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Huns)은 고대 흑해 연안과 동유럽 일대에서 약 100년 동안 강력한 국가(훈 제국, 370~469)를 운영했던 유목집단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훈족의 왕 아틸라 군대를 '신의 채찍' 또는 '신의 징벌'로 부르며 공포에 떨었다. 특히 훈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선주민이었던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몰아냈고, 이는 다시 서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진시켰다. 훈 제국은 아틸라왕 치세 때 전성기를 맞았다가, 그가 죽은 뒤 빠르게 와해되었다. 결국 5세기말 무렵에 훈족은 역사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423년경 훈족의 영역)
덴마크의 저명한 진화유전학자인 코펜하겐 대학교의 에스케 빌러슬레프(Eske Willerslev, 1917~) 교수는 헝가리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지역 137개의 고대(기원전 1500~기원후 500) 인골 유전자를 분석해, 각 민족 집단 간 DNA 유사성의 편차를 확인했다. 그 결과 훈족은 흉노인과 스키타이인의 혼혈이었음이 드러났다는 연구 논문을 2018년 5월 "네이처"지(誌)에 발표했다. 이 논문대로라면 흉노의 분파 또는 후예가 이란계 스키타이인과 혼혈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쳐 수백 년 후 동유럽에 등장한 것이 훈족이라는 것이다. 한편 훈족의 선조로 추정되는 흉노인에 대한 최근의 유전자 연구(註)에 따르면 흉노 제국의 지배층은 주로 동아시아인이고 피지배층은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었는데, 그중에는 유라시아 스텝 서쪽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란계 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인도 있었다. 즉 흉노 제국은 동아시아계 흉노족이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다인종 연합체였기 때문에 혼혈과 공존의 수치에 따라 동아시아인 형질이 강한가 하면 서유라시아인 형질이 강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흉노 제국에 속했던 흉노인과 스키타이인 등의 혼혈 집단이 훈족의 조상이었다면 위 유전자 연구 결과처럼 훈족의 유전자가 흉노와 스키타이인의 혼혈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 학계의 가장 유력한 설은 중국 후한(後漢)에 의해 서흉노와 북흉노가 멸망(89년)하자, 패주한 흉노 집단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스키타이 등을 인종적, 문화적으로 흡수해 훈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얼마나 큰 집단이 파생되어 훈족을 이루게 되었는지 등은 현재까지도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흉노의 이동: 흉노의 멸망 이후 잔존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을 흡수하며 유라시아 스텝 지역을 통해 서진했다.)
(註)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 몽골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팀은 지금의 몽골과 그 주변부에서 발굴된 인골 214구에서 채취한 DNA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발굴된 DNA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정량적으로 비교해 지역과 시대별 인류집단의 이동을 추정했다. 그 결과 6600년 전부터 600년 전까지 약 6000년 동안의 몽골 지역에서 활동한 흉노와 몽골 제국을 세운 인구집단이 언제, 어떻게 형성됐는지 밝히는 데 성공했다. 연구 결과는 2020년 11월 생명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셀’(Cell)에 발표했다. 이 결과를 요약해 보면 흉노 제국은 동아시아인/시베리아인과 스키타이 및 사르마티아인,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파나시에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파지릭 문화등의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고대인의 후예로 이루어진 유목부족들이 각자 따로 존재했다. 이후 철기시대 말에 비로소 혼혈이 이루어져 유전적으로 연결고리를 갖춘 복합 유라시아인이 흉노 제국의 구성원임을 보여준다. 이후 정충원 교수는 크리스티나 워린너(Christina Warinner) 미국 하버드대 인류학과 교수(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진과 함께 2023년 5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흉노 지배층에 대한 DNA 분석 결과를 추가 발표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흉노 제국의 서쪽 변방에 있었던 무덤들에서 발굴한 흉노 지배층 유골 18구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흉노의 귀족 계급은 하층 계급보다 유전적 다양성(혼혈)이 덜 했으며, 주로 동아시아인 계통으로 확인되었다."라는 것이다.
4세기 중후반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서 홀연히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복속시킨 것이 동로마 제국에게 알려진 훈족의 첫 등장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국경 저 멀리 야만족들끼리 치고받는다는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훈족을 피해 서쪽이나 남쪽으로 도망친 동게르만계 고트족이 도나우강 국경에 나타나면서 동로마 제국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4세기 중후반만 해도 훈족이 동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4세기말부터 훈족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달마티아를 위협하며 본격적으로 동로마 제국과도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후 훈족의 군대는 아르메니아 지역을 넘어 사산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까지 쳐들어갔으나 사산 제국의 반격으로 후퇴했으며, 다른 훈족의 부대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와 시리아 지역까지 약탈하기도 했다. 다만 훈족은 동로마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게르만족이나 동로마 제국의 반역자를 상대로 로마군과 합동 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어서 마냥 적대했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그런데 408년에 그동안 동맹으로 행동해 오던 훈족의 왕 울딘이 돌변해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 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동로마는 울딘의 부하들을 매수해 훈족의 분열과 이탈을 유도해 침입을 저지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은 훈족과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매수, 외교, 용병 활용 등 간접적 수단을 통해 훈족의 위협에 대응했다.
훈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비교적 원만하던 관계는 아틸라 시대에 끝이 났다. 당시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해, 동로마 국경 바로 건너편까지 진출해 있었다. 형인 블레다와 함께 훈족을 통치했던 아틸라는 즉위 초기에는 근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으나 게르만족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자 그 기회를 활용해, 440년 말 동로마 제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 역시 침략을 막기 위해 훈족에게 시례금을 2배로 올리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였으나,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얼마 안 있어 사소한 트집을 잡아 협정을 깨버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 수복 작전을 위해 서로마 제국에 보낸 병력은 상당 부분 발칸반도 야전군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동로마군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동로마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었지만, 서로마는 부유한 아프리카 속주를 게르만계 반달족에게서 탈환할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동로마의 지원군이 철수했기에 더욱 뼈아픈 일이었다. 아틸라는 442년까지 발칸반도 북부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여럿 함락했다. 4세기말에 동로마는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에게 역사에 남을 패배를 당한 뒤에도, 요새화된 거점들은 고트족이 공성전을 할 능력이 없었기에 무사했으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군대는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훈족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조약은 사례금으로 황금 1,400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첫해 사례금 350파운드에서 3년 만에 사례금을 4배로 늘린 조건이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훈족 내분에서 패배해 동로마 제국으로 피신해 있던 훈족의 망명자들도 아틸라에게 넘겼다.
동로마 제국은 평화조약 체결 후 아틸라에게 계속 굽히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섬까지 진출해 있던 북아프리카 원정군이 복귀한 직후인 443년 훈족에 대한 사례금을 중단해 버렸다. 때마침 공동지배자였던 블레다가 갑자기 사망( 445년)하고 아틸라가 단독 통치자 자리에 오르자 훈족 내부의 정치 상황이 어수선해졌고, 이 시기에 동로마군은 반격을 준비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치세 때인 447년 동로마군과 아틸라의 훈족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아틸라는 이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트라키아와 수도 콘스탄티노폴을 제외한 발칸반도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이 시기에 동로마령 발칸반도가 입은 타격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적 발굴 사례를 보면 고트 전쟁에서 회복했던 도시가 아틸라 전쟁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동로마 제국 내에서도 상당한 번영을 누렸던 니시 지역도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궁지에 몰린 동로마 황제는 이전까지 지급을 거부한 사례금을 포함해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한편으로 동로마 제국은 449년에 훈족의 사절단에 포함된 아틸라의 최측근 에디카(아틸라의 경호 대장)를 매수해 아틸라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매수당한 에디카가 곧바로 일러바치면서 계획이 들통났다. 아틸라는 영악하게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암살자들에게 주려고 보낸 황금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내며,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째서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라며 한껏 조롱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최대한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 제국으로 돌렸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게도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서로마를 침공하려고 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나아우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보낸 청혼을 이유로 지참금을 챙기고, 또한 훈족의 게르만족에 대한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게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복속된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힘에 의해 굴복하고 있을 뿐이지, 이들이 훈족에게 동화되거나 조직에 통제된 것은 아니었다. 즉 훈족과 게르만족들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로 불안한 공존을 하는 상태였다. 도나우강 유역의 당시 무덤을 발굴해 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무덤에서 대량의 값진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약탈해 온 황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불균등하게나마 게르만족에게 재분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틸라는 몇 년 동안 동로마의 발칸반도를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하기도 마땅찮았고, 궁지에 몰린 동로마군이 사생결단으로 나올 시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가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제1차: 440~442, 제2차: 447년)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 주력군은 언제나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아틸라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451년에 아틸라의 훈족과 지배를 받는 게르만족(동고트 등)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공했으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군과 서고트족,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알란족(이란계 유목민) 등 서로마-게르만족 연합군에게 카탈라우눔 전투(註)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지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452년에 아틸라는 피해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고, 곧바로 군세를 모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해 아퀼레이아, 파도바, 베로나, 파비아, 밀라노 등 이탈리아 북부를 마음껏 유린했다. 그러나 보급난과 전염병이 훈족 군대를 덮쳤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아틸라는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했다. 이듬해인 453년,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 첫날밤에 갑작스럽게 의문사했는데, 사망 원인으로 암살, 복상사, 과음 등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 군대와 서로마 연합군의 이동 경로)
(註) 451년 6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게르만족(동고트 등) 군대와 서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서로마-게르만족(서고트 등)-알란족(이란계)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때까지 무적으로 알려진 훈족이 최초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인 동시에 서로마 군이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프랑스 샬롱(Chalons)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샬롱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투 막바지에 아틸라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여차하면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을 품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까지 몰렸다고 한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퇴각에 성공한 아틸라는 군대를 재정비해, 이듬해(452년), 서로마 제국 본토를 침입해 북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비록 두 번의 서로마 원정에서 실패했다곤 해도, 아틸라는 뛰어난 장악력과 지휘력, 카리스마,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불안한 구조의 유목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세 아들인 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타 게르만계 게피드족이 훈족에게 반기를 들자 엘라크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네다오강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게피드족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면서 훈족의 게르만족 지배는 무너져가게 되었다. 훈족 지배하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한 정도에 따라 독자세력화에 걸린 시간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게피드족은 훈족 통치하에서도 나름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헝가리 지역의 상황은 훈족 잔당과 독립과 독립하지 못한 게르만족이 서로 투쟁을 벌이는 등 난세 그 자체였다. 아틸라의 살아남은 두 아들 뎅기지크와 에르나크도 한동안 일정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떨어져 나간 게르만족과 치고받고 싸웠지만, 패권을 잡은 게르만계 동고트족에게 참패한 끝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도망쳤다. 이들은 훈족이 전성기에 동로마 제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역권 등을 요구했으나 동로마 제국은 이를 거부했다. 뎅기지크는 469년, 동로마군과 충돌한 끝에 패해 목숨을 잃었고, 에르나크는 도나우 강변에 정착해 동로마 제국의 배려로 동로마령 도브루자에서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흔적이다. 이후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일절 기록이 없다. 한때 동, 서로마인을 비롯한 고대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의 대제국은 이렇게 허무한 종말을 맞았다.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족은 소멸했지만, 복속된 유목 민족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당시 서방으로 파견된 동로마군의 일원으로서 명장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6세기 이후 훈족은 역사에서 완전히 발자취를 감추어, 이후 민족 정체성이 어느 시점에서 소멸했고, 누구에게 동화되었으며, 어떤 민족과 혈연관계를 가졌는지 등은 불분명하다. 다만 훈족이라는 이름 자체는 고대 유럽 세계에 워낙 큰 충격을 준 덕에 후대 기록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데, 예컨대 822년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 부족 중 하나로 언급된다. 후대에 등장하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훈(Huns)'이라는 용어는 실제 훈족과 연결고리가 있는지, 혹은 유럽인의 입장에서 단순히 동쪽에 있는 야만인을 가리켜 쓴 명칭인지 알기 어렵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훈족의 쇠퇴 이후 파생되었다고 추정되는 반유목민 불가르족의 한 갈래였던 우티구르족이 동로마 제국령에 이주했다. 그 불가리아족을 혈연적으로 남아있는 훈족의 후예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도 불가리아족이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특히 문화적, 언어적 관련성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 또 헝가리의 주류 민족이며, 우랄어족에 속하는 마자르족 역시 '훈족의 후예'라는 이미지로 유명하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헝가리와 훈족 사이의 연관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훈족의 주요 거점이 오늘날의 헝가리 판노니아 일대였으며, 이에 현재 헝가리에서는 역사적 정통성 강조를 위해 마자르족과 훈족의 연관성을 일종의 국가 상징으로 삼는다.
과거 유럽 학자들은 훈족을 유럽(백인)계라고 주장했다가 모순이 드러나자 튀르크계로 설정했는데, 이 또한 논거가 부족했다. 현재는 세계 각국의 연구팀들이 고대 훈족에 대한 유전자 분석 등으로 훈족의 정체성을 밝혀내고 있다. 유전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훈족은 흉노가 서진하면서 스키타이 등과 같은 이란계 유목민을 흡수해 훈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훈족의 수장(아틸라 등) 및 지배층은 흉노 시대와 2~3백 년의 격차가 있었음에도 몽골계 형질이 많이 남아 있는 흉노의 후예라고 본다. 아직까지도 일부 유럽 학자들이 주장하는 훈족이 튀르크계라는 가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례로 반박된다. 첫째, 튀르크계와 몽골계는 장례 방법이 완연히 다르다. 흉노와 같은 몽골계는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한 뒤 입관해 땅에 매장하는데 반해 돌궐 등 튀르크계는 화장한다. 그래서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훈족의 무덤들이 많이 발굴되는데 일괄적으로 무덤 속에서 인골들도 발견된다. 아틸라의 장례식에도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아틸라가 몽골계임을 반증한다. 둘째, 아틸라 장례식에 대한 기록을 보면 훈족의 전사들이 얼굴에 상처를 내고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기록(註)이 있는데, 이것은 흉노족의 장례 풍습과 똑같다. 즉 흉노족은 장례 식 때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에 피를 흘리는 '이면유혈(犁面流血)' 풍습과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서 묻는 '전발(剪髮)' 풍습이 있었다(흉노 시대 중국 문헌에 기록된 내용이며, 몽골 노인 울라의 흉노 지배층 무덤에서도 다수의 잘린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셋째, 아틸라와 훈족을 직접 목격한 동시대의 기록에서도 훈족이 몽골계 외모임을 보여준다. 즉 449년에 사절단으로 아틸라를 직접 만난 동로마의 외교관 피리스쿠스는 그의 저서 "비잔틴사"에서 "아틸라의 용모는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지만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 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6세기 고트족 출신의 역사가 요르다네스도 그의 저서 "게티카"에서 "아틸라는 단단한 체격에 넓은 코와 작고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라며 몽골계 외모로 묘사했다. 이처럼 훈족이 유럽에 등장한 초창기부터 수세기 이내에 편찬된 유럽의 역사학자들의 사료에 나타나는 훈족의 모습은 튀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임을 드러내 보인다. 다만 최근 훈족의 유전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몽골계 흉노족이 서진하면서 스키타이 등을 인종적, 문화적으로 흡수해 훈족이 되었고, 혼혈과 공존의 수치에 따라 동아시아인 형질이 강한가 하면 서유라시아인 형질이 강한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훈족의 원류는 몽골계 흉노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틸라 초상화: 단단한 체격에 넓은 코와 작고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는 동시대 기록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다. 이 초상화는 근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 아틸라가 등장하는 동시대 또는 후대의 초상화, 그림, 동전에 새겨진 모습 등은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註) 아틸라의 장례식은 들판 한가운데에 비단으로 쳐놓은 대형 천막에서 거행되었다. 기수들이 죽은 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천막 주변에서 말을 달리는 의식을 치렀고, 사람들은 아틸라의 정복 전쟁과 그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위대한 왕의 죽음을 눈물이 아닌 전사의 피로써 기리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털을 잘랐다. 아틸라의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안치하고 은으로 만든 두 번째 관에 넣은 후 다시 황금으로 만든 세 번째 관에 넣어 매장했다. 관 속에는 망자의 신분에 걸맞은 보석과 말갖춤(마구) 등 값비싼 보물들이 부장 되었다. 아틸라의 황금 관은 헝가리 평원의 티서강(Tisza) 물을 막아 물줄기를 돌리고 강바닥을 깊이 판 후 매장하고 막은 강물을 터 강물에 덮이도록 했다. 그리고 아틸라가 묻힌 곳을 비밀로 하기 위해 관을 매장한 이들도 모두 죽여, 강물에 덮인 아틸라의 묘는 영원한 베일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 이에 아틸라의 묘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칭기즈 칸의 묘와 함께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가장 발굴하고 싶어 하는 무덤이 되었다.
훈족이 헝가리(Hungary)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즉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실에서 마자르족과 훈족의 뿌리가 같다고 역사서에 서술했으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훈제국이 붕괴되면서 떨어져 나간 후손인 우티구르족(Utigurs) 일부가 마자르족에 흡수되었고, 헝가리 정복 당시 마자르족 중 일부는 이미 훈족계통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에도 헝가리에서는 '아틸라'(Atilla)라는 인명이 흔할 정도로 헝가리인들의 훈족 계승의식은 확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