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인은 준가르 분지, 신장 북서부, 알타이 산지, 몽골 초원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한 유목민이다. 비슷한 시기 시대별로 정령(丁零=흉노시대), 고차(高車=유연시대), 철륵(鐵勒=돌궐시대)으로 불리던 북아시아계 유목민과는 다른 민족이다. 그런데 돌궐 제국이 수립될 때 철륵인이 가장 중요한 피지배민족이 되면서 결국 철륵인도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크계가 되었다. 돌궐인에 이어 국가를 세운 위구르인, 키르기스인(현재 키르기스스탄 주민)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돌궐 제국 이후 등장한 다양한 튀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은 하나의 조상 집단에서 기원한 단일 민족, 단일 언어 집단이 아니었다. 오늘날 튀르크계 민족에 대한 DNA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부계 혈통 측면에서 매우 이질적인 집단이며, 단일 조상 집단에서 기원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는 튀르크 세계의 확대가 혈연적 인구 이동이 아니라 다양한 비투르크계 언어 사용 집단의 튀르크화(튀르크어 사용)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돌궐 제국의 지배층과 핵심 구성원이었던 돌궐인은 스스로를 튀르크(Türk, 突厥)라고 칭했다. 초기에 열두 씨족으로 구성되었던 돌궐인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철륵 유목민을 튀르크(돌궐)로 부르지 않았다. 돌궐인이 8세기 중반에 몽골의 오르혼강 유역에 세운 튀르크 비문은 철륵을 튀르크가 아닌 오구즈 또는 개별 부족으로 지칭하며 속민으로 묘사했다. 또한 8세기 중반 돌궐 제국을 무너뜨린 철륵계 유목민 위구르인도 그들이 세운 왕실 비문에서 스스로를 돌궐로 칭하지 않았다. 위구르 비문은 돌궐을 자신들의 주적으로 묘사했다. 중국의 고대 문헌 또한 철륵을 돌궐로 지칭하지 않았다. 즉 "구당서(舊唐書)"는 "돌궐이 강성한 이래로 철륵의 여러 부락은 흩어져 백성들이 점차 줄어들고 쇠약해졌다"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튀르크인(돌궐인)의 정체성은 8세기 중반 돌궐 제국의 붕괴 이후 몽골 초원에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돌궐 제국은 552년 아시나 씨족(註)의 수장이었던 부민(土門, 재위: 552~553)이 건국했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5세기 초 현재 중국 신장 투르판(新疆 吐鲁番) 지역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민의 선조들은 500호로 구성된 무리와 함께 알타이산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흉노 제국 이후 몽골 초원의 지배자였던 유연(柔然, 선비족)에 복속되어 야금(冶金)에 종사했다. 점차 세력을 키운 돌궐은 552년 유연을 멸망시켰고, 부민은 일릭 카간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역사상 최초의 튀르크계 유목 제국이 등장했는데, 곧이어 부민이 사망함으로써 그의 제국은 초원의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분배되었다. 제국의 서쪽은 부민과 함께 정복 전쟁에 참여했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 재위: 552~576)가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의 수도 외튀켄(於都斤)이 위치한 동부 지역은 부민의 아들 콜로(科羅)가 승계했다가, 그의 요절로 콜로의 아우 무한(木汗, 재위: 553∼572)이 새로운 카간(王)이 되었다. 한편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葉護, 제2 왕)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下位) 개념을 분명히 했다.
(돌궐 제1제국의 전성기 영역)
(註) 최근 2023년에 중국 유전학자들은 돌궐 제국 3대 카간 무한의 딸로 선비족 나라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 재위: 560~578)의 아내가 된 아사나(阿史那) 황후의 게놈을 분석해 논문을 발표했다("아사나 황후의 고대 게놈은 돌궐 제국의 동북아시아 기원을 밝혀준다"). 논문에 따르면. 아사나 황후의 게놈은 고대 동북아시아인 유전자가 97.7%였으며 서유라시아인 유전자 비율은 2.3%에 불과했다. 또한 아시나 씨족은 퉁구스계와 몽골계 언어를 사용한 유목 민족(유연, 선비, 거란, 말갈)과 유전적 유사성을 공유했다. 이러한 게놈 분석 결과는 돌궐인의 '서유라시아인 기원 가설'과 '다원적 기원 가설'을 부정하고 '동아시아인 기원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논문의 저자들은 밝힌다. 그러나 이 논문이 아시나 씨족이 인도유럽인 집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거나, 일부 인도유럽인(아파나시에보 문화인, 스키타이인 등)과 동아시아인의 혼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돌궐 제국이 성립된 6세기 중반의 아시나 씨족은 거의 동아시아인에 속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돌궐 제국 무한 카간의 외모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얼굴이 붉고 눈이 유리 같았으며 비단으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표범의 형상을 한 거구의 사나이"). 비슷한 사례로 중국 사서나 초상화에 선비족인 북주 무제의 외모를 굵은 수염, 큰 눈, 높은 코 등의 이국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 표현했는데, 2024년 4월 게놈으로 복원한 무제의 외모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다.
(1996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선비족의 나라인 북주 황제 무제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나온 유골과 DNA를 바탕으로 무제의 외모를 복원했다. 왼쪽이 무제의 복원 외모이고 오른쪽이 당나라 때 그려진 초상화이다.)
572년까지 계속된 무한 카간의 집권기에 돌궐 제국은 번영을 누려, 영토가 동서로 더욱 확장되었다. 557년 무한 카간은 중국의 북제(北齊, 550∼577)에 속해 있으면서 바이칼호 북쪽의 위협 세력으로 잔존하던 유연(柔然)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인접 국가를 병합했다. 나아가 동쪽의 거란과 북쪽의 키르기스를 돌궐에 복속시켰다. 무한 카간은 그의 딸 아사나 공주를 북주의 무제에게 시집보내 선린 관계를 맺었다. 이 무렵 돌궐 제국의 판도는 동서로 요동에서 아무다리야강, 남북으로 내몽골 사막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돌궐 제국 건국 때부터 시작된 중국과 돌궐의 관계는 4대 타스파르 카간(무한 카간의 동생, 재위: 572~581)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때 중국은 북위(北魏)가 동서로 분열되어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돌궐의 남진에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북중국에 건국되었던 북제(北齊)와 서위(西魏)를 이은 북주(北周, 557∼581)는 돌궐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돌궐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고자 했다. 타스파르 카간은 양국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 두 쪽 모두에게서 비단을 받아냈고, 북주로부터는 공주를 아내로 얻었다. 사료를 종합해 보면, 초창기 돌궐 제국은 광범한 영토에 10만 명의 정예 부대를 두어 중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우위를 지켜 나갔다. 이에 중국에 대한 돌궐의 태도는 전쟁과 화친이라는 카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양면 정책으로 잇속을 챙겼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이스테미 야브구의 정복 사업으로 영토가 얄타이 산맥 서쪽, 이시크호와 톈산산맥(天山山脈)에 이르렀다. 이로써 당시의 세계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정치, 경제적 관계를 수립했다. 이 시기에 토하리스탄(현재 북부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그리스인들이 박트리아라고 불렀다)에 거점을 둔 헤프탈이 실크 로드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해, 이스테미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아누쉬르반 아딜과 왕실 혼인을 통해 우호 협정을 맺었다. 결국 돌궐과 사산조의 공격으로 헤프탈은 멸망하고(563년), 그 영토는 아무다리야강을 경계로 양국에 분할되었다. 이에 돌궐은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일부, 서투르키스탄 남부, 카슈가르, 호탄 등 실크 로드의 요충지를 편입해 유라시아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산조의 아누쉬르반이 동서 교역의 요충지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점령 야욕을 보였다. 사산조는 우선 중앙아시아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를 지나 지중해와 비잔틴으로 공급되는 비단의 통과를 차단했다. 이 조치는 돌궐을 대신해 동서 비단 무역에 종사하던 소그드 상인들을 파산시키고, 중개 무역의 수익과 통과세에 의존하던 서돌궐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스테미는 즉시 사절단을 파견해 사산조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누쉬르반은 오히려 돌궐 사신을 살해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스테미는 비잔틴과의 협상을 모색하며, 567년 말 소그드 상인 마니아크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이것은 역사상 중앙아시아에서 비잔틴, 즉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된 최초의 공식 사절단이었다. 당시 비잔틴으로서도 사산조를 통한 간접 교역의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아라비아 남부의 힘야리국과 접촉 중이었기 때문에, 돌궐 사절단의 직접 교역 제안을 적극 수용했다. 이에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569년 8월경, 돌궐과의 협정 체결을 위해 사절단을 톈산산맥 기슭의 백산(白山)에 있는 이스테미에게 파견했다. 돌궐과 비잔틴 사이에 무역 협정이 체결되고, 사산조의 고립이 초래되었다. 이 결과 571년부터 19년간이나 계속된 사산조와 비잔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돌궐은 더욱 세력을 확장해 카프카스 북부의 쿠반강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에 진입했다. 그러나 사산조에 대한 돌궐과 비잔틴의 공동 군사 행동은 588년까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576년에 비잔틴 사신인 발렌티노스를 아랄해 평원에서 영접한 돌궐 왕자 사드(Shad)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돌궐 왕자가 발렌티노스에게, 돌궐과 원한 깊은 적대 관계에 있는 아바르족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준 비잔틴의 처사를 크게 비난한 대목이다. 또한 돌궐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지나 킵차크 남부의 사바르족과 관계 수립을 모색했을 때, 돌궐과 사바르의 연대를 방해하기 위해 비잔틴이 사바르를 공략해 버린 일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돌궐과 동맹을 맺은 비잔틴은 강력한 세력을 우방으로 두고, 또 하나의 강국 사산조 페르시아와 19년(571∼590)에 걸친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돌궐은 서부를 통치한 이스테미의 훌륭한 지도력으로 국력을 키워 나갔다. 이스테미는 비록 제2인자 위치인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가 사망하는 576년경까지 돌궐 제국의 카간과 정치적 충돌을 빚었던 흔적은 없다. 야브구의 제위는 그의 아들 타르두(Tardu, 達頭)가 승계했다. 한편 돌궐 제국의 건국자들에 대한 치적과 당시 국제 사회에서 돌궐의 위치가 오르혼 비문(註)에 잘 나타나 있다. 최근 2022년에, 새로운 돌궐 비문(註)이 발견되어 돌궐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註) 몽골북부 오르혼강(Orkon) 주변에서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비문 내용은 돌궐 제국을 수립한 선조들과 돌궐 제2제국 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며 돌궐 제국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유목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인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해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으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되어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다. 이로써 종래까지 중국 사료에 의존해서 중화중심으로 접근되던 중앙아시아 및 동아시아 유목민의 연구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비석의 발견으로 북방 스텝 민족들도 문헌의 기록을 소유해, 그동안 문화의 근거지로 인정받아 온 정착(농경)민에 못지않은 정치, 경제, 사회적 전통을 가졌으며, 유목 문화도 정착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광범위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세 비문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퀼 테긴 비문 : 형 빌게 카간을 도와 돌궐 제2제국의 수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동생 퀼 테긴을 기리고, 돌궐 제국 건국자인 선조들의 업적과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732년경 빌게 카간에 의해 세워졌으며 높이 3.75m, 너비 122~132㎝ 크기의 4면체 비문인데, 동남북면은 돌궐어로 서쪽면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돌굴 제국 건국자 부민과 이스테미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사절에 대한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 있는 자들을 무릎 꿇게 했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興安嶺山脈)까지 서쪽으로는 테미르 카프그(鐵門, 발흐와 사마르칸트에 있는 산악 통로)까지 (부족민을) 자리 잡게 했다. 두 (경계) 사이에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튀르크인들을 수습해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했다. 정녕 용감했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했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렸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나중에 그들은 그렇게 승하했다고 한다." "그들의 장례식에 문상객(으로) 동쪽의 해 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bukli<bok(ko)li, ma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 중국, 티베트, 아바르, 비잔틴, 크르그즈, 위치 쿠르칸, 오투즈 타타르, 거란, 타타브 이만큼의 백성이 울었다고 한다. 애도했다고 한다."
이 비문의 ‘뷔클리’는 ‘맥족 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돌궐제국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서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2. 빌게 카간 비문 : 빌게 카간이 734년 사망한 후, 735년 그의 아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빌게 카간이 백성들에게 훈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빌게 카간 이후 사건들이 후일 첨가되기도 했다. 구조나 형식은 퀼테긴과 유사하고 서면은 역시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3. 톤유쿡 비문 : 노령기에 접어든 재상 톤유쿡이 720년 직접 건립했으며 3대 카간에 걸쳐 행정 수반과 군사령관을 역임한 원로로서 재임 중 업적을 적고 있다.
(註) 2022년 카자흐스탄 국제튀르크아카데미와 몽골 고고학연구소의 공동 조사팀이 돌궐 제2제국의 초대 카간인 쿠틀룩/일테리슈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문을 새로 발견했다. 이는 오르혼 비문보다 수십 년 앞서 세워진 비문으로 열두 줄은 돌궐 문자로, 여섯 줄은 소그드 문자로 쓰였다. 돌궐 문자로 쓰인 구절 중 "쿠틀룩 카간 튀르크 … 신의 아들 …"이라는 구절이 해독되었는데, 이는 '튀르크'라는 집단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예라고 한다.
무한 카간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타스파르 카간(他鉢可汗, 재위: 572~581)은 북중국의 패자 북제(北齊, 550~577)와 북주(北周557~581)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타스파르 카간은 양국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서 두 쪽 모두에게 비단을 얻어냈고, 북주로부터는 공주를 아내로 얻었다. 타스파르 카간 사망 이후, 돌궐제국은 아시나 왕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서돌궐의 타루두(達頭, 575∼603)는 594년 동돌궐의 투란 카간(雍虞閭, 재위 588~599)을 제압해 복속시켰으며, 599년 투란 카간이 사망하자 동돌궐의 카간 자리에도 올랐다. 그러나 타르두는 603년에 발생한 철륵 유목민의 반란으로 몰락했다. 서돌궐은 타르두의 손자 야브구(葉護, 재위 618~630)의 치세에 세력을 회복했다. 야브구는 토하리스탄 지역을 합병하고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서돌궐은 캅카스 지방의 테르벤드와 트빌리시를 공격해서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와 치른 전쟁(628년)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야브가가 삼촌에 의해 살해(630년)된 뒤로는 서돌궐에 통솔력 있는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다. 결국 서돌궐은 돌육(咄陸)과 노실필(弩失畢)이라는 두 개의 부족 연맹으로 분열되었다. 서돌궐의 왕족과 부족들은 계속해 싸움을 벌였는데, 마지막 카간이 당나라 군대에 패하고(659년) 사로잡히면서 당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699년 돌육 부족 연맹의 튀르게슈(突騎施) 부의 수령 위츠 엘릭은 당나라가 임명한 꼭두각시 카간을 축출하고 튀르게슈 카간국이라고 알려진 서돌궐의 계승국가를 수립했다. 위츠 엘릭은 옛 야브구 수도 수야브를 자신의 도읍지로 삼았다. 그곳은 오늘날의 비슈케크 근처이다. 튀르게슈 카간국은 위츠 엘릭의 후계자 사칼이 돌궐 제2제국의 카간에게 패하고(711년) 살해되면서 일시적으로 붕괴되었으나, 719년 수야브를 탈환한 술루(蘇綠, 사망 738)에 의해 재건되었다. 술루는 당시 당나라 지배하의 타림 분지와 투르판 투르판 지역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공격했고, 트란스옥시아나 정복을 시도하던 우마이야 칼리프국(661~750)의 아라비아 군대와도 충돌했다. 튀르게슈 카간국은 738년에 술루가 경쟁자에게 살해당하면서 멸망했다.
(동, 서로 분열된 돌궐)
시비 카간(始畢可汗, 재위: 608-619)과 일릭 카간(頡利可汗, 재위: 620~630)의 치세에 다시 강성해진 동돌궐은 중국을 약탈하고 공물을 받아냈다. 그러나 서돌궐과 마찬가지로 동돌궐도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에 630년에 정복되었다. 아시나 왕족 사이에 벌어진 내분, 몇 년간 이어진 폭설과 서리(Dzud, 조드현상)로 인한 기근, 철륵 부족들의 봉기로 동돌궐의 힘이 쇠퇴해지자 당 태종(재위: 626~649)은 동돌궐을 공격해 일릭 카간을 사로잡았다(630년). 그 뒤 동돌궐은 멸망했고, 일부 돌궐 유목민은 중국 북부 변경으로 이주했다. 약 50년 후 아시나 일가의 일테리슈 카간(재위: 682~691)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몽골 초원에 돌궐 부흥 국가를 세웠다. 학계에서는 이 국가를 돌궐 제2제국이라고 부른다. 691년 일테리슈에 이어 카간 자리에 오른 카파간 카간(재위: 691~716)은 돌궐 제2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카파간 카간은 철륵, 키르기스, 타타르를 다시 복속시키고 당나라에 공세를 펼쳤다. 서쪽으로는 서돌궐의 잔존 세력과 튀르게슈 카간국까지 제압했다. 그러나 카파간 카간은 716년 철륵의 발야고 부를 상대로 펼친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발야고의 잔당에게 살해되었다. 카파간 카간의 사망 이후 일테리슈 카간의 아들 빌게 카간(黙棘連, 재위: 717~734)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의 동생 퀼 테킨과 함께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빌게 카간의 통치기에 돌궐 군대는 서로는 사마르칸트 인근의 테미르 카프그 지역까지 동으로는 중국 산동 인근 지역까지 원정을 펼쳤다. 몽골 중부 오르혼강 유역의 튀르크 비문들은 이들 빌케 카간과 퀼 테긴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빌케 카간이 734년에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이 연이어 카간의 제위를 계승했으나 이 시기의 돌궐 내부 상황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744년 돌궐 2제국에 복속해있었던 위구르, 바스밀, 카를룩 등 세 부족 연합의 반란과 당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 외튀켄이 함락당하면서 돌궐 제2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몽골 초원에서 돌궐인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튀르크 명칭
'튀르크(Türk)'라는 집단 명칭은 6세기 중반에 돌궐제국의 등장과 함께 동서양에 알려졌다. 그런데 돌궐 제국을 세운 돌궐인들은 자신들 말고는 내륙아시아의 다른 튀르크어 사용 유목민을 튀르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편 중국 문헌에서는 Türk를 돌궐(突厥)로 음차했는데 이 말의 현대 중국어 발음은 '튀줴(Tüjue)'이다. 돌궐에 이어 몽골 초원을 자배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또한 자신들을 튀르크인으로 여기거나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 문헌에서도 철륵, 위구르, 키르기스를 튀르크(돌궐)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이들 모두를 튀르크계로 분류하고 있다. 애당초 튀르크라는 명칭은 특정 튀르크인 집단만을 지칭하는 고유 명칭이었다. 그 결과 8세기 중반 돌궐 제2제국의 붕괴 이후, 튀르크라는 집단명은 몽골 초원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 집단 명칭은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조와 같은 서돌궐의 직계 후예만이 자칭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은 돌궐 제국이 사라진 이후 튀르크라는 명칭을 비 튀르크어 사용 집단을 비롯한 내륙아시아 유목민의 통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몽골 제국과 몽골 이후 시대에 트란스옥시아나와 이란 지역에서는 튀르크라는 용어가 페르시아어를 뜻하는 '타지크(Tajik)'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주목할 점은 이 시기 튀르크인의 범주에 몽골인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칸국과 티무르 제국에서는 튀르크인과 타지크인은 페르시아 문구로 유목민과 정주민 전체를 지칭했는데, 몽골인이 가장 대표적인 튀르크 민족으로 여겨졌다. 이들 국가에서 편찬된 몽골 제국의 칭기즈 왕가와 방계인 티무르(티무르는 칭기즈 칸 작은 증조부의 8대손, 아버지가 몽골군 장수) 왕가 계보에서도 가장 중요한 몽골인을 튀르크인으로 묘사했다. 또한 몽골 제국 때 튀르크 집단이 참여했고 유라시아 초원 일대의 몽골계 유목민이 언어적으로 튀르크화되었음을 근거로 몽골 제국을 튀르크계 제국의 범주로 분류하기도 하나, 이는 튀르크계에 대한 지나친 확장 해석으로 보인다. 반면 튀르크라는 명칭은 몽골 제국과 이후 시대에 킵차크 초원이나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고유 집단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돌궐의 직계 후예가 아니었던 킵차크인이나 주치 울루스의 후예였던 카자흐인, 크림 타타르인 등은 자신들을 튀르크로 부르지 않았다. 또한 시베리아의 투바인이나 사하인(야쿠트인, 동아시아계 외모)은 이 명칭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들 모두를 튀르크계라고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튀르크라는 명칭에 대해 지나친 확장 해석과 모호성으로 인해 관련 학계나 국가 간에 여전히 논쟁(註) 중이다.
(註) 오늘날 튀르키예와 몽골은 흉노를 서로 자신들의 선조라고 다투고 있다. 즉 튀르키예의 국사 교과서는 흉노를 그들의 조상이라 하고, 그 후예가 유럽에 진출한 것이 훈제국이라 한다. 몽골 교과서는 흉노제국을 세운 흉노인들이 유럽에서 아틸라의 훈제국을 세워 드네프르강에서 다뉴브강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흉노의 구성원에 원시 돌궐인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래 분석된 흉노인의 DNA는 지배층 절대다수가 동아시아인(몽골계)이다. 또한 피지배층도 다수가 동아시아인(몽골계)이고 원시 돌궐인을 비롯한 스키타이인, 토하라인(註), 인도유럽인 등이 혼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튀르키예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흉노로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튀르키예가 돌궐 제국의 수립 연도인 552년을 제1건국의 해로 정한 것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흉노의 후예는 오늘날의 몽골국이 타당하다고 본다.
(註) 2021년 학술지 "네이처"지(誌)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토하라인은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산맥, 몽골 중부 및 서부에 걸쳐 분포한 인도유럽계 목축 집단인 아파나시에보 문화의 구성원 일부가 남하해 신장 지역의 준가리아 및 타림 분지까지 이르러 원래 거주하고 있던 고대 북유라시아계 선주민을 흡수한 혼혈인이 유력하다고 한다. 아파나시에보 문화인은 준가리아 및 텐산산맥 인접 지대 등 신장 북서부에 거주하던 선주민을 먼저 동화시켰지만 타림 분지의 주민은 지리적 장벽으로 인해 약 1천 년이나 지나서야 완전히 동화시켰다. 신장 지역 선주민과 조우하기 전의 원시 토하라인은 예니세이어족 계통 민족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토하라어에는 예니세이어의 음운론적 요소가 대거 나타나고 있다.
※ 이 글은 "투르크사"(이주엽, 2025년), "돌궐 유목제국사"(정재훈, 2016년) 등을 참조했다. 다만 민족명, 지명은 '표준국어대사전' 또는 '우리말샘'에 등재된 표기(튀르크, 키르키스, 타지크, 킵차크, 사마르칸트)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