뺏은 튼튼한 말 덕분에 나날이 군사력이 강해져 상대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위기가 기회라고 메디아족과 다른 아리안 부족은 최강국 아시리아를 상대하느라 더욱 똘똘 뭉치게 됐고 결국 나라까지 탄생시켰다. 현재 이란 하마단시(市)에 남은 메디아의 왕궁터는 모양이 독특하다. 두꺼운 벽이 도시 맨 안쪽 궁전, 보물창고를 원형으로 7겹이나 두르고 있다. 성벽은 세월에 닿고 색깔도 노랗게 변했지만 당시엔 7겹 벽이 모두 다른 색이었다고 전해진다. 바깥쪽부터 안쪽까지 흰색, 검은색, 진홍색, 청색, 주황색으로 칠해졌고, 제일 안쪽 두 벽은 금과 은으로 도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화려한 성벽을 두르고 첫 왕이 된 이는 데이오케스(재위: 기원전 728~기원전 675)였다. 그가 왕이 된 이유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된 후, 부족회의를 개최했지만 참석률은 민망할 정도로 저조했다. 일부 부족들은 회의 장소가 산악지대라 가기 힘들다고 핑계를 되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근처에 아시리아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리아와 인접한 부족들은 아시리아의 보복이 너무나 두려웠다. 누가 뭐라 해도 아시리아는 여전히 군사 강국이었다. 메디아가 영원한 강국처럼 보이던 아시리아를 무찌른 건 키약사레스왕(재위: 기원전 625~기원전 585) 때였다. 메디아 군대도 예전의 그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메디아는 스키타이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는 굴욕적이었지만 안정적이기도 했다. 군대의 힘을 키울 절호의 기회였다. 키약사레스는 메디아의 역사에 전설을 만들었다. 그는 강해진 군대로 스키타이를 내쫓고 이란고원에 있는 크고 작은 부족을 모아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또 다른 강국 신바빌로니아 왕(네브카드네자르 2세)과 동맹을 맺은 후 함께 아시리아 동쪽을 치기 시작했다. 강력한 기병대의 거센 공격에 아시리아는 점차 무너졌다. 3년의 전투 끝에 승자는 메디아가 되었다(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메디아로 가져왔고, 그 보물은 함께 공을 세운 지도자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키약사레스왕은 또 다른 강국 리디아와도 전쟁을 벌였지만 5년여 동안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결국 두 나라는 결혼 동맹을 맺고, 키약사레스의 아들 아스티아게스가 리디아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키약사레스 왕을 이어 왕이 된 아스티아게스(재위: 기원전 585~기원전 550)는 우울증에 걸렸다. 제국의 황금기가 가져온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다 권태에 빠진 것이다. 그는 점점 침울해져 갔고, 왕국에 불운이 닥쳐 몰락하는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는 점성술사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꿈 때문에 몹시 불안해했다. 딸인 만다네 공주가 꿈속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메디아 전체를 삼켜버렸던 것이다. 이 꿈을 들은 점성술사들은 이 꿈이 만다네 공주의 아들이 메디아를 몰락하게 할 징조라고 해석했다. 불안해진 아스티아게스는 공주를 한 속국의 왕과 결혼시켰다. 아스티아게스는 속국의 왕이 메디아의 중류층보다도 비천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공주가 임신한 후 그가 꾼 꿈은 더욱 불길했다. 만다네 공주 다리 사이에서 포도나무 덩굴이 자라더니, 전 아시아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극도로 불안해진 왕은 심복 하르파고스에게 외손자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 하르파고스는 왕의 목동 중 한 명에게 이 일을 넘겼는데 그가 하르파고스의 명령을 어기고는 왕의 외손자를 몰래 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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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 왕국의 강역)


메디아 왕국의 멸망과 쿠르드족

자신을 죽이려는 메디아 왕인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손자의 이름은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60~기원전 530)이다. 그의 아버지는 캄비세스 1세라는 메디아 속국 페르시아 왕이었고, 그의 할아버지가 키루스 1세였다. 키루스가 열 살이 되던 해 키루스의 존재는 아스티아게스 왕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분노한 아스티아게스가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죽이고 하르파고스에게 아들 고기를 먹게 하는 잔악한 처벌을 한다. 아스티아게스는 이후 페르시아의 왕이 된 손자를 불안하게 주시했고, 결국 불안의 싹을 없애기 위해 속국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페르시아 군대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키루스의 눈부신 활약과 하르파고스의 도움으로 3년 만에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키루스의 유능함 덕분이기도 했지만 하르파고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아스티아게스는 어리석게도 원한에 차 있던 하르파고스를 장군으로 임명하고는 페르시아를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전투 중에 반란을 일으켜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를 포박해 그의 외손자에게 넘겨주었다. 아들을 먹은 아비, 하르파고스의 피눈물 어린 복수는 성공했다. 나라를 빼앗긴 아스티아게스는 이제 본인의 목숨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루스는 외할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연금을 주며 자신의 곁에 있게 했다. 그는 메디아를 정복한 이후에도 메디아인을 노예로 만들지 않고 메디아 귀족들을 그의 진영으로 흡수시켰다. 수도 엑바타나(하마단)도 파괴하지 않고 계속 메디아 왕국의 수도로 남겨두었고 수시로 자신의 여름 수도로 사용했다. 역사란 알다가도 모른다고, 메디아를 멸망시킨 건 아시리아도 바빌로니아도 리디아도 아닌, 속국 페르시아였다. 어찌 됐든 메디아는 자비로운 왕의 배려 아래 페르시아의 지배국에서 속국이 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르파고스 너야말로 어리석다. 굳이 나를 끌어내리고 새 왕을 모시고 싶었다면 페르시아인보다 메디아인에게 넘겼어야 옳지 않은가. 너는 아무 죄도 없는 메디아인을 주인이 아닌 노예로 만들었다. 노예였던 페르시아인을 메디아인의 주인으로 만들고 말이야. 전설과 같은 이 말을 예언처럼 받아들인 종족이 바로 쿠르드족이다. 대표적으로 나라 없는 민족으로 꼽히는 쿠르드족(註)은 이란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을 다름 아닌 메디아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국가에도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쿠르드는 없다 말하지 마라/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의 깃발은 결코 내려지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메데스(메디아족)와 케이코스로(키약사레스)의 후계자….”

-쿠르드족 국가 '수호자여(Ey Reqib)' 중-


일부 학자들은 쿠르드족이 메디아의 후손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만 쿠르드족은 자신들이 메디아의 후손임을 굳게 믿고 있다. 메디아 왕조는 아리아인이 탄생시킨 이란 최초의 왕조지만 그 유명한 페르시아 왕조에 늘 가려져 있었다. 어떨 땐 페르시아 왕조로 가기 위한 디딤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메디아는 쿠르드족에게만큼은 페르시아 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역사란 누구를 중심으로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법이다.


(註):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 나라 없는 민족이다. 큐르디스탄아나톨리아 동부 190,000㎢, 이란 125,000㎢, 이라크 65,000㎢, 시리아 12,000㎢에 존재하며 총면적은 392,000㎢이다. 인구는 4,560만 명이며 현재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 쿠르디스탄 자치구를 건국했다. 중동 지역에서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종교는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이며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에 속하는 쿠르드어를 독자 언어로 사용한다. 고대와 중세에 동과 서로 넓은 지역에서 유목을 하며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고 생업은 목축을 주로 했으며 기타 중동의 민족들처럼 유목민으로서 생활해 왔다. 이들은 약 4천 년 전부터 문헌에서 쿠티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나며 고대부터 독립적으로 아리안계 언어와 자주적인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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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위용(偉容)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50~기원전 330)는 220년 동안 존속한 이란의 고대 왕조로, 오리엔트 문명권 전체를 최초로 통일하고, 중동 문명의 기본틀을 제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이었다. 동쪽으로는 북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부에서부터 이란, 아라크 전체 지역, 흑해 연안 대부분과 소아시아 전체 지역, 서쪽으로는 발칸반도와 트라키아,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

동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토였다. 이후 그 유명한 로마제국 보다 더 넓은 영토였다. 조로아스터교 신앙 전파, 페르시아 정체성 확립, 중동 패권국들의 기틀을 잡은 왕조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깊다. 페르시아라는 용어는 이란 남부 한 주(洲)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란 남부 파르스(Fars)주 지역을 그리스인이 그들 방식대로 페르시아라고 부르면서 이란 땅에 페르시아라는 말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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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성기를 이끈 세 명의 군주

동, 서양이 만나는 만난 지점에서 탄생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에서는 많은 것들이 보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동, 서양의 다양한 문화와 학문이 뒤섞이어 세계에 퍼진 페르시아의 페르시아의 예술, 철학, 문학, 종교, 과학에서까지 이란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페르시아를 대제국으로 만든 왕은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0~기원전 530), 캄비세스 2세(재위: 기원전 530~기원전 522),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개창자 키루스는 당시 근동 최고의 부자 나라이자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리디아와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 키루스는 힘으로 두 나라를 무너뜨린 게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다. 리디아와 전쟁(기원전 546) 때는 낙타를 풀어 리디아의 말들을 놀라게 했고, 신바빌로니아와 전쟁(기원전 539) 때는 내부 갈등을 이용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복에 성공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곳은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땅 위에 눈 부신 문명을 세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나라 이집트였다.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왕 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던 터라 페르시아 군대를 막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캄비세스 2세는 거대한 이집트를 손에 넣었다(기원전 525). 당시 페르시아 기병의 궁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은 오로지 세 가지 기술을 배운다. 승마와 활쏘기, 그리고 진실을 말하기.”라고 했다. 페르시아는 부국 리디아, 풍요로운 문명국 신바빌로니아, 이집트를 정복하며 나날이 부유해지고 거대해져 갔다. 캄비세스 2세의 후계자 다리우스 1세는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유럽의 다뉴브강까지 페르시아의 깃발을 꽂았다. 페르시아는 그야말로 대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여러 방법을 고안했다. 우선 그가 만든 것은 제국을 다스릴 단단한 기준, 즉 법이었다. 그러나 제국을 손안에 쥐고 다스리려면 법을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거대한 제국을 20개의 주(사트라피)로 나누고 중앙에서 주지사(사트라프)를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페르시아식 지방자치제를 만든 것이다. 다리우스는 불시에 왕의 눈과 귀라고 불린 감찰관을 급파해 궁에 앉아서도 지방의 사정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거대한 영토가 잘 통하지 않으면 금방 무너진다는 것을 염려해 제국 곳곳이 잘 통하도록 2,703㎞에 이르는 '왕의 도로'를 만들었다. 더불어 일정한 간격마다 말 휴게소를 만들어 말을 항상 대기시켰고, 도로 주위에는 쉬어갈 수 있는 숙소도 있었다. 도로는 제국의 모든 것들을 흐르게 했다. 다리우스 1세가 만든 페르시아 금화, 은화도 이 길을 따라 흘렀고 언어도 함께 흘러갔다. bazzar(시장), sugar(설탕), shawl(숄), tiara(보석 치장 작은 왕관), orange(오렌지), lemon(레몬), peach(복숭아), pistachio(피스타치오), spinach(시금치)와 같은 영어 단어들은 이때 유럽까지 흘러 들어간 페르시아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이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완성했지만, 이란인이나 역사가들이 이란 역사에서 가장 최고로 꼽는 왕은 다리우스 1세가 아니라 바로 키루스 1세이다. 현대 경영학의 대가 피커 드러커가 최고의 리더로 꼽은 왕도 바로 키루스이다.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 키루스 실린더

이란인과 역사가들이 키루스를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는 이유는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문으로 평가받는 키루스 실린더와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다. 길이 23㎝, 지름 10㎝의 원기둥 돌에 새겨진 키루스 실린더가 오늘날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모든 세상의 왕인 나 키루스는 위대하고, 강력한 바빌론과 수메르와 아카드와 세상 모든 지경의 왕이다. ……나의 군대는 평화적으로 바빌론으로 행진했고,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백성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모든 수메르와 아카드의 신들도 아무 탈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들은 고향의 신전으로 돌아가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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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실린더)


위 내용처럼 키루스는 보기 드문 너그러운 왕이었다. 점령지 백성들을 힘으로 통치하는 대신 그들의 문화를 존중했다. 낙후된 점령지는 개발해주기까지 했다. 더구나 키루스는 바빌로니아 정복 후 전쟁으로 이곳에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보내줬고 수도 예루살렘의 성을 복구하도록 돈을 대주기까지 했다. 키루스의 위대함에 매료된 그리스의 사상가 크세노폰(기원전 430~ 기원전 354)이 키루스가 어떻게 자랐고 훌륭한 지배자가 됐는지 조사해 책을 썼다. 이렇게 그가 쓴 책이 바로 "키로파에디아(cyropaedia:키루스 교육)"이다. 이 책은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리더십 분야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캄비세스의 폭정과 죽음

캄비세스 왕은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키루스처럼 너그러운 왕이었지만 이집트 정복 후 달라졌다고 한다. 술 따르는 시종을 사격 연습 삼아 활로 쏘아 죽이고 실정을 비판하는 귀족 열두 명도 땅에 생매장했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기세를 몰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프리카 정복은 실패로 끝났고 말았다. 더구나 그는 아프리카 원정 실패 후 얼마 안 가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우울증으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자살했다는 얘기도 있다. 헤로도토스는 그가 말에 오르다가 허벅지를 칼에 찔린 후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책에 썼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캄비세스에겐 아들이 없었다. 이에 여러 귀족 중에서 새로운 왕을 선출했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1세였다. 다리우스는 즉위 후 수많은 반란과 신변 위협에 직면했는데 이를 방어하고자 ‘죽지 않는 부대’라는 1만 명의 최정예 부대를 양성해 곁에 두었다. 군인들 중에서 뛰어난 자들을 선발했고, 이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죽지 않는 부대로 불린 건, 정말 한 명도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그 즉시 인원을 보충해 늘 1만 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47년 키루스의 정복으로 그리스 식민시(市)였던 소아시아 연안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계의 밀레투스가 본토 아테네의 후원을 받아 소아시아 그리스계 식민지를 결속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반란은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에 의해 평정되었으나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이를 구실 삼아 그리스를 정복할 결심을 했다. 당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모두 세 번의 큰 싸움을 벌였다. 페르시아의 첫 번째 원정은 폭풍을 만난 페르시아 군함 300여 척이 침몰해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끝났다(기원전 492). 두 번째 원정에서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장소가 그리스의 마라톤 평원이었다. 당시 페르시아 군의 숫자는 그리스 군의 두 배였다. 이 전투에서 싸움에 능한 병사들을 양 날개에 배치한 그리스의 작전에 말려 페르시아 군이 대패했다(기원전 490). 전투가 끝난 후 그리스 군 병사는 승전 소식을 고국에 전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아테네를 향해 뛰어갔다. 전력을 다해 뛴 그는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올림픽 종목인 마라톤 경기가 여기서 유래했다. 이런 이유로 이란은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는다. 다리우스는 끝내 그리스를 정복하지 못하고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원정은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기원전 486~기원전 465)가 진행했다. 이 세 번째 원정에서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로 향하는 좁은 골짜기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결사대 300명에 막혀 며칠을 지체했다. 사력을 다한 스파르타 결사대를 겨우 전멸시키고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로 진격했지만, 그리스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과 병력을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시킨 소개 작전으로 아테네는 텅 비어 있었다. 연이어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선은 좁은 살라미스 바다에서 기동력을 잃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그리스 갤리선에 의해 집중 타격당했고, 마침 폭풍우까지 휘몰아쳐 페르시아 함대의 절반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때 속국에서 일어난 반란 등으로 그리스에서 고립되는 것을 우려해 철수하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이후에도 여러 번의 전투를 벌였지만 그리스에 패해 정복사업에 대한 흥미를 잃고 쇠약한 몸으로 궁 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는 페르세폴리스에 궁을 지으며 호화롭고 향락적인 생활에 몰두하다가 비극적인 말년을 맞는다. 궁중 암투에 휘말려 큰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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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의 책 "역사(페르시아 전쟁사)"

오늘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 덕분이다. 당시 헤로도토스는 직접 페르시아를 답사해서 책을 썼다. 적국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 후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평화협정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크세르크세스 1세 이후 왕이 된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465~424)는 전쟁에 환멸을 느껴 조용하게 제국을 통치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해가 가라앉기 전, 마지막 낮 같은 시기였다. 그리스 의사가 왕의 주치의가 되기도 했고, 그리스 과학자가 페르시아 궁정에 초대돼 기술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때 페르시아를 여행했고 열심히 여러 자료를 수집해 페르시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당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를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페르시아인처럼 외국의 관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민족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예컨대 그들은 메디아의 옷이 자신들의 옷보다 더 아름답다고 여기고 입고 다니며, 전장에는 아이귑토스(이집트)의 흉갑을 들고나간다.”

-헤로도토스 "역사" 중-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헬레니즘’ 문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죽은 후, 왕실 안은 극히 혼란스러웠다. 어떤 왕은 45일 만에 이복동생에게 암살되었고, 어떤 왕은 고작 2년간 왕위에 머물렀다. 왕조는 저물어갔지만 왕족들은 나라에 대한 걱정은커녕 궁중에서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다. 왕은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태양의 신 미트

라, 물의 여신 아나히타 등 다양한 신에게 열심히 제사를 드렸지만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었다. 이때 페르시아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젊은 장군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였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결국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무너졌고,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는 불타버렸다. 당시 왕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30)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뒤 무서운 속도로 동쪽 인도까지 정복해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만들었다. 그는 제국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70여 개나 만들고 그리스 문화를 퍼트렸는데, 그리스 문화는 점령지였던 페르시아, 인도의 문화와 섞여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한다(헬레니즘은 그리스인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 ‘헬렌’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와 같은 문화’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헬레니즘 문화 중 그리스 문화와 인도 불교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문화가 ‘간다라 미술’인데, 바로 석굴암 본존불 같은 불상이 간다라 미술의 대표 형식이다. 그전까지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조각 기술로 유명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이때부터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 문화를 손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 그는 키루스 왕을 진정으로 존경했고 페르시아 문화는 그에게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 딸과 결혼했고, 자신에 이어 수천 명의 그리스 군인을 페르시아 여자들과 결혼시켰다. 그는 페르시아를 여러모로 벤치마킹(Benchmarking)했다. 페르시아 궁전을 모방해 궁을 지었고, 페르시아 궁정 예절을 도입했다. 페르시아를 부강하게 했던 교통망을 따라 했고 페르시아처럼 교역 확장에 힘썼다. 물론 그리스만 페르시아에게서 영향을 받은 건 아니다. 페르시아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페르시아 귀족 가문의 자제는 그리스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에 이어 페르시아를 지배한 그리스계 왕조 셀루코우스 왕조(기원전 312~기원전 63) 때에도 페르시아인이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를 믿거나 그리스인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페르시아 도시 케르만샤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디오니소스 숭배를 장려하는 등 그리스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셀루코우스 왕조는 그들이 세운 도시에 아예 그리스인을 이주시켜 그리스 문화를 퍼뜨리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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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역사의 중요한 연결고리, 파르티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페르시아가 영영 그리스 문화의 지배 아래 살아가나 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파르티아족이었다. 이란계 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은 그리스(마케도니아)계 셀루코우스 왕조(기원전 312~기원전 63)가 이집트 쪽 국경에 신경 쓰느라 혈안이 돼 있는 틈을 타 몸집을 키워 결국 페르시아를 차지했다. 말을 타고 달리다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행동을 ‘파르티안 샷’이라고 하는데, 이 파르티안 샷의 이름이 바로 파르티아족에서 유래됐다(파르티아 왕조의 궁기병이 로마군을 상대로 구사한 기술을 보고 후대에 이 이름을 붙였다. 다만 이러한 기술의 최초 활용은 기원전 8~7세기 무렵의 스키타이와 같은 초기 유목민 전사로 추정된다). 이들은 유목민 출신답게 말타기와 활쏘기에 달인이었다. 아쉽게도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7~기원후 224)은 파르티안 샷만 남겨놓고 기록은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자신들의 업적을 돌 위에 새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달리 이들은 본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남았던 기록조차 이후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모두 없애 버리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파르티아는 이란 역사상 가장 긴 471년 동안 왕조를 유지했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찬란한 빛에 가려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파르티아가 없었다면, 페르시아는 그리스화된 후 사정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즉 파르티아는 그리스의 영향권 아래에서 페르시아를 구해준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파르티아는 건국자 아르사케스 1세 왕(재위: 기원전 247~기원전 211) 이후 미트리다테스 1세(재위: 기원전 167~132),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기원전 121~기원전 91)를 거치며 몸집이 커졌다. 미트리다테스 2세 때 제국은 동쪽으로 중국, 서쪽으로 로마제국에까지 이르렀다. 잠깐이나마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을 정도였다. 파르티아는 영토만 아케메네스조와 비슷해진 게 아니라 나라 분위기 자체도 비슷했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분위기로 파르티아인을 비롯해 유대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가 범람했다. 더불어 옛 아케메네스조처럼 대규모로 도로를 건설해 파르티아의 무역이 활발해졌다. 중국과 로마의 물자가 페르시아로 흘러들어왔고 유럽으로, 아시아로 흘러갔다. 상인들이 만들고 다진 길들은 이후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란이 중국과 첫 외교 접촉을 한 게 바로 이 시기였다. 당시 중국의 한 무제는 흉노족에 너무 시달렸던 터라 파르티아의 기병대 전술에 관심이 많았다. 기병대의 비법을 도입할 겸 든든한 제3국의 지원을 얻을 겸 그는 파르티아에 사신을 파견했다. 한 무제는 이후 또 한 번 파르티아 인근으로 사신을 보내는데, 이때 파견된 사신 장건은 귀국길에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신기한 과일을 들고 왔다. 바로 포도와 석류였다. 당시 중국은 안석국의 석류, 즉 안석류로 부르다가 안자가 떨어져 나가 석류라는 이름이 되었다. 페르시아, 즉 이란산 석류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 시기 이란은 중국에 포도를 비롯해 샤프란, 재스민, 자주개자리, 양파를 소개했고, 중국은 이란에 복숭아, 살구, 양잠 등을 전해주었다. 복숭아, 살구나무는 중국에서 이란으로 건너와 유럽으로 들어갔다. 파르티아는 그리스계 왕조로부터 이란을 구원해 주었지만 초기엔 그리스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초기 파르티아 동전에 그리스문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로마 문화의 영향도 보인다. 궁전 벽면을 스투코 기법(석고 가루를 개어 천장, 벽면, 기둥에 발라 그 위에 색을 칠하거나, 조각을 하거나 모양을 붙이는 등 궁전을 호화롭게 만드는 기법)으로 장식하기도 했고 다채로운 색깔의 프레스코화 벽화(축축한 회반죽 벽에 그린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학자들은 초기 파르티아의 동전에 셀루코우스 왕조 때처럼 왕의 옆얼굴을 새겨놓은 것도 그리스 방식으로 보는데, 나중에는 왕의 얼굴 정면을 묘사하는 그들만의 ‘파르티아’ 동전이 등장했다. 파르티아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귀한 문화를 만들어 후세에 남겼다. 바로 긴 시를 입으로 낭송해 전하는 ‘구두 서사시(시 암송 문화)’를 남겼는데 사산 왕조 들어 더욱 발전해 현재 이란 서사시 문화의 틀을 만들었다. 파르티아의 천적은 로마였다. 양국이 계속 부딪힌 건 크리스트교를 믿은 파르티아의 속국 아르메니아 때문이었다. 로마는 이 지역을 크리스트교라는 유대로 유혹해 늘 파르티아와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200년의 공격에도 로마는 파르티아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파르티아 동쪽의 적 쿠산 왕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파르티아를 정복한 건 다름 아닌 파르티아의 지방 영주였다. 제국 말기, 파르티아는 지방 영주에게 휘둘릴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르티아는 약 500년 동안 동서의 적으로부터 이란을 보호했고 의도치 않게 이란 문명의 수호자가 되었다. 파르티아의 철벽 방어로 페르시아 문화가 잘 보존되었고, 동시에 '이완' '서사시 암송 문화'같은 고유한 이란 문화도 발전했다. 파르티아의 방패 안에서 보존된 페르시아 문화는 이후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로 이어져 이후 이슬람 문명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페르티아를 두 페르시아(아케메네스조, 사산조)의 단단한 연결고리로 본다. 파르티아가 없었다면 이란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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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안 샷)


강력한 제국 중의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사산 가문의 지방 영주 아르다시르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를 무척 닮고 싶어 했다. 그는 예전 페르시아 제국의 넓은 영토를 동경해 라르시 지방을 필두로 영토를 동서남북으로 넓혀 나갔고, 결국 파르티아의 마지막 왕을 축출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탄생시켰다(226).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이후, 빛을 잃었던 파르스 지역도 다시 이란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탄생은 아르다시르의 할아버지 사산도 벼르고 있던 일이었다. 할아버지 사산은 "만약 언젠가 제국이 나의 수중에 온다면 나는 모든 땅에서 파르티아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라고 포부 있게 말했지만, 그 일을 이룬 것은 손자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6~241)였다. 아르다시르는 새로운 나라를 만든 후, 할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파르티아의 흔적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는 파르티아가 나라를 다스렸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국민들을 일정한 제한 안에서 자유롭게 풀어놓는 방식은 예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처럼 다양한 문화가 꽃피고, 이 문화가 섞인 독특한 문화가 섞인 독특한 문화를 탄생하게 하는 장점도 있었지만, 제국이 무너지는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시대는 가고 사산 왕조가 이란 역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르다시르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왕이 강력하게 통제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 즉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만들었다. 왕의 최측근 총리가 각 부문 장관들을 쥐고 있었고 지방에는 총독이 파견되었다. 큰 주의 총독은 큰 왕이라는 뜻의 '큰 샤'라고 불렀으며 왕의 후계자를 보냈고 작은 주 총독은 '샤'라고 불렀다. 왕 아래, 왕의 크고 작은 눈들이 지방 곳곳을 지켜보고 있는 꼴이었다. 사산조 시대 때 처음으로 관료, 요즘 말로 공무원 계층이 등장했다고 하니, 사산 제국이 나라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가 드러난다. 이런 아르다시르 1세의 노력으로 사산 왕조는 결국 이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강력한 힘을 가진 왕조가 되었다. 아르다시르가 나라를 꽉 잡고 통치하기 위해 또 하나 신경 쓴 게 있었으니, 바로 종교였다.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종교는 곧 삶이라고 할 만큼 중요했다. 아르다시르는 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믿던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만들었다. 다른 종교를 믿던 국민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천천히 추진했다. 모든 것이 이전 파르티아와 달라졌다. 새로운 제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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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과 로마

사산 제국은 파르티아 다음으로 오랜 기간인 무려 420년간 존속한 터라 왕이 무수히 많다. 대체로 22번째 왕 호스로 1세 때를 전성기로 보는데, 호스로 1세 이전까지 왕 중에는 로마와 전쟁을 치른 샤푸르 1세와 샤푸르 2세가 유명하다. 당시 사산 제국을 괴롭힌 곳은, 서쪽으로는 로마와 동쪽으로는 쿠샨 왕국과 헤프탈인이 있었다. 쿠샨왕국과 아시아계 유목민족 헤프탈인도 골치 아팠지만 가장 강력한 적은 로마였다. 로마가 쪼개진 이후로는 동쪽 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과 다투었다. 오늘날 이란 북쪽에 있는 나라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 시절부터 이란과 로마 간 싸움의 근원이었다. 아르메니아는 중동 지방에서 거의 유일한 크리스트교 국가로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느낌이다. 아르메니아는 301년 세계 최초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이 아르메니아로 인해 사산 제국 내내 로마와 전쟁과 화해(평화조약)가 수 없이 반복되었다. 샤푸르 1세(재위: 241~272년경)는 로마에게 여러 번 실패를 안겨준 왕이었다. 그는 로마와 전쟁에서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전사시켰고(244), 근위대장에서 다음 황제가 된 필루푸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해 금화 50만 개를 챙겼다. 이후 에뎃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는데(260), 샤푸르 1세는 암벽에 이렇게 새겼다.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그의 수많은 장군, 원로원 의원, 고위 장교를 전쟁 포로로 잡아서 페르시아 각지로 유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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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상징인 손목을 잡힌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와 승리자 샤푸르 1세를 새긴 암벽 부조)


샤푸르 1세가 암벽에 새긴 내용은 평범했지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샤푸르 1세가 말에 오를 때 디딤돌로 발레리안 황제를 쓴다는 등 페르시아 신전을 짓는 데 발레리안의 피부를 벗겨 짚과 섞어 썼다는 등 소문은 가학적이었다(초기 크리스트교 저자들의 기록으로 역사학계에서는 신뢰하지 않는다). 정설에 따르면 샤푸르 1세는 비샤푸르란 곳에 발레리안을 위해 궁전까지 만들고 그를 거기서 살게 했다. 하지만 로마 황제를 위한 배려는 거기까지이다. 샤푸르 1세는 전쟁의 승리와 발레리안의 치욕을 돌에 새겨 파르스 지역 곳곳에 세워두었다. 샤푸르 1세 전성기 때 영토는 거대했다. 샤푸르 1세는 유명한 페르시아 왕들의 기존 칭호 '왕 중 왕'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모든 지역의 왕 중 왕'이라는 칭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재임 내내 이 칭호를 사용했으며, 후대의 왕들도 따라 썼다. 눈에 띄는 두 번째 왕 샤푸르 2세(재위: 309~379)는 장수한 왕이었다. 그는 오래 살기도 했지만, 거의 생애 내내 왕좌에 있었다. 무려 70년간 통치했다. 어린 시절, 귀족들이 개입했던 섭정 기간이 지긋지긋했던지, 그는 성인이 돼 카리스마 있게 제국을 통치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당시 샤푸르 2세가 불안해했을 만큼, 이란에서 크리스트교가 널리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로마 공식 종교로 선언하고 자신을 전 세계 크리스트교의 수장이라 선언하자, 페르시아와 로마는 영토뿐만 아니라 종교 전쟁으로까지 확대됐다. 몸은 페르시아에 있지만 영혼을 로마에 둔 이란의 크리스트교인을 박해했다.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선포한 아르메니아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피해가 심했다. 샤푸르 이후 왕들의 시대에도 종교는 큰 화두였다. 야즈드게르드 1세(재위: 399~420)는 크리스트교에 관대했다는 이유로 크리스트교인들 사이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조로아스터교인으로부터는 '죄인 야즈드게르드'라는 혹평을 받았다. 고바드 1세(재위: 488~531) 때에는, 마즈딕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혜성처럼 등장하는데, 이는 종교라기보다 정치철학에 가까웠다. 인간세상의 불평등은 소유에 따른 사유재산에 있으니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사상이었다. '신분제는 사회 문제의 원인이다. 하늘 아래 만인은 평등하다" "인간은 모든 물질을 평등하게 나눠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이 얘기는 약 1,300년 후인 독일의 사상가 마르크스(1818~1883)의 공산주의 개념과 비슷하다. 마르크스가 설파한 공산주의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하기 훨씬 앞서 공산주의를 주장한 사람이 마즈닥교의 창시자 마즈닥이다. 마즈닥은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였다. 한데 왜 이렇게 파격적인 생각을 하며 새 종교를 만들게 됐을까? 그건 바로 그가 목도한 현실이 너무도 암담했기 때문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사산조의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상류층(귀족과 성직자 고위관료)만 나날이 부유해지고. 일반 국민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매일매일 고된 노동을 하고, 국가가 필요할 때도 노동력을 제공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나가서 싸워야 했으며, 나라가 전쟁에 져 배상금을 내야 할 떼에도 이들이 돈을 메워야 했다. 더불어 귀족들이 득세해 왕실은 혼란스러웠고, 흉년으로 페르시아의 대지는 말라가고 있었다. 국교 조로아스터교는 국민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류층 편이었다.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처참함에 마즈닥이 창시한 마즈닥교가 들불처럼 번졌던 것이다.


사산조의 황금기와 문화

사산조 페르시아에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건 호로스 1세(재위: 531~579) 때였다. 사산조에 수많은 왕이 떠난 후, 25대 왕인 호스로 1세가 앉았다. 그는 다방면에 뛰어났다. 통치도 잘했고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우선 그는 나라 안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엉망이었던 세금 제도를 정비하고 넓은 제국을 동서남북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지방관을 보내 다스리는 등 지방 통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개혁으로 그때까지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성직자와 귀족 군인이 호스로 1세 밑에서 숨죽이게 됐다. 나라 안이 안정되자 호스로 1세는 나라 밖을 응시했다. 동로마인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일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전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잔티움도 페르시아도 강했다. 호스로 1세는 끝나지 않은 전쟁에 지쳐갔다. 비잔티움과 전쟁은 승부가 나지 않은 채 50년 평화조약을 맺고 끝났지만, 이후에도 비잔티움과 전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호스로 1세는 많은 정복 사업을 벌였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공부를 좋아하는 지적인 왕이었다. 적국인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아테네에서 모든 학교를 폐쇄시킨 만행을 저질렀을 때, 그는 비잔티움의 우수한 철학자들을 넓은 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아예 곤테-샤푸르라는 곳에 대학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인도에서 넘어온 수많은 책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게 해 페르시아 문학과 과학을 비옥하게 했다. 페르시아 카펫 역사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호스로의 봄' 카펫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호스로 1세 때 작품이다. 페르시아의 정원 풍경을 수놓은 이 카펫은 보석으로 짰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많은 보석이 쓰였다. 흐르는 물줄기를 투명한 보석들로, 잔디밭을 에메랄드로, 꽃과 꽃봉오리, 열매를 각각 루비, 에메랄드, 진주, 터키석으로 표현했다. 나중에 사산 제국을 침략한 아라비아 군인에 의해 산산조각 나서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게 참으로 아쉬울 뿐이다. 호스로 1세는 궁 밖에 줄을 설치해 줄을 당긴 백성과 일대일 면담을 하기도 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제외한 다름 종교를 존중하는 등 인자하고 관용적인 왕이었지만, 그의 인자함은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 한해서였다. 그는 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마즈닥교인을 박해했고, 통치 초기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그의 형제와 형제들의 자녀까지 사정없이 죽였다. 또한 자신과 크리스트교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조로아스터교 전통을 무시하자 옥에 가두었고, 나중에 왕위를 넘보자 아들의 눈 위에 뜨거운 금속물을 부어 아들을 맹인으로 만들어버렸다. 호스로처럼 사산제국의 왕은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최고의 권력을 누린 존재였다. 복잡한 의전 절차를 따라야 만날 수 있는 사람, 입을 가리고 있다가 허락이 있을 때만 그 앞에서 말을 할 수 있고, 만남이 끝난 뒤 절대 등을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질 쳐 나와야 하는 대상이 바로 왕이었다.


전 세계로 퍼진 사산조 문화

사산조의 왕이 있는 궁전은 당시 모든 최고급 예술의 집합지였다. 페르시아의 이완(한 면이 개방되고 다른 삼 면이 폐쇄돼 있는 직사각 형태의 건축), 그리스 원기둥, 로마의 모자이크 등 다양한 건축 방식이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산조 궁전 안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연회 때에는 화려한 식기가 쓰였다. 사산 왕조의 세공인은 식기와 보석만 만든 게 아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의 박물관에는 사산조 왕들이 본인들의 업적을 위해 만든 금속 접시가 많이 남아 있다. 한 로마의 역사가가 사산제국의 그림과 조각이 모두 죽임과 전쟁을 묘사한다고 비꼬았을 만큼 접시엔 주로 왕의 사냥 장면이 새겨져 있다. 나는 듯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왕, 화살을 쏴 당나귀와 사자를 한꺼번에 맞히는 왕 등 지금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새겨 놓았지만, 당시에는 왕의 카리스마를 뽐내는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사산조의 왕은 금속 접시뿐만 아니라 제국 곳곳에 퍼진 동전 위에도 자신의 얼굴을 새겼다. 그러나 크기로 보나 전시효과로 보나 암벽 조각만큼 효과적인 건 없었다. 암벽에는 사산조가 파르티아와 로마에게 승리한 장면, 아후라 마즈다가 사산조의 왕을 왕으로 인정해 주는 장면 등을 새겨놓았다. 이들은 이란 남쪽 도시와 더불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왕들의 무덤(나크시에 로스탐) 옆에도 암벽 조각을 만들어놓았는데, 이건 본인들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후계자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라 천마총의 금관, 황남대총의 유리그릇, 처용 신화의 처용, 괘릉의 무인석 등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흔적이다. 사산조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문물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들어왔다. 당시 한반도에 있던 나라는 바로 신라인데, 놀랍게도 페르시아 상인들은 당나라의 장안을 거쳐 신라까지 왔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인 8세기에서 9세기경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이슬람 제국(아라비아족이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만든 제국)의 바그다드, 당나라의 장안, 그리고 신라의 경주는 그야말로 같은 유행의 시대를 누렸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교역품이 운송돼 유행이 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6개월에서 8개월이면 충분했다. 경주 천마총의 화려한 금관과 황남대총의 유리그릇은 각가 페르시아의 금제품과 유리그릇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큰 코, 부리부리한 눈, 짙은 눈썹 등 처용의 얼굴과 무인석의 얼굴은 도무지 한반도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이국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대를 휩쓴 페르시아산 명품 얘기가 나온다. 당시 신라에서 페르시아산 카펫이 인기가 많아 귀족에게 카펫 금지령을 내렸다는 등, '슬슬'이라는 페르시아산 보석이 귀족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등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최근에 알려진 '쿠쉬나메'라는 이란 서사시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아라비아족의 공격을 피해 한반도까지 넘어온 사산 페르시아의 왕자와 신라 공주가 사랑을 나누고 결혼까지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로맨스는 허구에 가깝지만, 두 나라가 교류했다는 증거로는 충분하다. 이란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이란은 우리나라와 결코 먼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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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페르시아 유리제품, 국가유산청)


사산조의 몰락과 아라비아인 대두

사산 제국이 몰락하기 전 왕조를 그나마 강력하게 통치한 건, 우연찮게도 호스로 1세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호스로 2세(591~628)였다. 호스로 2세는 별명이 '승리자(파르비즈)'일 정도로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이집트도 예루살렘도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갖고 온 물건 하나가 화근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못 박혔다고 추정되는 십자가, 이란 안팎의 많은 크리스트교인은 분노로 몸을 떨었고 비잔틴군은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호스로 2세의 실수는 원만했던 로마와의 관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사실 그는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들을 만큼 로마와 관계가 좋았다. 호스로 2세마저 세상을 떠나자, 사산조의 역사는 빠르게 저물어갔다. 로마의 매서운 공격을 목도한 호스로 2세 아들 고바드 2세(628)는, 성자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지냈다. 그는 비잔틴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버지가 점령한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십자가도 돌려주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로도 왕이 몇 번 바뀌었다. 이때 사산의 몰락을 지켜보며 힘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라비아인이었다. 아즈드게르드 3세 시기, 아라비아 기마부대는 온 힘을 다해 사산을 공격했다. 오래전부터 사산 제국은 망국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경기 침체, 종교의 타락, 잦은 전쟁과 정권 교체, 야즈드게르드 3세(재위: 632~651)는 결국 사산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651).


아라비아인 침략, 이란의 역사를 바꾸다

호스로 1세는 아라비아반도 남부에 쳐들어갔을 때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근방에서 태어난 아라비아인이 이란의 역사를 바꿔놓을 것임을. 무함마드(571~632)가 7세기에 이슬람교를 탄생(610)시켜 전파시킨 후, 그의 후계자들은 종교 전파를 내걸고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무서운 속도로 점령해 갔다. 중동의 다양한 나라와 민족은 아라비아인이 이슬람을 내걸고 만든 제국의 거대한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이슬람 군대는 어렵지 않게 사산조 페르시아를 삼켜버렸다(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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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국교가 된 이슬람

이란 전체에 이슬람이 전파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이란 도시민들의 마음엔 이슬람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신성시하는 불, 물, 흙을 재료로 하는 계층이라 조로아스터교에서 멸시를 당해 조로아스터교에 별 애착이 없었다. 반면 불, 물, 흙을 귀중히 여겨진 농민 계층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비아인의 '이슬람 마케팅 전략'은 뛰어났다. 이슬람은 만민 평등을 주장했고, 개종을 하기만 하면 세금을 받지 않았다. 사회의 불평등에 편승한 조로아스터교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이란인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란 전체로 이슬람은 조금씩 퍼져나갔다. 한데 이란인이 누구인가. 아라비아의 침략을 당하기 전 여러 번 거대한 제국을 가져본 이들이었다. 그런데 아라비아인이 자신들 땅에 지배자로 군림하자 저항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저항감이 두드러진 사건이 바로 '시아파 이슬람'과 '아바스 혁명' 두 가지 사건이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두 개의 종파로 나누어진다. 이슬람이 두 분파로 갈라진 것은 후계자 선출 문제 때문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세 번째 후계자까지는 선출 기준이 능력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혈통을 바탕으로 후계자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즉 능력과 혈통의 싸움이 이 두 분파가 생긴 원인이 된 것이다. 능력파가 정통파를 자처하는 수니파이고 혈통파가 시아파이다. 알리는 결국 네 번째 후계자가 되었지만 알리 사후, 종교 공동체였던 이슬람은 아라비아 민족만 중시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이 되어 버렸다. 제국의 왕좌를 거머쥔 건 우마이야 왕조(661~750)는 아라비아인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평등한 종교 공동체를 왕조로 만들어 이란인을 필두로 한 점령민들의 불만을 샀고, 세금을 무겁게 매겨 일부 아라비아인도 불만이 많았다. 무함마드의 삼촌 아바스의 후손이 우마이야 왕조의 실정을 놓치지 않고 호전적인 호라산 지역의 이란인과 협력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슬람의 왕좌를 차지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바스 혁명 이후 아바스 왕조 치하 이란인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란인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아바스 혁명의 성공으로 이슬람 제국의 왕좌는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넘어갔다. 아바스 혁명이 정치적 저항이었다면, 종교적 저항은 바로 시아파 이슬람을 믿는 것이었다. 이들은 마이너 이슬람인 시아파에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그건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알리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알리는 피지배인 이란인에게 관대한 후계자였다. 더불어 무함메드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어찌 됐든 자존심 강한 이란인은 주류 이슬람이 아닌 이들만의 차별화된 이슬람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이란 사람들이 시아파가 된 건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출발은 이러했다.


이슬람 제국을 차지한 이란 왕조

이란이 아라비아에 멸망한 지 약 300년이 지난 어느 날, 이슬람 제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이란 왕조가 이슬람 제국의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9세기 들어 아바스 제국에는 독립의 바람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수장 칼리프의 힘도 약해졌지만 페르시아 제도를 모방한 총독제도 때문이었다. 왕은 신뢰하는 장군을 총독으로 보내 지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 총독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슬람 제국의 일부인 이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란에서도 타히르조(821~873), 사파르조(867~903), 사만조(874~999), 타바레스탄 알라비조(864~940), 지여르조(930~1090), 부예조(932~1062) 등 독립 왕국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데 독립 왕조라고 해서 칼리프와 치열하게 다투는 식이 아니라 묘한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공존했다. 아바스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칼리프는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독립 왕조를 인정하며 달랬고, 독립 왕조는 자신들을 인정해 준 칼리프를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존중했다. 아울러 이슬람 제국 내 독립 왕조도 칼리프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공존이 깨진 건 이란 독립 왕조 부예조(934~1062) 때였다. 당시 아바스 제국 정부는 허수아비 정부로 수도 바그다드는 터키계 용병 맘룩에게 지배당하다시피 했다. 부예조의 왕 아흐마드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던 바그다드를 정복했고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가 됐다. 칼리프는 종교적인 수장에 불과했다. 아흐마드는 칼리프의 목숨과 칼리프제도를 없애지 않고 살려두었는데 그건 이슬람 제국의 대다수인 무슬림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부예조는 시아파 왕조였던 터라 이란에서 시아파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비아 침략 후 숨죽이며 살던 이란은 부예조 때 결국 이슬람 제국의 왕좌를 차지했다. 혹자는 부예조의 통치를 아라비아와 튀르크의 이란 지배 기간 사이에 이란인이 잠깐 끼어든 막간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예조처럼 다른 독립 왕조들도 짧으면 50년, 길면 100년 남짓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떤 왕조들은 동 시간대에 존재해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키고, 어떤 왕조는 아라비아계 이후 이란을 지배한 튀르크계 왕조에게 침략을 당하고 멸망했다.


아리비아 국가와 이란의 차이

역설적이게도 이란은 아라비아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아라비아 국가는 대부분의 국민이 아라비아인이고 아라비아어를 써야 아라비아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란은 페르시아인이 대부분이고 페르시아를 쓰는 다른 국가이다. 아리비아 국가와 이란이 헷갈리는 건 둘 다 이슬람을 믿고, 생김새가 비슷해 보이고, 중동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둘을 헷갈리게 하는 건 아라비아문자로 이뤄진 언어 때문이다. 아라비아어는 이슬람 제국의 공용어였다. 속국 간에 서로 소통하기 위해, 모든 속국민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고 사용해야 했던 언어가 아라비아어였다. 이 때문에 아라비아어와 전혀 달랐던 페르시아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라비아어 문자와 어휘를 많이 흡수했고, 아라비아어와 매우 유사해졌다. 페르시아어 알파벳 32개 중 28개가 아라비아문자이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다르지만, 우리가 한자를 아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두 언어의 말은 전혀 다르다.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 아라비아는 셈어족에 속한다. 아라비아인과 이란인은 서로의 말을 배워야 소통이 가능하다. 페르시아어가 아라비아어의 광풍 속에서 알파벳이 변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건 다름 아닌 시(詩)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어를 지킨 시가 바로 샤만 왕조 때 만들어진 "샤흐나메(王書)"이다. 페르시아어 보존 창고로 불리는 이 시는 피르다우시(935~1020)라는 시인이 아랍어가 아닌 순수한 페르시아어로 아라비아 침략 전 페르시아의 전설과 역사를 6만 구절(句節)에 달하는 긴 시로 써낸 작품이다. 긴 세월 동안 이란인들은 샤흐나메를 읽고 낭송하며 페르시아어를 기억하고 보존했다. 시작(詩作)을 통해 보존되어서인지 페르시아어는 더 부드럽고 풍성한 표현의 언어가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페르시아어가 현재 이란인이 쓰고 있는 언어이다. 페르시아어가 다소 모호하고 시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슬람 문명의 핵심 페르시아 문화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 '뱃사람 신드바드의 모험' 등의 얘기들이 들어있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옛날 페르시아에 사산이라는 이름의 왕조가 있었다. 제국의 영토를 인도와 그에 딸린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갠지스 강 너머 중국에 이르게 한 왕들의 왕조였다."


책의 제목은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인데, 이야기의 시작은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아라비안나이트" 또는 "천일야화(1,001일 밤의 이야기)"의 원조는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천의 이야기"이다. "천의 이야기"가 페르시아 문화를 존중했던 아바스 제국 시절 아라비아로 번역된 후, 이야기가 추가되고 다듬어진 끝에 15세기 지금의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나이트"가 만들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아라비안나이트"는 원래 "페르시안나이트"였던 셈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경우처럼, 페르시아 문화는 이슬람 문명의 핵심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는 아라비아에 점령당하기 이전 여러 번 거대한 제국을 가져본 유일한 민족이었고 이때까지 쌓은 문화적, 역사적 전통이 탄탄했다.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제국의 왕좌를 차지한 뒤, 이란인을 발탁해 행정 관료로 일하게 한 것도 그들이 아바스 제국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도저히 뽑지 않을 수 없는 능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란인은 제국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는 아라비아 민족에게 페르시아의 정치, 행정 노하우는 큰 힘이었다. 이후 이란을 지배한 튀르크족, 몽골족도 페르시아인의 노하우에 의존하게 됐다는 사실, 사람도 문화도 밑바탕이 강하면 어디서든 살아남는 법이다. 이슬람은 페르시아 문화를 만나 풍요롭고 윤기 나는 문명이 되었다. 무미건조했던 이슬람교는 종교적으로 풍요로워졌고, 페르시아의 수학, 의학, 문학, 직물, 제조, 그림, 서적, 장식 등의 학문과 예술은 다양한 문화가 모여 있던 이슬람 제국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는데 큰 이바지를 했다. 이슬람 문명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세 시대 세상에서 가장 앞서 가는 문명이었다. 오늘날 서양문화의 토대가 된 것도 바로 이슬람 문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란을 지배한 튀르크족

동, 서양의 문화가 뒤섞인 아름다운 도시, 이스탄불이 있는 나라 튀르키예(2022년 6월, 터키에서 변경)는 이란 서쪽에 붙어 있는 이웃 국가이다. 튀르키예는 튀르크족이 만든 나라로, 튀르키예가 되기 전엔 오스만 제국(1299~1922)이었다. 오스만 제국 이전엔 셀주크 제국(1037~1194)이었는데, 셀주크 제국 시절 이란은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튀르크인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중국 사서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돌궐족이 바로 그들이다. 이슬람의 바람이 이란을 건너 중앙아시아에 불어 닥치자 튀르크인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슬람 제국의 다양한 통치자들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용맹한 그들을 휘하에 두는 건 당시 통치자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능력 좋은 튀르크족은 점점 힘을 키워 급기야 나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셀주크 제국을 비롯해 가즈나 왕조, 하라즘 샤 왕조 등 여러 튀르크계 왕조가 이란을 지배했다. 원래 튀르크인은 몽골인 같은 동양적인 외모였다. 그러나 서쪽으로 이동해 오랜 시간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그리스인 등과 섞이며 오늘날 튀르키예인의 외모가 됐다. 셀주크 제국 이전의 이란을 다스린 가즈나조는 '페르시아 스타일'제도와 문화로 나라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즈나조의 눈에 띄는 업적은 황금기 왕 술탄 마흐무드(최초 술탄 칭호자)의 인도 정복이다. 그는 보물창고로 불리던 인도를 정복해 이슬람을 인도에 전파했다는 대외명분과 칼리프에게서 '술탄'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즈나조 내부 문제들에 벗어나는 등 여러 이득을 챙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도 정복으로 탄생한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은 이때 흘러든 페르시아-이슬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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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타지마할)


셀주크 제국 탄생

그러나 타지마할을 탄생시킨 인도 점령은, 나중에 가즈나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가즈나조가 끊임없이 인도 점령에 몰두하는 이때 힘을 키운 민족이 셀주크족이었다. 결국 가즈나조는 셀주크족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 소 왕국으로 전락했고, 얼마 후 이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가즈나조 이후 이란을 다스린 셀주크 제국은 절정기엔 제국 동쪽으로 중국, 서쪽으로는 지중해 인근 지역에 이르렀을 정도로 아주 넓은 제국이었다. 셀주크 제국이 가장 거대했을 때의 왕은 말레크 샤(재위: 1072~1092)였다. 그는 셀주크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고 전해지는데 페르시아 출신 재상 니잠 알 물크(1018~1092)의 도움 때문이었다. 니잠 알 물크는 뛰어난 재상이었다. 그는 "시야사트 나메(정부론)"라는 '정치 가이드북'을 써서 왕에게 선사하는 등 셀주크조가 안정된 제국이 되는 데 이바지한 일등 공신이었다. 셀주크 제국의 지배는 이란에게 실보다는 득이었다. 평등하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슬람 제국을 꿈꿨던 셀주크의 왕들은 학문과 예술을 눈에 띄게 발전시켰다. 재상 니잠 일 물크도 자신의 이름을 딴 니자미야대학을 세워 이슬람 신학을 가르쳤고, 페르시아인 출신 이슬람 학자들의 학문도 이때 활발하게 발굴되고 활용되었다. 강력한 통치자 말레크 샤가 죽자 셀주크조는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벌어진 사건이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1095)이다. 당시 크리스트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셀주크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셀주크가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금지하자 화가 난 유럽인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셀주크가 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십자군 전쟁이 아닌 왕자들의 스승 때문이었다. 셀주크는 왕자들을 아타베그라고 불리는 스승과 함께 각 지방의 영주로 보냈는데, 이들이 왕자를 대신해 지방을 다스리다 힘을 키워 독립을 하고 만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국 바깥 상황도 좋지 못했다. 이란은 결국 '하라즘 샤'라는 튀르크계의 손에 넘어갔다. 참고로 오늘날 튀르키예의 모습이 시작된 건 이 셀주크 제국 때이다. 셀주크 제국이 비잔틴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1071) 지금의 튀르키예 땅을 차지하게 됐다. 이후 수많은 튀르크 부족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와 오늘날 튀르키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설의 암살단

셀주크 제국 당시 '전설의 암살단(아사신)'으로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의 한 분파인데 셀주크 정부뿐만 아니라 십자군 사이에서 그 잔혹함과 신비스러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들은 '매의 둥지'라는 별명이 붙은 험준한 알라무트 요새에 공동체를 만들고 암살자들을 양성해 암살을 수행했다. 그것도 적들에게 공포를 주고 자신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인 공공장소에서 암살을 자행했다. 암살단은 유럽의 왕과 십자군들까지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이들의 원래 목표는 아바스 왕조였다. 아바스 왕조의 주요 인물을 암살해 왕조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왜 이들은 같은 무슬림을 방해하려고 한 걸까? 이스마일파는 시아파의 분파로 '7대 이맘파'로 불리기도 한다. 그냥 시아파 중에서도 일곱 명의 시아파 지도자(이맘)만 인정한 분파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 이스마일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북아프리카에서 시아파 파티마 왕조(909~1171)를 만들었는데 이후 수니파 아바스 왕조와 경쟁하며 자신들이 유일한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급기야 파티마조는 수니파 이슬람 제국인 셀주크 제국으로 '하산'이라는 이를 급파해 수니파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렇게 출발한 '암살단'은 험준한 산마다 요새를 마련하고 도시에 잠입해 암살을 저지르고 자신들의 교리를 퍼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셀주크의 재산 니잠 알 물크가 대학까지 세우며 수니파 신학을 퍼뜨린 건 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니잠 알 물크는 끝내 암살단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군 사이에서 이들의 명성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이들의 이름 '아사신'이 나중에 암살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Assasin'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아사신의 유래도 심상치 않다. 아사신은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하사신에서 유래했는데, 이들이 암살 수행 전 초인적인 용기를 갖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목표를 위한 치밀하고 계획적인 암살, 그래서 혹자는 이 암살단을 '테러리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튀르크족이 이란을 지배하기 훨씬 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중동에서 힘센 제국이든 아니든 칼리프에게 인정을 받는 건 중요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어찌 됐건 종교적 수장 칼리프의 인정을 받아야 이슬람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즈나조의 왕 술탄 마흐무드는 인도를 정복한 공로로 최초로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셀주크 제국의 말레크 샤도 넓은 제국을 다스린 덕택에 칼리프로부터 동방과 서방의 술탄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배 튀르크 왕조와 달리 호와르즘 샤 왕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아랄해 남쪽 비옥한 땅을 근거로 나라를 만든 흐와르즘 샤 왕조는 셀주크를 물리친 후 칼리프에게 권력을 인정받으려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하필 당시 칼리프는 이제까지 힘없던 칼리프와 달리 힘을 되찾으려고 했던 깐깐한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너무하다고 생각한 왕 술탄 무함마드(재위: 1200~1220)는 바그다드로 쳐들어갔지만, 바그다드로 진격해 가는 도중 폭설이 내려 복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흐와르즘 샤 왕조가 칼리프에게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이란 역사에서 사실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다름 아닌 술탄 무함마드의 말년에 벌어졌다. 호와르즘 샤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는 끝끝내 칼리프에게 인정을 못 받았다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나라를 비우면서까지 정복 전쟁에 몰입했다. 그러다 동쪽에 있던 한 왕조 카라한조를 멸망시킨다. 역사가들은 바로 이 전쟁을 그가 벌인 최대의 실수로 보고 있다. 즉 이란을 공포로 몰아갔던 유목 민족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로 몽골이었다.


이란인을 공포에 떨게 한 몽골

몽골 하면 떠올리는 인물, 칭기즈 칸(1155?~1227)은 몽골을 대제국으로 만든 지도자이다. 이란이 하라즘 샤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지배하에 있을 때 칭기즈 칸이 이란 역사에 등장한다. 몽골은 중국 북부의 춥고 건조한 지역에 사는 유목민이었다. 칭기즈 칸은 신이 몽골을 위해 보낸 사람처럼, 무서운 기세로 주변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그는 거대한 중국을 거머쥔 후,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후, 이곳을 가로지르는 해외 무역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무역을 위해 이곳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바로 이란이었다. 몽골 사절단은 먼 길을 달려와 이란 동부 국경도시인 우트라르에 도착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몽골이 무서운 기세로 지역을 정복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단박에 일을 마무리하고 몽골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예상치 않게 흘러갔다. 우트라르 지방 총독은 이들이 갖고 온 진귀한 물건에 탐을 냈고, 이들이 페르시아어에 능통한 것을 트집 잡아 간첩으로 모함해 처형하고 보물을 빼앗았다. 물론 술탄 무함마드의 승인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징기즈 칸은 격분해 술탄 무함마드에게 항의의 뜻으로 다시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술탄 무함마드는 또 한 번 이들을 참수시킨다. 서둘러 출격한 몽골의 군대는 우트라르를 초토화시켰다. 몽골의 첫 번째 이란 침입이었다(1218~1221). 칭기즈 칸을 분노케 한 술탄 무함마드는 몽골군에 쫓겨 다니다, 카스피해 인근 지역에서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몽골군은 이곳 출신 무슬림 상인의 안내를 받아 트란스옥시아나, 지금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지역을 침입해 초토화시켰다. 비옥한 땅 위에 서 있는 도시가 처참히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비옥한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은 몽골 침입으로 초토화된 후, 그때까지 누려온 풍요와 번영을 잃고 오늘날에도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술탄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알 딘은 인도로 피신한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와 흐와르즘 샤 왕조를 부활시키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도적 떼에 잡혀 살해당했다. 하라즘 샤 왕조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몽골에 대한 이란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골칫거리 암살단파도,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저항을 계속했다.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는 이런 이란을 두고 볼 수 없어 다시 쳐들어와 아예 이란과 그 일대를 싹 정리해 버렸다. 몽골은 대단했다. 악명 높은 암살단을 알라무트 요새에서 끌어내 제거했으며, 바그다드까지 쳐들어가 아바스 왕조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1258). 마지막 칼리프는 몽골군에게 살해당했고 몽골은 동부 이슬람 세계를 발밑에 두게 됐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훌라구가 욕심을 낼 만도 했다. 그는 이 기세대로라면 할아버지 징기즈 칸이 미처 정복하지 못했던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열정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던 어느 날, 몽골에서 급보가 왔다. 형 뭉케가 사망했디는 소식이었다. 그는 후계 자리를 위해 급히 몽골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가 이집트군에 패하고 둘째 형 쿠빌라이가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란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남게 된 훌라구가 이란에 몽골의 나라를 세우게 됐으니, 바로 일한국이다(1256~1353). 그는 중국의 원나라, 세 개의 한국(차카타이, 오고타이, 킵차크한국)과 함께 거대한 몽골 제국을 이루는 일한국을 세운 뒤 이란인 재상을 등용해 망가진 이란을 복구하려 노력했다. 일한국의 황금기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왕 마흐무드 가잔(1295~1304) 때 찾아왔다. 마후무드 가잔은 원래 불교도였지만, 왕으로 즉위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가잔은 개종한 뒤 이슬람을 국교로 정해 불교 의례를 금지해 버렸다. 현재 이란에서 불교신자를 찾아볼 수 없는 건, 불교를 이교도로 생각했던 아라비아 때문이다. 또한 마후무드 가잔이 이때 벌인 '불교 정리 작업'의 여파이다.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제국 때에 일부 이란인은 불교를 믿었고 불교사원도 존재했지만 가잔 시대, 이란의 불교사원은 모두 모스크로 바뀌었고 이곳으로 이주한 몽골인들도 점차 이슬람에 호감을 갖고 개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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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잔학과 저주

이란인은 이란 중부도시 이스파한 사람을 보고 짠돌이라 말하곤 한다. 이스파한 사람이 인색하다고 인식된 유래는 티무르(1336~1405)에게서 비롯됐다. 티무르는 훌라구처럼 칭기즈 칸의 직계가 아닌 방계(징기즈 칸 작은 증조부의 8대손, 아버지가 몽골군 장수)로 일한국에 이어 이란을 지배한 티무르조(1370~1507)를 탄생시킨 사람이다. 다. 일한국이 쪼개진 후 혼란의 틈에서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하는 티무르조를 세웠다. 그는 전쟁 중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고약한 별명을 갖게 되었지만, 이후 15년에 걸친 정복 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했는지, 이란인은 이때를 이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라고 말한다. 15년 동안 이란의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스파한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탓에 진귀한 보물이 많았던 이스파한은 티무르의 눈에는 보물창고 같았다. 이스파한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이스파한 사람의 저항도 격렬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이스파한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살육했다. 당시 죽은 이스파한 사람은 약 7만 명이다. 이스파한 시내엔 죽은 시체가 산을 이루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로 이스파한의 쟈얀데 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올 정도로 피해는 참혹했다. 티무르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전 몽골의 침입 때도 이스파한은 피해가 컸다. 칭기즈 칸이 항복하는 적에게는 관대했던 반면, 티무르는 물불 안 가리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스파한 사람들이 짠돌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전해진다. 즉 몽골에게 호되게 당한 후, 약탈당할 건 대비해 미리 돈과 음식물을 비축해 놓던 버릇이 생겨 짠돌이라는 오명을 받은 것이다. 티무르는 이란 원정을 마무리 지은 후 수도 사마르칸트를 꾸미며 시간을 보내다 말년에 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충분히 쉬어서인지 연전연승이었다. 티무르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칭기즈 칸처럼 대제국을 이끌겠다는 열망으로 중국을 점령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몽골 사절단이 참수당한 우트라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검은 관 속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 때문에 오랜 세월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6월 소련이 티무르의 관을 열어 조사를 했는데, 그로부터 3일 후 독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이 사건은 소련의 입장에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으로 보였다. 따라서 당시 소련은 티무르의 관을 연 대가로 '티무르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다. 이후 소련은 서둘러 티무르의 관이 열리지 않도록 뚜껑을 납으로 용접했고, 이후 티무르의 관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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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만의 부활, 사파비조

티무르조가 멸망한 뒤 시간이 흐른 후, 세 번째 페르시아 제국인 사파비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했다. 아라비아에게 침략을 당했을 때가 7세기이고, 사파비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한 게 16세기이니, 대략 800년간의 암흑기를 보낸 셈이다. 800년이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어도, 페르시아어를 지키고 더불어 이슬람 문명에 어떤 민족보다도 가장 많이 이바지한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학자들은 페르시아인이 오랜 세월 버틴 비결은 페르시아의 오랜 문화적 전통과 더불어 그들의 유연성과 역동성 때문이라고 본다. 페르시아의 유연한 대처로, 지배자였던 아라비아, 튀르크, 몽골은 모두 페르시아인의 통치력에 의존했고, 페르시아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동시에 800년 시간의 흔적도 이란 사람에게 고스란히 남았다. 이슬람교를 믿고 아라비아문자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란 땅은 오랜 전쟁으로 다양한 민족이 사는 민족의 멜팅 팟(인종의 용광로)이 되었다. 더불어 본심을 숨기고 상대를 배려하는 일명 이란식 빈말 문화도 갖기 시작했다. 이란어로 '터로프'라 부르는 이 언어 습관은 이민족 지배자와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본심을 숨기며 살던 습관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도시는 이란 중부에 있는 이스파한이다. 몽골족과 티무르가 처참히 망가뜨린 도시가 바로 이스파한인데, 이후 들어선 사파비 왕조(1501~1736)의 한 왕 덕분이었다. 이란은 800년간 아라비아, 튀르크, 몽골 왕조에 지배받거나 크고 작은 왕조에 의해 쪼개져 존재해 왔다. 아라비아가 침략한 후 이란인이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란 전역을 오랜 기간 다스린 건, 사파비조가 처음이었다. 사파비조 시기, 시아 이슬람이 국교가 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시아 이슬람을 믿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을 버텨온 페르시아 문화가 꽃피워 많은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오랜만에 이란인이 자랑스러워할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이란의 영광을 되살려놓은 사파비조는 출발이 특이했다. 사파비 왕조를 만든 이스마일 왕의 할아버지는 사파비 종단이라는 종교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 집단의 지지자들이 모여 왕조를 만든 것이다.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큰 힘이 종교였던 셈이다. 사파비 종단은 시아 이슬람 주에서도 12 이맘파를 추종하는 모임이었다. 12 이맘파란 12명의 지도자를 이만으로 인정하는 분파다. 시아 무슬림이라고 하면 12 이맘파라고 보면 될 정도로 시아파의 다수를 차지한다. 시아파 종단은 '키질바시'라는 이름의 열렬한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튀르크 7 부족이 모여 만든 키질바시는 자신들이 믿는 것을 패션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붉은 터번을 머리에 열두 번 칭칭 감는 식으로 열두 이맘에 대한 지지를 표현했다. 키질바시는 바로 '붉은 머리'라는 뜻이다. 사파비조 첫 왕 이스마일(재위: 1501~1524)은 열렬한 신도들과 함께 이란 지역을 정복해 마침내 사파비 제국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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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조와 오스만의 충돌

이스마일왕이 다스리던 당시 동서에 버티고 있던 나라는 튀르키예의 전신 오스만 제국과 인도였다. 인도를 다스리던 바부르왕은 악명 높았던 티무르의 후손이었다. 다행히 바부르왕은 조상 티무르와 달리 평화와 예술을 사랑해 사파비 제국과 별 다툼이 없었고, 오스만 제국이 문제였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강국으로 문제는 수니파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눈에 시아파를 내건 사파비 제국은 이단이었고, 눈에 거슬린 존재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이 사파비 제국을 먼저 공격했고, 그들은 '찰디란'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1514). 신식 무기를 도입해 최신 총기류로 무장한 오스만 군과 달리, 사파비군은 민망할 정도로 무기 수준이 칼과 활이 전부일만큼 초라했다. 그런데 전쟁에 앞서 이스마일왕은 자신감이 있었다. 20여 년 만에 이란을 정복한 터라 승리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군대가 오스만 군의 날렵한 총기에 하릴없이 쓰러지고, 수도 타브리즈가 함락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전쟁에 진 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이스마일왕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 이스마일왕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뿐만 아니라 명예도 땅끝으로 추락했다. 이스마일왕은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 그의 이름을 수없이 중얼거릴 정도로 신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찰디란 전쟁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그도 불완전한 인간임이 여지없이 드러난 꼴이 된 것이다. 이스마일왕 후계자 타흐마습왕(재위: 1524~1576) 때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타흐마습왕은 열 살에 왕이 된 후 키질바시 어른들에 휘둘렸던 터라 왕궁 안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허약한 왕을 둘러싸고 어른들의 싸움, 또 싸움의 연속이었다. 왕궁 상황이 이러하니 전쟁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우즈베크족에게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를, 오스만 제국에게 이라크를 빼앗겼다. 사파비 제국의 땅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한편 이스마일왕은 이란인이 조심스레 믿어오던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했다. 몽골 지배자들이 이란을 짓밟긴 했지만, 종교적으로는 숨통을 트이게 해 주어 시아 이슬람이 확산되는 발판을 마련해 준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했을 때에는 시아 이슬람을 믿는 이란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시아 이슬람을 수니 이슬람에 대적하는 페르시아만의 이슬람으로 만들고 싶었는지, 시아 이슬람을 퍼뜨리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세 명의 칼리프(아부 바크로, 우마르, 우스만)는 알리에게 계승권을 뺏은 것일 뿐이다"라고 사원에서 규탄하는 시아파 관행을 부활시켰고, 신학교에 신학책이 형편없이 적은 걸 보고 외국에서 신학 교사와 교재를 구해왔다. 더불어 시간이 흘러 이맘을 비롯한 시아파 성인들 무덤 순례, 첫 번째 지도자 '알리'와 사고로 비참하게 죽은 세 번째 지도자 '후세인'에게 열정적으로 애도하기 등, 시아 이슬람만의 행동강령 'To Do List '가 만들어진 것도 수니파 관행을 없애고 시아파 관행을 부활시키려는 이스마일의 노력 덕분이었다. 시아파 최대 종주국 이란의 출발은 이러했다. 오늘날 대부분 중동 국가는 한 나라에 수니파와 시아파가 섞여있다. 그런데 이란은 자국 무슬림 중 94%가 시아파 신도로, 시아파 최대 종주국이 되었고,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 무슬림 중 90%가 수니파라 수니파 최대 종주국으로 불린다. 이란과 사우디아리비아가 중동의 맹주를 다투는 경쟁 상대가 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다른 중동국가들은 두 종파가 불안한 비율로 섞여 있는 통에 많은 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이 분쟁이 국가 간, 또는 국제적인 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근래 문제가 되는 시리아 내전이 그런 경우다. 복잡하기만 한 중동 내전은 이슬람 '종파'를 명분으로 한 '힘의 전쟁'으로 보면 조금 쉽다. 이란의 무슬림 성직자들은 이스마일과 타흐마습왕을 거쳐 보조금과 연금을 받으며 '무소유'는커녕 부유하고 힘이 센 사파비조의 권력자로 변해갔다. 나중에는 대지주들이 기부한 땅을 관리하며 상당한 수수료를 받았고, 높은 종교세금을 받았으며 면세 토지까지 받았다. 더불어 교육기관과 행정기구의 요직에 임명되었고 왕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실상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사파비조의 명군, 아바스대왕

타흐마습왕은 허약한 왕이었다. 군대를 만들었지만, 기 센 키질바시 어른들 견제에 실패했고, 어른들 간섭과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가즈빈으로 옮겼을 뿐이다. 타흐마습의 아버지 이스마일왕도 비슷했다.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삼아 종교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강력한 통치에 필요한 군대와 행정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이런 혼란스러운 나라를 진정시킨 아바스대왕(1587~1629)이 등장했다. 그는 우리의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처럼 대왕으로 불리며 이란인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아바스대왕의 눈에 띄는 첫 번째 업적은 '이란 기 살리기'였다. 그는 새 군대 '굴라만 부대'를 만든 후, 영국에서 초빙한 군사 전문가의 조언으로 무기와 전술을 근대화해 우즈베크를 무찌르고 오스만 제국에게 20년의 시간을 들여 이라크를 되찾고, 이란을 공격한 포르투갈을 무찌르는 등 눈부신 정복 전(戰)을 벌였다(1620).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무역항은 남부에 있는 반다르 아바스이다. 아바스대왕이 포르투갈을 내쫓은 곳이 반다르 곰브룬으로, 이 전쟁을 계기로 이곳은 반다르 곰브룬에서 반다르 아바스(아바스의 항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바스대왕의 '이란 기 살리기' 정복 사업도 물론 훌륭했지만, 진정한 업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수도 이스파한을 우아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각지에서 훌륭한 건축가를 불러 이스파한에 아름다운 궁전, 학교, 모스크를 차례차례 지어나갔다. 그중에서 궁전과 모스크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 '이맘 광장'과 인근 풍경은 지금 봐도 너무 아름답다. 페르시아 제국에 온 느낌이 물씬 든다. 더불어 아바스대왕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묘책을 썼다. 그는 이란 북서쪽 졸파라는 곳의 부유한 비단 상인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스파한으로 데리고 와 비단을 팔게 했다. 이스파한에 돈이 돌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바스대왕은 아르메니아인에게 세금을 줄여주고, 스스로 자치를 허락하는 등 여러 혜택을 줬다. 교회도 지어 줬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사파비 왕조 동안 이스파한엔 교회가 무려 열세 개나 지어졌다. 이스파한에 있는 졸파, 신 졸파는 이렇게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교회가 남아있다. 크리스트교도인 아르메니아인이 이쪽으로 오니 자연스레 크리스트교 선교사와 아르메니아인과 종교적으로 가까운 유럽인도 아스파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연스레 비단 무역을 비롯해 카펫, 직물 무역이 발달했고, 이스파한은 점점 큰 국제 무역도시로 커갔다. 이 때문에 사파비조 당시 성직자와 함께 상인들의 힘도 날이 갈수록 세졌다. 한편 페르시아 하면 떠오르는 상품이 바로 카펫이다. 카펫은 이란에서 아케메니아 페르시아 제국 때 처음 바닥 깔개에서 예술품으로 업그레이된 뒤 역사에 따라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품으며 발전했다. 사산 왕조 때 그 유명한 '호스로의 봄' 카펫에 이어 아라비아가 침략한 뒤엔 아라베스크(아라비아풍) 무늬로 만들었고, 튀르크족 침략 뒤에는 튀르키예식 매듭으로 카펫을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펫, 페르시아 카펫을 이렇게 유명하게 만든 이는 바로 아바스대왕이다. 왕은 왕실 직속 카펫 공장을 만들어 카펫 장인, 화가, 시인을 한데 모아 놓고 이들이 함께 카펫을 만들게 했다. 요샛말로 하자면, 콜라보레이션(협업)이 이뤄진 셈이다. 그전까지 카펫은 일반인이 디자인해서 만들었는데, 화가들이 디자인을 맡으면서 카펫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진 것이다. 사파비 왕조 때 이런 카펫 예술뿐만 아니라 직물 예술, 금속공예, 서적 장식 등 갖가지 예술이 더 정교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사파비조 예술의 또 하나의 걸작은 다양한 색의 타일과 모자이크 타일을 사용한 건축물이다. 특히 이스파한의 이맘자데 모스크를 장식한 모자이크 타일 장식은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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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 이맘자데 모스크 내부)


사파비조의 내리막길과 멸망

아바스대왕은 여러모로 사파비 제국을 발전시킨 훌륭한 왕이었지만, 딱 하나 단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의심과 불안이 많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동생을 장님으로 만들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아들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하렘에서 키웠다고 하는데, 아바스대왕의 마음은 편했을지 몰라도 사파비조에게는 불행이었다. 하렘 안에서 멍청해진 왕자들은 왕이 된 후에도 환관이나 궁중 여인의 치마폭 아래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바스대왕이 죽은 후 사파비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힘은 나날이 세져 급기야 자신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 입장에서 보자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다. 사파비조를 멸망시킨 것은 속국인 아프간이었다. 사파비조 왕 술탄 후세인은 부랴부랴 군대를 보내 아프간을 무찌르려 했지만 허약한 왕조의 패배였다. 이스파한은 아프간에 포위됐고, 왕은 몇 달 후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아프간 군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파한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스파한의 귀중품을 빼앗았다. 사파비조의 끝이었다. 사파비조는 이렇게 200년 만에 사라졌지만, 800년 만에 페르시아를 부활시킨 왕조였다. 아라비아, 튀르크, 몽골이라는 거대한 바람에 꿋꿋이 버티다 기어이 만들어낸 이란인 국가, 이렇게 긴 시간을 건너 다시 이란인의 나라를 만든 건 아무리 봐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파비조는 지금 이란의 틀을 만든 나라였다. 이란인이 만든 나라이고,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걸었으며 뛰어난 페르시아문화를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이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직자와 상인이 커나갔던 시기이다.


아프사르조의 단명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는 '코이누르'라는 다이아몬드로 영국 여왕의 왕관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이다. 108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1526년 인도 무굴 제국의 왕 바부르의 손에 들어온 후 인도와 페르시아 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1980년 영국으로 옮겨졌다. 이 다이아몬드를 두고 인도와 페르시아의 왕이 수차례 싸움을 벌여 피 묻은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이 붙은 코이누르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이것을 소유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남성은 착용하면 안 된다는 전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코이누르를 손에 쥔 이란의 왕 나디르 샤(재위: 1736~1747)는 사파비조 이후 아프사르조(1736~1796)를 세웠지만, 이란을 오래 다스리지 못하고 곧 멸망했다. 사파비조 말기 나디르는 암울했던 이란의 구세주였다. 당시 농민들은 가난했지만 세금은 무거웠으며 무역업도 한산했다. 유럽인이 지리상의 발전으로 중동을 거치지 않고, '바닷길'로 인도와 중국으로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사파비조 왕 술탄 후세인은 시아파 광신도여서 수니파를 가혹하게 탄압했고 프랑스와 굴욕적인 무역협정을 맺는 등 도움보다 방해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이가 전쟁의 천재 '나다르'였다. 작은 도시의 지방 사령관이었던 그는 지긋지긋한 아프간군을 이란에서 내쫓았다. 그러고는 오스만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사파비조 왕을 쫓아내고 오스만에게서 뺏긴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되찾았다. 나디르는 이란인에게 구세주 그 자체였다. 그는 아프사르라는 자신의 왕조를 세운 뒤에도 계속 전쟁에 몰두했다. 이만하면 전쟁의 천재가 아니라 전쟁 중독증이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12년간 대부분 전장에 있었다. 인도에서 코이누르를 뺏어온 것도 아프간과 전쟁 중 인도로 도망간 아프간 지도자를 추격하다 무굴 제국을 정복하게 되면서였다(1739). 나디르는 이때 '코이누르'를 포함해 인도에서 많은 보물을 약탈했다. 3년간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정도로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흥한 자, 전쟁으로 망한다'라는 격언처럼 그는 전쟁에 몰두하느라 나라 문제에 신경을 못 썼고, 결국 아프사르 왕조는 60년 만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디르 샤의 몰락은 코이누르의 저주라기보다는 전쟁광의 몰락이었다.


잔드조의 짧은 태평성대

오늘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800㎞ 떨어진 시라즈는 근처에 아케메니아 페르시아의 유적지 페르세폴리스, 파사라가데, 나그시에 로스탐이 있어 관광객이 꼭 들르는 도시다. 더구나 이곳은 이란의 유명한 시인 '하페즈'와 '사디'의 아름다운 무덤이 있는 시와 꽃의 도시기도 하다. 한데 이 도시에 특이한 점이 있다. 시장이건 모스크건 거리건 목욕탕이건 다 '바킬(vakil)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킬은 우리말로 '부왕' 또는 '섭정자'라는 뜻으로, 아프사르 왕조에 이어 이란을 다스린 잔드조(1750~1794)의 왕 명칭이다. 잔드조의 창시자 카림 칸 잔드(재위: 1750~1779)는 자신을 왕이 아닌 사파비 왕조의 대리인이라 불러달라고 했을 만큼 겸손한 왕이었다. 카림 칸 잔드는 혼란스러운 아프사르조 치하, 세력을 다툰 여러 지방 군벌 중 한 명으로 그가 이란 대부분을 정복해 잔드조를 만들었다. 잔드조 영토는 사파비 제국의 반 정도였는데, 이란의 어떤 왕조보다도 안전하고 평화로웠다. 유일하게 치른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니, 작지만 알토란 같은 나라였던 것이다. 잔드조는 사파비조를 교훈 삼아 통치한 것처럼 사파비조 때 미흡한 점은 개선했고, 사파비조에서 잘한 것은 본보기로 삼았다. 바닷길로 나선 유럽 국가들, 이를테면 영국, 프랑스와 무역협정을 맺어 나라에 돈이 쌓이도록 노력했고, 농민을 위해 관개시설도 만들어주고 땅값과 세금을 낮춰주었다. 수공업자를 위해선 도자기 공장, 유리공장을 지어주었다. 더불어 시라즈시에 길과 공원을 만들어 아름답게 꾸미고 수많은 건축물 세웠다. 지금 시라즈시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시인의 무덤, 바킬 시장, 바킬 모스크, 바킬 목욕탕, 카림 칸 요새 등은 이때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카림 칸이 죽은 뒤에 잔드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카림 칸의 후계자 로트프 알리 칸(재위: 1789~1794)은 잔드조를 일으켜 세우려 노력했지만, 카자르족 출신 아가 무함마드 칸이 제동을 걸었다. 그는 아프사르조 치하 또 다른 군벌 카자르족 장군의 아들이었다. 그는 쉬라즈를 공격한 후 로트프 알리 칸을 쫓아 케르만시(市) 성안으로 쳐들어간 뒤 로트프 알리 칸을 처형했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그는 2만 명에 달하는 케르만 남성을 맹인으로 만들었고, 부녀자를 카자르군의 노예로 만들었다. 잔인한 아가 무함마드 칸은 이후 카자르 왕조를 설립한다. 이란의 굴욕적인 왕조, 카자르조의 출발은 이러했다.


이란의 가장 굴욕적인 시대, 카자르조

이란 지도를 보면, 이란 북서쪽에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그루지야, 대한민국은 조지아 요청에 따라 2011. 3. 22.부터 그루지야에서 조지아로 국명 표기를 변경) 세 나라가 붙어 있다. 이 일대를 코카서스(캅카스) 지역이라고 한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낀 이 코카서스 지역은 고대부터 이란 땅이었다. 또한 이란 동쪽 아프가니스탄 일부도 이란 영토였다. 그러나 카자르조 시대(1794~1925) 때 이 땅이 모두 떨어져 나갔고, 이란은 지금의 영토에 이르게 됐다. 카자르조 때 이란 영토를 지금 크기로 만들어놓은 주역은 다름 아닌 러시아와 영국이었다. 카자르조 내내 이란을 흔들어 놓은 나라도 바로 이 두 나라다. 테헤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골레스탄(Golestan) 궁전 건물이다. 400년 된 이 건물은 사파비조 때 요새로 지어졌지만 아가 무함마드 칸이 이곳을 궁전으로 바꾸었고, 이후 오랜 시간 카자르 왕조의 궁전으로 쓰였다. 이 건물은 페르시아의 양식과 유럽의 양식이 묘하게 결합된 궁전이라 평가받는데, 그도 그럴 것이 궁전의 홀 천장엔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바닥엔 붉은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다. 골레스탄 궁전은 유럽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러시아에 큰 영향을 받았던 카자르조의 굴욕적인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누리던 중세가 막을 내린 후 찾아온 18세기는 유럽의 시대였다. 유럽은 산업혁명을 거쳐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고 남아도는 돈을 쓸 식민지를 찾아다녔다. 영국은 광대한 땅과 인구, 자원이 풍부한 '영국 제국주의의 꽃'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남쪽의 존재감 있는 나라 이란에 일찌감치 관심이 많았다. 여기에 프랑스도 가세해 이란을 흔들어 놓았다. 아가 무함마드 칸은 잔드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남부를 휩쓴 후, 이란 북부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고, 이란 동부도 곧바로 정복했다. 그는 드넓은 땅을 점령하고 자신에게 페르시아의 유명한 자화자찬 칭호인 '왕 중 왕'을 선사했지만 하인의 손에 암살당하고 말았다(1797). 전쟁에만 몰두하지 않고 백성의 삶을 챙기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진 카자르조의 첫 왕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가 무함마드 칸의 조카이자 후계자 파트 알리(재위: 1797~1834)는 삼촌처럼 강인하지 못했다. 왕좌에 앉은 뒤에도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왕이 되는 데 힘쓴 재상까지 나중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제거해 버렸다. 파트 알리 통치 시기, 왕의 이름처럼 이란은 강대국들의 한 '파트'가 된 것처럼 심하게 간섭을 당하던 시기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나폴레옹이 왕이 된 뒤 강국이 된 프랑스, 이란 북쪽의 거대한 나라 러시아, 이란은 이 세 나라와 약속과 배신을 거듭하며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영국과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프랑스는 왜 이란에 관심을 뒀을까? 사실 프랑스가 목표로 한 곳은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 러시아였다. 이란은 이 두나라와 가깝다는 이유로 중요해졌고 한동안 세 강대국의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많은 영토를 잃고 말았다. 프랑스는 이란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기 전, 군사를 보내주겠다는 협정을 맺었지만 정작 이란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자 프랑스는 못 본 척했다. 영국도 비슷했다. 영국은 이란이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임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돈과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지만,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란이 프랑스, 영국과 쓸모없는 협정을 맺고 있을 때, 러시아는 이란 북쪽 코앞까지 군사를 보내더니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황태자 아바스 미르자까지 전선에 나서서 러시아와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영국은 궁지에 몰린 이란을 돕나 싶더니,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략하자 갑자기 태도를 돌변했다. 갑자기 러시아와 손을 잡더니, 이란에게 러시아와 협정을 맺으라고 강요했다. 이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돌변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란은 이리저리 휘둘리다 영국이 강요해 러시아와 맺은 골레스탄 협정(1813), 또 한 번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실패한 뒤 맺은 투르크만차이 협정(1828), 이 두 협정을 맺고는 코카서스 지역 전체를 뺏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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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레스탄 궁전 내부)


점점 작아지는 이란의 영토

세 번째 왕 무함마드 샤(재위: 1834~1848)가 영국의 방해로 아프가니스탄의 해라트를 빼앗긴 뒤 제4대 왕 나시르 알 딘 샤(재위: 1848~1896) 때인 1856년 이란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헤라트를 공격했다. 여기에 영국이 가세해 일어나게 된 일명 영국-페르시아 전쟁(1856)은 사실 러시아와 영국의 전쟁이었다. 왜 러시아는 이란을 도와준 거며 영국은 왜 이 공격에 자꾸 끼어든 걸까? 러시아는 이란으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 추후 자신들이 인도로 편하게 가려는 속셈이었고,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를 막기 위한 보루로 생각하고 말았다. 이란은 결국 이 전쟁에서 패배했고, 파리 강화협정(1857)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독립하고 말았다. 이후 여러모로 쇠약해진 이란은 1881년 러시아에게 다시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일부를 잃고 말았다. 정리해 보면 70년에 걸친 러시아, 영국 두 나라와의 전쟁으로, 이란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뺏기고 말았다. 이란의 영토가 지금에 이르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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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조가 상실한 캅카스 3국)


영국인에게 거덜 날 뻔한 사건

전쟁으로 영토를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다. 힘의 싸움에서 진 것이니. 그러나 이란이 한 나라가 아닌 개인을 상대로 굴욕적인 계약을 맺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난 건 나시르 알 딘 시기였다. 그는 무려 두 번이나 영국인에게 특혜를 주려다 곤욕을 치렀다. 첫 번째는 로이터라는 남작에게 준 특혜이다(1872). 그는 로이터 남작에게 약간의 지분과 돈을 받는 대가로 철도를 건설할 권리인 철도 부설권, 광물과 산림, 은행, 지하수로 등의 이익 독점권을 줬다. 듣기만 해도 이건 개인이 아닌 한 나라가 가질 규모였다. 영국은 이 계약이 로이터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라며 모른 척했지만 반발은 거셌다. 러시아도 흥분해 반발했고, 이란 국민도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다. 이 계약은 당시 카자르 왕조의 정치인 두 명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추진한 일이라고 전해지는데, 혹자는 이들이 러시아의 손길에서 이란을 구하고 이란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라 보기도 한다. 어찌 됐든 당시 이란은 한 개인과 계약을 맺을 정도로 나라 상황이 어지럽고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계약을 맺은 영국인 로이터는 유명한 영국의 국제통신사 '로이터 통신'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 계약은 탤벗이라는 영국인과 맺은 담배 전매 특혜 계약이다(1890). 쉬운 말로, 모든 이란산 담배를 독점 판매할 권리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란은 해마다 일정한 돈과 이익의 4분의 1을 받는 대가로 이란 담배 농부들이 담배를 판매할 권리를 모두 텔벗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약이 시행되기도 전에 이란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사파비조 이래 힘이 세진 성직자들. 성직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당시 종교 지도자가 파트와(성직자가 시리아 법에 근거해 법 해석을 내리는 것)를 내려 이란 사람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란인은 그의 말을 받들어 물담배를 깨뜨리고 담배에 불을 질렀다. 이에 생각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나시르 알 딘은, 결국 이 계약을 취소했다.


카자르조의 변화 시도

앞에서 영국인 로이터와 굴욕적인 두 번의 계약을 체결한 나시르 알 딘 샤는 카자르조의 변화를 누구보다 바라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란이 근대적으로 변해야 나라가 강해진다고 믿어 전기신호를 이용해 소식을 주고받는 전신과 서구식 우편체계를 도입했고 도로망을 넓혔으며, '다르 알프눈'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이란 최초의 신문 '거예에 에테퍼기'를 발행했다. 더불어 서구의 과학, 기술, 학문을 이란에 가져와 전수했다. 그러나 근대화 개혁엔 너무나 많은 돈이 들었고 외국에 빌린 빚(차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라 재정은 급격히 어려워졌다. 나시르 알 딘 샤가 굴욕적이라도 계약을 맺고 돈을 받으려 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화를 외쳤던 나시르 알 딘 샤는 이슬람 사상가의 한 추종자에게 암살을 당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계자는 그의 아들 무자파르 알 딘 샤(재위: 1896~1907)이다. 그는 온건한 성격으로 서유럽식 학교를 도입하고 개혁적인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는 등 나름 변화를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영국과 러시아에게 진 빚만 늘어가는 암울한 상황이 됐다.


카자르조의 굴욕과 쿠데타

그러던 1905년 테헤란 시장에서 변화의 기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테헤란 시장이 사소한 이유로 상인들에게 나무 태형을 내렸는데, 이 소식이 삽시간에 시장 전체에 퍼진 것이다. 상인들은 단체로 상점 문을 닫고 '바스테네쉬니'를 하기 시작했다. '바스테네쉬니'란 약자를 위한 보호책이라는 뜻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이 순례자나 성직자의 집에 들어가 보호를 받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관습이다. 흥미로운 건,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거기서 지내도 되며, 누구도 이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직자는 상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아예 한 이슬람 사원을 '바스트(정부의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성역)'로 지정하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외치기 시작했다. 총리의 해임, 제헌의회, 의원 선거, 법원의 도입 등을 요구했다. 국민의 의견과 법을 바탕으로 제대로 통치하라는 것이었다. 성직자와 상인은 사파비조 이래 힘을 가진 뒤, 카자르조 시기 담배 불매 운동을 계기로 똘똘 뭉쳐 이제는 혁명을 요구하는 거대한 세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자파르 알 딘 샤는 서면으로 순순히 이 제안을 수락했지만, 혁명세력들이 테헤란으로 몰려들자 돌변했다. 왕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신학생을 숨지게 했고, 더구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지닌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포악함을 보였다. 많은 혁명가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해, 1906년 여름만 해도 대사관 안에 1만 2,000명이나 되는 이란인이 체류하며 저항했다. 무자파르 알 딘 샤는 결국 시위대에 승복했고, 1906년 9월 첫 선거가 치러졌다. 이처럼 혁명이 승리한 뒤, 많은 작가와 언론인이 법에 기대어 수많은 간행물과 시, 소설을 쓰고 출판했다.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에 따라 정당과 정치 모임이 생겼다. 이렇게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가나 했더니, 무자파르 알 딘 샤의 후계자인 무함마드 알리(재위: 1907~1909)가 제동을 걸었다. 그는 러시아 지지를 받으며 노골적으로 입헌정치를 방해했다. 왕의 즉위식에 의회 대표들을 단 한 명도 초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회 대표들이 만든 헌법에 서명을 거부했다. 어느 날 무함마드 알리가 테헤란에서 총격 테러를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왕은 테러 배후에 입헌정치가들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니 왕이 이 사건을 조작했던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거국적으로 저항했다. 이런 상황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07년 8월의 어느 날, 영국과 러시아가 협상 끝에, 이란을 케이크 자르듯 세 등분해 나라를 다스기로 한 것이다. 중, 북부는 러시아가, 남부는 영국이 중간은 중립지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왕은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양국이 이란을 점령한 틈을 타 러시아 장교를 동원해 의회 건물을 폭파하고 급기야 의회를 없애 버렸다(1908). 결국 혁명세력은 군대를 만들어 테헤란을 점령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혁명군의 승리였다(1909). 혁명정부가 승리를 쟁취해 왕을 쫓아냈지만 아직 쫓아내지 못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영국과 러시아였다. 혁명정부가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아흐마드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미국인 재정 전문가 슈스터를 데려와 이란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자, 영국과 러시아는 집중적인 방해를 했다. 어느 날 러시아는 의회에 "슈스터를 자르시오. 그리고 관료를 뽑을 때는 우리와 영국의 동의를 얻어야 하오"라는 최후통첩의 편지를 보냈다. 당연히 이란 의회는 이를 무시했다, 하지만 어린 왕 아흐마디를 섭정하던 나시르 알 몰크라는 끝내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의회는 해산됐고, 슈스터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혁명정부의 끝이었다. 아흐마드 왕이 성인이 된 1914년 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 세계를 휩쓴 전쟁의 광풍은 이란에까지 몰아쳤다. 전쟁이 아니어도 이란 상황은 충분히 암울했는데, 허약한 왕 아래 부패한 기득권층과 친 외세 인사들이 활개를 쳤고, 영국에겐 대놓고 석유를 빼앗기고 있었다. 영국은 중립지역에서 석유를 발견한 후, 재빠르게 영국-이란 석유회사현재 영국 석유회사 BP(Britain Petrolume 전신)를 설립하고 대주주가 돼 열심히 이란 석유를 파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란 땅은 영국, 러시아, 독일, 튀르키예의 전쟁터가 되어 난리법석이었다. 새로 등장한 독일은 영국에 위협이 될 만큼 힘이 센 강국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얼른 러시아와 비밀 협정을 체결하며 힘을 합치지만, 러시아는 1917년 11월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본국 문제에 정신이 팔려 이란에서 손을 떼게 됐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란에 유일하게 남은 외국세력은 영국이었다. 러시아는 떠났고, 독일과 튀르키예는 초라한 패전국이 되어 있었다. 영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9년 영국-페르시아 협정을 체결하는데, 이 협정은 이란이 인도에 이은 새 식민지로 보일 만큼 영국 위주의 협정이었다. 더불어 이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았다. 많은 이란인이 이 협정을 반대했고,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총리와 내각이 바뀌었을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1921년 의회는 이 협정을 부결했고, 이 협정은 취소되었다. 불평등한 협정으로 반영 감정은 극에 치닫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이란에 대한 개입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영국은 극렬한 적대감을 표출하던 이란인의 시선을 피해 레자 칸이라는 카사르조의 사령관과 정치인 사이드 지야 알 딘 타바타바이를 꼭두각시처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허약한 카자르조 아흐마드 왕은 별 힘도 못 쓰고 레자 칸을 국방장관에, 타바타바이를 총리에 임명했다. 이후 레자 칸은 카자르조의 실질적인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는 군대를 쥐고 있었다. 권력 싸움에 밀린 총리 타바타바이도 해외로 망명했다.


새로운 영광을 꿈꾼 팔레비조

흔들거리던 카자르조에 이어 들어선 팔레비조(1925~1979)는 영국의 은밀한 공작 산물이었다. 쿠데타 후 실권을 쥔 국방장관 레자 칸은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카자르조의 허약한 군대와 재정체계를 뜯어고쳤다. 직접 앞장서 서유럽식 군대를 만들고, 미국에서 밀스포라는 재정전문가를 불러와 카자르조의 구멍 뚫린 재정을 바로 잡았다. 급기야 그는 카자르 조의 마지막 왕 아흐마드(재위: 1909~1925)를 내쫓은 후, 옆 나라 튀르키예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발의 영향을 받아 이란도 왕이 아닌 국민이 뽑은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대화된 공화국'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튀르키예의 공화제가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제를 없애고 들어선 제도라 탐탁지 않아 했다. 결국 레자 칸은 이 왕조 내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꿈꾸는 이란을 만들기 위해 아예 자신의 왕조를 새로 만들었다. 바로 팔레비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레자 칸은 1925년 의회를 통해 카자르조의 종말을 알리고 팔레비조의 탄생을 알렸다. 그의 이름도 레자 칸에서 레자 샤(왕)로 바뀌었다. 레자 샤(재위: 1925~1941)는 왕이 된 이후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약 20년의 짧은 기간에 이란의 다양한 분야를 뜯어고쳤다. 우선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군대와 나라를 운영할 관료, 이 두 분야를 기르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신경 쓴 부분은 법과 교육이었다. 경제법(1925), 형법(1926), 민법(1928) 등 레자 샤는 통치와 삶의 튼튼한 기준이 될 법을 프랑스법과 이슬람법을 참조해 만들고, 프랑스 학교를 롤모델로 삼아 전국에 초등학교를 세웠다. 교과 과정도 말끔하게 하나로 통일시켰다. 또 외국인 학교, 소수민족 학교, 소수 종파 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국, 공립학교로 바꾸었다. 이란 최고의 대학인 테헤란대학교도 바로 레자 샤 때 설립되었다(1935). 똑똑한 이란 젊은이들은 외국으로 유학가기도 했고 여성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레자 샤는 법과 함께 국민들이 똑똑해져야 나라가 쓰러지지 않고 튼튼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레자 샤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 '석유 국유화'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이때 이란을 가로지르는 철도가 건설되었고, 이란 전역을 하나로 만드는 전화, 통신, 방송망도 만들어졌다. 다양한 부분에서 불어난 세금으로 레자 샤의 개혁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란의 탄생

급속하게 개혁을 진행하던 레자 샤는 마침내 나라 이름까지 바꾸었다. 그는 오랜 세월 써온 이름 '페르시아'

를 버리고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의 이란으로 바꾸었다(1935). 레자 샤는 나라 이름을 뜯어고칠 만큼 개혁 열망이 강했지만, 그가 나라 이름을 바꾼 건 다른 속셈도 있었다. 당시 이란이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 독일과의 연결고리, 즉 두 나라 모두 아리안계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해 이란이 다른 미개한 중동 국가와 달리 유럽과 가까운 나라라고 보이고 싶어 한 것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이름, 이란이라는 국명은 이때 등장한 것이다. 레자 샤는 이슬람을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왕조가 페르시아 제국을 계승한 왕조라고 주장하며, 이슬람은 이란의 몰락을 가져왔던, 이란의 발전에 해가 되는 낡은 종교라고 봤다. 그의 법 제정과 교육정책, 히잡 금지정책 등은 이란엔 새로운 변화였지만, 이슬람을 바탕으로 법학자와 교육자로 권력을 누리던 성직자에게는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팔레비조의 폭정과 망명

팔레비조의 레자 샤는 강력하게 개혁을 밀어붙이는 만큼, 왕과 정부에 방해될 만한 세력은 걸림돌로 여겨 많은 이들을 죽였다. 모순적이게도 늘 예술은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꽃핀다는 사실, 이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풍자 글을 쏟아냈다. 한국에서도 번역된 "눈먼 부엉이"는 바로 이때 쓰인 소설이다. 이 책의 작가 헤다야트는 당시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이란을 떠나 인도에서 책을 출간했다. "눈먼 부엉이"(1936)는 이후 20여 개국에서 출판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음울한 내용 때문에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자살해 한동안 금서로 여겨졌다. 저자 헤다야트도 결국 파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이 변화를 맞는 시기가 곧 찾아오는데, 그 계기는 바로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란은 전쟁의 광풍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나중에는 독일군이 우세하다고 보고 독일과 친하게 지냈다. 이란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란을 간섭한 영국보다는 '나치 독일'을 더 선호했다. 이에 이란과 독일의 무역교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고 친독(親獨) 정치인들은 나라를 찬양하며 독일인과 이란인은 한 뿌리라고 대놓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에 영국은 독일에게 석유를 빼앗길까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소련(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나라 이름)과 똘똘 뭉쳐 레자 샤에게 독일 시민을 모두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레자 샤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영-소 연합군은 이란을 공격했다. 나름 강해진 이란 군대라 해도 연합군의 공격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전쟁에서 패한 레자 샤는 남아프리카로 망명하고, 아들 모함마드 레자 샤가 왕이 됐다. 레자샤가 떠난 후, 이란인은 숨통이 트인 것처럼 홀가분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때가 이란을 독재 국가에서 자유로운 나라로 바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영국에 뺏긴 석유를 되찾아오자"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주장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아야톨라 카샤니라는 성직자와 무함마드 모사데크라는 정치인이었다. 이 둘은 힘을 모아 1950년 의회의 승인을 받고, '석유 국유화'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석유 위에 똬리를 튼 뱀, 영국은 당시 이란산 석유를 수입하던 미국과 힘을 합쳐 이란 석유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도움을 끊어 버렸다. 이어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소련은 이란산 석유를 수입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일본과 이탈리아도 이란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이란 석유를 겨우 이란 것으로 만들어놨더니, 석유 파는 통로가 끊긴 것이다. 석유 국유화로 이익은커녕 경제적인 손실이 늘어났지만, 젊은 왕은 인기가 높은 총리 모사데크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참다못해 왕은 모사데크를 쫓아냈지만, 성직자를 필두로 국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해 왕이 급기야 로마로 망명하고 말았다. 아버지 레자 샤에 이어 아들 모함마드 레자 샤까지 이란을 떠나니,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두고 이란 왕정이 끝났다고 대서특필했다.


미국 CIA의 공작

미국의 정보기관 CIA는 영국의 정보국과 모의해 벌인 아작스 작전(1953)으로 모사데크가 잠시 이끌던 이란 정부를 몰아내고 모사데크를 체포한다. 모사데크는 체포돼 3년을 살았고, 그 후 고향에서 쓸쓸히 살다 죽었다. 미국 CIA의 아작스 작전은 이란 국민들이 미국을 증오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석유는, 미국과 영국이 만든 이상한 석유 조합에 의해 갈기갈기 쪼개졌다. 이 조합으로 영국과 미국은 각각 이란 석유의 40%를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작전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이었다. 영국이 독점하다시피 한 이란의 석유를 미국이 영국만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석유를 판 순이익의 40%만이 이란의 몫이었다. 모사데크가 CIA에 의해 축출된 후, 로마로 떠난 모함마드 레자 샤 왕은 다시 돌아와 황당한 말을 했다. "어제까지의 나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이제 나는 국민에 의해 뽑힌 샤(왕)이다" 이후 레자 샤는 다시는 이란을 망명하지 않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다. 걸림돌이 될 주요 정당을 없애고, 언론을 통제하고, CIA의 도움으로 사바크(SAVAK)라는 정보기관을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다.


이란 자본주의 프로젝트, 백색혁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의 대결로 번져갔다. 미국과 소련은 소리 없는 전쟁, 즉 냉전을 치르며 세계 최강의 라이벌 관계였는데, 이란이 있던 중동지역에서도 대결이 치열했다. 미국은 중동에서 소련의 입김이 세지자, 소련을 막기 위해 이 지역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960년 미국은 이란에 조금 더 깊숙이 개입하기 위해, 그리고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이란 근대화된 자본주의 만들기'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1963년 일어난 '백색 혁명'이 바로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 혁명은 정부에서 강제로 실시했지만 피를 발생하지 않은 혁명이기에 '백색 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백색 혁명의 6개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토지개혁, 산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근로자에게 회사 이윤 분배, 문맹 퇴치 운동, 선거법 개정이다. 얼핏 봐도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백색혁명으로 이란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문맹 퇴치를 위해 전국 곳곳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문맹 퇴치단이 차를 타고 이란 각지로 이동해 교육을 했다. 더불어 까다롭던 여성의 이혼 조건이 느슨해지고, 여성이 투표권과 선거권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백색혁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왕은 보란 듯이 지금까지 왕실이나 성직자가 갖고 있던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성직자들은 사파비조 이후부터 받은 땅을 헐값에 팔아야 했다. 더불어 문맹 퇴치단의 활약으로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갈 곳을 잃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혁명은 이란 성직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정부 세력의 상징,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1979년 이슬람 혁명, 바로 지금 모습의 이란을 만든 이슬람 혁명의 주인공이다. 고위 성직자이긴 했지만 평범한 종교인이던 호메이니가 이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건, 그가 백색혁명에 발 벗고 반대하며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부터이다. 사실 그가 처음 정부를 비난한 건, 1963년 백색혁명이 통과되기 1년 전부터였다. 레자 샤는 1962년 지방 의회법을 제정했는데 이 내용이 호메이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의원들이 이전처럼 "쿠란"에만 선서를 하는 게 아닌, 모든 '신성한 책'에 선서 할 수 있었다. 이슬람만이 아닌 다른 종교에 대한 맹세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더구나 왕은 이 법을 당시 최고 성직자가 세상을 떠난 틈을 타 통과시켜 호메이니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최고 성직자가 된 뒤 이 법의 폐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고, 결국 이 법을 폐지시켰다. 뒤이어 왕이 실시한 백색혁명도 호메이니를 비롯한 성직자, 그리고 성직자와 똘똘 뭉친 상인들이 힘을 합쳐 반대했다. "그들은 항상 어리석고 보수적인 패거리였다. 그들의 뇌는 1,000년 동안 회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면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다" 왕이 이렇게 성직자를 비꼬는 연설을 하며 농민들에게 땅문서를 나누어주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분노했다. 1963년 페이지예라는 이름의 신학교에서 정부의 비밀요원 소행으로 성직자와 학생이 사망하고 부상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성직자, 상인, 국민 등 반정부 세력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번졌다. 호메이니를 필두로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들끓고 그의 존재감이 정부를 위협하자 정부는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11월 4일 새벽 정부의 특공대원들은 호메이니를 체포해 감옥이 아닌 국제공항으로 끌고 갔다. 호메이니는 튀르키예로 추방되었고, 이때부터 호메이니는 1979년 이란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15년간 국외를 떠돌게 된다. 왕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라는 말을 믿고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했지만, 이후 벌어지는 사건은 왕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호메이니는 튀르키예로 추방된 후 튀르키예에서 1년 남짓 망명 생활을 하다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의 최대 순례지 나자프에서 13년간 긴 망명 생활을 했다. 그가 이란에 돌아오기 전 머문 마지막 망명지는 프랑스 파리 교외 노플 르 샤토라는 곳이었다. 호메이니는 튀르키예에서 이란인과 떨어진 채 고독한 망명 생활을 보냈지만, 신학 공부를 하고 책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망명 생활 절정은 이라크 시절이었다. 사실 왕이 호메이니를 나자프로 보낸 것은 그곳에 권위 있는 시아파 성직자들이 활동하고 있어 호메이니의 존재감이 약해질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호메이니가 이곳에서 만든 '이슬람 정부' 이론은 추종자들부터 평범한 이란인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이란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 호메이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만이 유일한 입법자이며…… 이슬람 정부는 이슬람법에 의한 정부이다. 이슬람 정부에서 주권은 신에게 귀속되고 이슬람법은 신의 명령이다" "무슬림의 통일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제국자들이 장악한 억압 정부를 타도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정의로운 이슬람 정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슬람 정부는 한 마디로 말해 이슬람법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는 정부이다. 호메이니는 외국세력에 흔들리지 않고 이슬람 정부가 이란을 통치하려면, 이슬람법을 잘 아는 법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즉 호메이니의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이다. 현재 이란의 통치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치솟자, 왕은 이라크 정부에 압력을 가해 호메이니를 이라크에서 쫓아냈다. 호메이니는 이란과 가까운 쿠웨이트에 가려고 비자까지 발급받았지만 호메이니를 가능하면 이란에서 먼 곳으로 추방하고 싶어 한 왕의 방해로 실패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나 프랑스로의 망명은 호메이니에게 또 다른 기회였다. 검은 터번을 쓴 일흔여섯 살의 이란 성직자를 프랑스 언론을 비롯해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가 고국을 떠나 왜 이렇게 외국에서 싸우고 있는지부터 그의 사생활까지 언론과 방송을 통해 퍼져나가 호메이니는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 더불어 그는 프랑스에 있던 이란 망명 정치인과 지식인의 지지와 도움을 받아 더욱 단단한 존재가 되어 갔다.


아바단 방화사건과 검은 일요일

1978년 한 해 이란에서는 '대학살'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978년 8월 20일 아바단시의 한 극장, 아바단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극장으로 피신했다. 갑자기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탈출하려 했지만 출구는 봉쇄되어 있었다. 그날 극장으로 피신한 시위대를 비롯한 477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채 극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호메이니는 왕이 이란 국민을 태워 죽였다고 외쳤지만, 정부는 광신도에 의한 방화사건이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얼마 뒤 일어난 '검은 일요일' 사건은 더 참혹했다. 9월 6일, 라마단(금식) 행사가 끝나는 날, 이란의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었다. 1978년 9월 8일 금요일 새벽,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란 라디오에서는 긴급 명령이 울려 퍼졌다. "더 이상 거리나 모스크에 모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러나 그날 아침, 사람들은 테헤란 동부 잘레(Jaleh) 광장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에 정부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했다. 잔인하게도 출구를 봉쇄한 채 발포했다. 하루 만에 광장 안에서 2,00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란 사람들은 이 순간을 '검은 금요일'

이라 부른다. 잘레 광장은 이슬람 혁명 후 '순교자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1월 4일에도 많은 대학생이 시위를 하다 목숨을 잃었다. 무하람 달이 되자, 시위는 더 열정적으로 번져나갔다.


카르발라 사건과 이란인의 분노

무하람 달은 이슬람력 1월로 이달 1일부터 10일은 '카르발라 사건'으로 희생된 제3대 이맘 후세인을 애도한다. 카르발라 사건(680)은 제3대 이맘 후세인이 수니파 우마이야조의 왕 야지드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시아파 무슬림이 가장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는 사건이다. 시위대들은 이 사건을 끌어와 왕과 이란 정부가 현재의 현재의 야지드라고 외치며 더 열정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왕 무함마드 레자 샤는 "나는 휴양을 떠난다. 나는 몹시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이란을 떠났다. 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왕의 망명 소식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자, 이란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시아파 무슬림들이 가장 큰 종교 기념일은 '아슈라(Ashura)'라는 날(이슬람력 1월 10일)이다. 한데 이날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다. 최대 종교기념일이 슬픈 날이 된 유래는 바로 시아파의 지도자가 수니파 왕에게 살해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러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왕 야지드는 왕이 된 후, 시아파 지도자 이만 후세인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맘 후세인은 이를 거절하고 메카의 하림사원으로 피신해 넉 달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야지드의 폭정에 시달린 이라크의 쿠파 지방 주민들이 후세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후세인은 이를 차마 거절하지 못해 쿠파로 가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야지드의 군대는 이라크의 카르발라란 곳에서 이만 후세인과 호위 군대를 기다리다가 사막에서 그를 체포했다. 이후 그들은 9일 동안 물의 공급을 차단했고, 결국 10일째 날 3만여 명의 야지드 군대는 밤 예배를 마친 이맘 후세인과 호위 군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후세인은 참수형을 당했고, 잘린 머리는 야지드 왕에게 보내졌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야지드는 후세인이 다시는 "쿠란"을 낭송하지 못하게 사정없이 머리를 후려쳤다고 한다. 아슈라 날 신앙심 깊은 시아 무슬림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칼과 채찍으로 자신의 이마와 등을 때리거나 상처를 내면서 행렬을 한다. 이는 이만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겪고 재현하며 그를 애도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 당시, 호메이니가 이 사건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혁명의 불을 지른 것도, 이 사건이 이란인에게 얼마나 깊은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왕 무함마드 레자 샤가 망명한 직후인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프랑에서 이란으로 돌아왔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당당히 테헤란에 입성했다. 그는 공항 근처에 있는 '자유의 탑' 앞에서 다음과 같이 귀국 연설을 했다. "나는 우선 이번 사건에서 너무나도 희생적이었던 성직자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고통당했던 학생, 상인 그리고 무역업자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시장과 대학교, 신학교에서 피 흘리며 지지해 줬던 젊은이에게 감사드린다" 왕은 떠나고 호메이니가 이란에 돌아왔지만, 아직 혁명은 끝난 게 아니었다. 왕은 떠났지만 총리가 이끄는 정부가 남아 있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꿈꾸던 이란을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호메이니가 이란에 도착한 1979년 2월 1일부터 혁명이 완료된 2월 11일까지를 '여명의 10일'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이 시간 동안 혁명의 빛은 보일 듯 안 보일 듯 반전을 거듭했다. 호메이니는 다양한 성격의 지지자를 한데 모아 혁명지도부를 만들었다. 아직 바흐티여르 총리의 정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테헤란 거리는 조용할 틈이 없었다. 무기를 든 혁명지지 조직들이 정부의 군대와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혁명의 날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2월 11일 결국 이란 군대가 정치적인 중립을 결정했고 바흐티여르 총리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것은 호메이니의 승리, 곧 이슬람 혁명의 승리를 뜻했다. 호메이니는 혁명 승리 후 특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권력을 구축해 갔다. 그는 급기야 '이맘 호메이니'로 불리기 시작했다. 알리의 후손이 아니면서 '이맘' 호칭으로 불린다는 건, 이란 국민이 얼마나 그를 영웅으로, 구세주로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호메이니는 이란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어갔다. 나라 운영에 필요한 정당, 군대, 재판소를 만들었고, 각각 이슬람 공화당(1987년 6월 없어졌다), 이슬람 혁명 수비대, 혁명재판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든 이름에 '이슬람'과 '혁명'이 들어갔다. 호메이니는 정치에서도 서구적 체제인 민주공화국보다 이슬람 정부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서구의 간섭에 시달리고 미국의 꼭두각시로 불린 왕을 갓 쫓아낸 국민들에게 호메이니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1979년 4월 1일, 국민 97%의 찬성으로 결국 이란은 민주 공화국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나라,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이란의 공식 명칭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페르시아인 우월주의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이란인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이 높기로 유명하다. 이슬람 문명을 풍요롭게 한 이슬람 문명의 '핵심 브레인'이 페르시아인 즉 이란인이었다. 또한 자신들을 지배한 많은 왕조도 이란화됐으며,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으로 800년의 암흑기도 극복하고, 결국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어냈다. 이에 이란인은 이란 역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라비아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라비아인이 이슬람 탄생 전에는 전쟁만 하던 미개한 민족이었던 반면 자신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대제국을 경영하고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란 역사를 읽다 보면, 자칫 이란인이 아라비아 민족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더 뛰어나다고 결론 내리기보다는, 이란인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풍요로운 문명을 만들고 800년의 암흑기 세월도 꿋꿋이 버티고 부활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현재 이란

국명: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

수도: 테헤란(Tehran)

인구: 8,952만(세계 17위, 2022년)

1인당 GDP: 5,507.53달러(세계 85위, 2022년 세계은행 기준)

면적: 174.5만㎢ (한반도의 7.5배, 세계 17위)

언어: 페르시아어(공용어)

종교: 이슬람교 98%(시아파 94%, 수니파 4%), 기타 2%

민족: 페르시아인(61%), 아제르바이잔인 (16%), 쿠르드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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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학계는 이란사(史)에 다소 무심한 편이다. 그런데 이란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대 근동사, 유대사, 그리스사, 로마사, 아라비아사, 튀르키예사, 몽골사, 러시아사, 유럽사와도 만난다. 이란만큼 세계 문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례도 흔치 않다. 근래 발생한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지켜보면서 역사의 반전을 느껴 눈부시게 찬란했던 페르시아 문명의 기원지 이란사를 탐색했다. 이 글은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유흥태, 2018), "이란의 역사"(유흥태, 2023), "페르시아⁃이란의 역사"(최승아, 2023) 등을 참조했다. 다만 통설과 일치하지 않은 내용(이란고원의 고인류, 아리안 이동, 페르시아 전쟁, 사산조와 동로마 전쟁 등)은 교차 검증해 수정했다. 이외 근래 발표한 연구(2024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대 '샤니다르 Z')와 몇 편의 학술 자료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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