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1162~1227)은 본처 호엘룬과 사이에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라는 아들 4형제와 딸 5 자매를 두었다. 친형제로는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이 있다. 칭기즈 칸과 형제의 직계후손을 '황금씨족'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정주 문화권에서는 왕조뿐만 아니라 일반 집안에서도 맏이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현재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반면 몽골과 같은 유목 문화권에서는 애초부터 그러한 의식이 희박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척박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능력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집단화되었을 때 안정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를 뽑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만장일치 집단의사결정체인 쿠릴타이라는 관행이었다. 유목민 사회에서는 가계를 막내에게 물려주는 전통, 즉 말자상속(末子相續)이 있었는데, 이는 막내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남아 가문을 번창시키라는 뜻과 어린 막내를 마지막까지 보살피려는 부모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잦은 이동을 해야 하는 유목민 특성상 가계는 단출했고 가계를 물려준다고 해도 일부 가축과 집안의 화로(골롬타)를 물려주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화로의 불씨는 가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겼다. 이 불씨가 꺼지면 가문이 쇠퇴한다고 생각하고, 화로를 게르(이동식 천막집) 중앙에 놓아둔 뒤 여타의 물건들은 이 화로를 기준으로 배치했다. 막내는 화로를 물려받아 가문을 지켜 나가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후처까지 떠맡는 경우도 있었다. 정주 사회에서는 과부가 되더라도 외부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법률, 치안, 주민 등이 있지만 이동하는 유목민은 소수 집단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초원 특성상 여자는 홀로 남겨지면 살아나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가 죽으면 수혼(嫂婚)에 따라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
즉 숙부의 부인이 되어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인 동시에 숙모가 되지만, 후처들은 간혹 아들이 맡아야 하는 특이한 관습이 생겼다. 다만 유목 문화권 외에는 의붓어머니를 자신의 처로 삼는 일은 드물고, 정주 문화권 관점에서 보면 용납되기 어려운 관습이었다. 그러나 친족 외에는 혈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몽골 유목민들은 이를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몽골 유목민의 상속자 선정의 전통과 관습의 측면에서 보면 칭기즈 칸이 죽은 뒤 네 아들 가운데 후계자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아들은 막내 툴루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칭기즈 칸은 군사 원정 중에 툴루이를 항상 데리고 다닐 정도로 막내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심지어 툴루이의 탁월한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해 동지라는 뜻인 '나카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툴루이를 보르지긴 씨족의 가문을 이어갈 적임자로 생각하고 몽골족의 근거지인 오논강과 케룰렌강 그리고 툴강 유역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칭기즈 칸은 가산의 상속과 제국을 다스릴 후계자를 선정하는 일은 별개 사안으로 여겼다.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당시 시대 상황에 맞는 인물에게 제국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셋째 오고타이였다. 칭기즈 칸이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네 아들에 대한 나름대로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주치는 ‘메르키트 콤플렉스’라는 끊임없는 핏줄 시비와 동생 차가타이와 심한 반목으로 후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이후 주치는 핏줄 시비와 형제 반목에 환멸을 느껴 호라즘 정벌 이후에는 칭기즈 칸이 불러도 가지 않고, 자신의 영지인 킵차크 초원 지대에 은둔해 있다가 칭기즈 칸 보다 몇 개월 먼저 죽었다. 칭기즈 칸은 둘째 아들 차가타이도 대권을 장악해 나갈 인물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즉 장남 주치와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고,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데다 성격도 고리타분해 주변 신망을 얻기 어려운 점이 있어 후계 구도에서 제외했다. 그에게는 몽골의 법률 관리 일을 맡겼다. 본인도 주치와 반목 등으로 제위에 오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만만한 셋째 오고타이를 적극 추천하기에 이른다. 가계의 상속자인 막내 툴루이는 정복을 꿈꾸는 대담하고 훌륭한 장수였으나 약점이 있었는데, 다소 잔인한 데다(전쟁 포로를 가장 많이 죽였다), 과음(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건강이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이에 비해 셋째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과 같은 천재성이나 권력에 대한 열정은 부족하나, 네 명 아들 중에는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의지력이 부족하고 게으른 편이라 칭기즈 칸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으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어 대권을 잡을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이 이룩한 대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힘보다는 지혜가 필요하고 엄격한 처벌보다는 관용과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을 지닌 관리자가 다음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바른 수순이라 생각했다. 이런 면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오고타이였다. 맏형 주치의 대권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둘째 차가다이는 자신이 대권을 노릴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능력 있고 야심 많은 막내 툴루이에게 대권이 넘어갈 경우 자신의 입지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툴루이의 후계 지명까지 견제했다. 이렇듯 칭기즈 칸의 고뇌에 찬 선택에다 네 형제간의 미묘한 관계가 어우러져 오고타이가 후계자에 지명되는 결과가 탄생한 것이다. 칭기즈 칸의 삼 형제도 뜻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몽골비사"는 칭기즈 칸이 호라즘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후처 이수이의 권고에 따라 가족 쿠릴타이에서 후계자를 오고타이로 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註) 1227년 8월 서하 정벌 당시 칭기즈 칸은 죽음이 임박하자 다시 한번 후계자 지명에 쐐기를 박았다. "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 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라며 후계자가 오고타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또한 칭기즈 칸은 측근들에게 아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했다. “규범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는 차가타이에게 가고, 관용과 은사, 그리고 부귀를 구하는 자는 오고타이에게 가라. 용기와 명예, 그리고 불퇴전의 정복 의지를 찾는 자는 톨루이를 따라라.” 칭기즈 칸은 호라즘 원정을 끝낸 후 제국의 영토도 분배했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 세력권까지 정복한 후, 장남 주치에게는 남서 시베리아에서 남쪽 러시아 땅 및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토지를 주고, 차남 차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와 서요의 옛 땅을,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서쪽 몽골 및 위구르, 나이만, 타타르, 준가리아를 주었다. 막내 툴루이에게는 몽골족의 근거지인 오논강과 케룰렌강 그리고 툴강 유역을 물려주었다. 또한 세 명의 동생 주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에게도 내몽골 동부 영토, 여진족 영역 근처 옛 거란족과 이민족이 차지했던 지역을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이후 이들을 가리켜 ‘동방 3왕가’라고 부른다.
(註) 가족 쿠릴타이에서 후계자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칭기즈 칸이 큰아들 주치를 부르자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불같이 나오며 "아버지는 이 더럽고 추잡한 메르키트 자식에게 제국을 넘기려는 것입니까?"라고 외쳤다. 그러자 얼굴이 벌게진 주치는 "아버지께서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신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라고 화를 냈다. 두 아들이 멱살을 붙잡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주위의 친족들과 장군들 중 노장 보르추와 무칼리가 뛰어나와 뜯어말렸다. "차가타이, 왜 이러십니까? 메르키트가 쳐들어 왔을 때 어머니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외간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납치당한 것인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주치와 같은 배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이 살아있는 어머니를 그렇게 욕되게 한다면 상처는 덧나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전란 속에서 목이 타는 갈증과 굶주림을 참으면서 당신들을 먹여 살렸고 아버지 칸은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가죽통에 피를 쏟으면서 제국을 만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주치의 계승은 분쟁을 낳게 될 것이 확실했다. 장내가 겨우 진정되자 칭기즈 칸이 입을 열었다. "주치를 왜 나쁘게 말하는가? 큰아들은 주치가 아닌가? 앞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차가타이를 꾸짖었다. 이처럼 칭기즈 칸은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차가타이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차가타이도 후계자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과 같이 대하기가 어려웠다. 이 충돌로 인해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지만, 특히 주치는 씻을 수 없는 모욕감과 울분으로 상심이 매우 컸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정벌을 끝내고 돌아오는 여정에 사마르칸트에서 겨울을 나고 1223년 봄을 시르다리야강 북쪽에서 보냈다. 그는 측근들과 군대를 거느리고 타슈켄트 부근으로 이동해 장막 궁전을 펼쳤고, 1224년 여름에는 탈라스와 추강 사이에 있는 잠불 초원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쿠릴타이를 주재하면서 대규모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장남 주치는 우르겐치 공략 후 시르다리야 강 이북의 이르티시강 유역에 있는 그의 소유지로 돌아간 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합류하지 않고 수렵물만을 보내왔다. 그 후 몇 번 더 칭기즈 칸이 주치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리고 1227년 2월 주치는 45세의 나이로 자신의 영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풍토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 칭기즈 칸이 죽기 불과 6개월 전이다.
(1219년 호라즘 정벌인 제1차 서정)
칭기즈 칸이 사망한 지 2년째에 접어든 1229년 봄, 몽골 케룰렌 강가에서 누구를 칸으로 추대할지를 결정하는 에케(大) 쿠릴타이가 열렸다. 다수의 몽골 귀족(칸국의 수장과 주요 대신)들은 2년간 감국(監國)으로 제국을 통치했고 군권을 장악한 툴루이를 적극 지지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몽골 귀족들은 막내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전통에 따라 이와 같이 결정했으나, 툴루이가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1229년 여름 쿠릴타이가 다시 열렸다. 몽골의 귀족들은 여전히 툴루이를 지지했고, 40일간의 토론 끝에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토론 마지막이 다 되어갈 때 가문의 최고 어른으로 쿠릴타이를 주도하던 차가타이와 삼촌 테무게 옷치킨이 오고타이를 강력히 지지했다. 먼저 죽은 주치를 대신해 참석한 주치의 아들 바투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관망했다. 마침내 1229년 9월 13일의 에케 쿠릴타이에서 툴루이는 몽골 귀족들의 추대를 사양하고,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마음 두고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오고타이라는 뜻을 표명함으로 오고타이가 카안(註)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요(遼)나라 황족 출신으로 칭기즈 칸에 이어 오고타이의 측근으로 있던 야율초재는 대칸의 위엄을 살리고 존엄과 비천함의 예의를 제정한다며, 칸 즉위식을 왕조 국가의 황제 즉위식처럼 준비했다. 먼저 오고타이의 형인 차가타이에게 가족관계로는 형이지만 군신관계로는 신하인 만큼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어줄 것을 요청했다. 차가타이는 야율초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오고타이의 칸 즉위식에서 동생 앞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올렸다. 이로써 즉위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이때 차가타이는 야율초재에 대해 "당신이야말로 사직을 지키는 공신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註): 오고타이가 즉위하면서 받은 '카안'은 과거 유목 국가에서 '카간'과 함께 최고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나 칭기즈 칸이 활동하던 당시 몽골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칭호이다. 처음에는 카안이 오고타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나, 이후 몽골 제국의 제위에 오른 모두(귀위크, 몽케, 쿠빌라이)가 카안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일반명사화되었다. 그리고 다른 유목 국가의 군주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카안을 '여러 명의 군주를 거느리는 유일무이한 최고 군주'라는 의미로 대칸으로 부르기도 한다(다만 이글에서는 널리 쓰이는 칸으로 표기).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사라진 몽골 제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주변의 시선 속에 대칸 오고타이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남쪽으로 쫓겨 간 금나라를 완전 멸망시키는 일이었다. 이 전쟁은 칭기즈 칸의 유지(遺旨, 註)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오고타이 칸으로서는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몽골 제국의 건재함을 내외에 알리는 동시에, 오고타이 정권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註) "원사"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마지막 유언은 바로 금나라와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죽어가면서 측근들에게 당부했다. "금은 정예군을 동관(潼關)에 배치해두고 있고, 남으로는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으로는 황하(黃河)가 있으니 우리가 쳐부수기 매우 어려운 적이다. 다만 송나라에 길을 빌릴 수 있다면 필시 금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송은 금과 가히 철천지 원수로 반드시 우리에게 길을 빌려줄 것이다. 그러면 군사를 당주(唐州)와 등주(鄧州)로 보내 변경(卞京, 현 開封)을 바로 공격할 수 있다. 일이 그렇게 되면 금은 급하게 동관의 병력을 빼내올 텐데, 군사와 말이 1천 리를 달려와야 하니 설사 도착하게 되더라도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에는 서방에 있는 바투를 제외하고 4명의 유력자가 모두 참여했다. 1230년부터 다시 시작한 전쟁에서 차가타이는 몽골의 본토를 지키는 일을 맡았고, 오고타이와 툴루이 그리고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앞장섰다. 1차 전쟁(1211~1214)에서 몽골에게 굴복하면서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로 하고서도 몽골군이 물러가자, 곧바로(1214년 6월) 방어가 용이한 남쪽 변경으로 수도를 옮긴 금나라는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을 방치할 경우 몽골 제국이 한쪽 부분에서부터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여기에 새로 출범한 오고타이 칸 체제의 힘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도 이 전쟁을 반드시 승리할 필요가 있었다. 몽골의 10만 명 정도 병력으로 30만 명에 달하는 금나라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정면 공격보다는 우회 공격으로 금나라의 숨통을 조여 가는 전략이 필요했다. 즉 군사를 세 곳으로 나누어 중앙과 좌우로 치고 들어가는 이 전법은 1차 금나라 전쟁뿐만 아니라 호라즘 전쟁에서도 몽골군이 사용했던 전법이었다. 가운데 중군은 오고타이, 서쪽 우익군은 툴루이, 그리고 동쪽 좌익군은 옷치긴이 맡았다. 중군과 좌익군이 남하하면서 금나라를 압박해 가는 동안 우익군인 툴루이의 군대가 남하해 남쪽에서 치고 올라간다는 전략이었다. 가장 고난을 겪은 쪽은 서쪽 사천(泗川)의 산악지대를 지나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에서 변경으로 접근했던 툴루이 군이었다. 툴루이는 1230년 6월, 남송에 사신을 보내 남송의 영토를 통과해 금을 공격할 수 있도록 요청해 승낙을 받아냈다. 칭기즈 칸이 유언으로 남긴 "송은 금과 철천지 원수이므로 길을 빌려줄 것"이라는 내용 그대로였다. 송의 협조로 툴루이 군은 한수를 건너 금나라 영토로 진입할 수 있었다. 몽골군의 예기치 않은 도하(渡河)에 크게 당황한 금나라는 15만 명의 주력군을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 이에 맞서는 툴루이 군은 3만 명에 불과했지만 금나라 군은 공세에 나서지 않고 대치하면서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오고타이의 중군이 황하를 건너 변경으로 접근했다. 금나라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 보낸 병력을 다시 불러 올려야 할 상황이 됐다. 툴루이 군은 철수하는 금나라 군대를 뒤쫓아 후방에서 괴롭히면서 마침내 이들을 삼봉산(三峰山)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1232년 겨울, 삼봉산 전투로 불리는 제2차 금나라 전쟁으로 금왕조(金王朝)는 운명이 다했다. 이 삼봉산에서 15만의 금나라 군대는 3만 명의 툴루이 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렀다. 툴루이 군은 참호 속에서 말과 함께 매복해 있다가 추위와 허기에 지친 금나라 군을 거의 몰살시켰다. 1233년 5월 마침내 수도인 변경이 함락되자 금의 애종(哀宗)은 남송과 가까운 채주(菜州)로 달아나 임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2년 뒤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서 금왕조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다. 몽골군을 피해 중도를 떠나 18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금나라의 수도 변경은 처참한 모습으로 무너졌다. 그나마 재상 야율초재가 오고타이에게 이제 몽골 재산이 된 변경을 더 이상 파괴하지 말 것을 설득해 어느 정도 모양을 보존할 수 있었다. 금나라 정벌 작전은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이로서 몽골은 칭기즈 칸이 없는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정권을 굳건히 지켜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몽골의 기마군단은 여전히 무적의 군대라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 전쟁의 일등공신은 단연 툴루이였다. 차가타이는 편안하게 몽골 본영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중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 오고타이도 거의 싸우지 않았다. 반면 툴루이 군은 중국의 하남지역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금나라의 숨통을 죄었고 마침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던 것이다.
(몽골군의 금나라 공략 시기와 경로)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군은 개선하는 도중에 오고타이 칸이 병에 걸려 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고, 병에 걸린 후 1달도 채 되지 않아 오고타이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처한다. 군대를 따라온 샤먼(무당)도 칸이 죽음의 길로 다가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했다. 샤먼의 예언은 몽골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 너무 참혹했고 이것 때문에 금나라 토지 신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지 신들이 반드시 보복할 것이므로, 어떤 제사도 효력이 없으며, 칸 스스로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회피하려면 칸의 지위와 비슷한 황족이 죽어야만 그들의 분노를 삭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샤먼을 동원한 음모의 냄새가 짙다). 이때 툴루이가 홀연히 일어선다. 그는 자기가 바로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부친이 형을 정해 칸의 지위를 잇게 한 것은 제국을 잘 통솔하라는 지고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 나는 칸 형을 도와 보좌해, 잊어버린 일들을 일깨워주고, 잠잘 때는 깨도록 했다. 만일 칸 형을 잃는다면, 나는 누구를 깨우고 일깨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칸을 대신해 죽기를 원한다. 하물며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나이다. 이런 죄를 지은 것도 나이므로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할 것이다." 이에 샤먼이 바로 나무그릇을 가져왔다. 안에는 오고타이의 몸을 문지른 후, 저주를 담은 물(독약으로 추정)이 담겨 있었다. 툴루이가 이 물을 마신 후 오고타이는 과연 회복되었고, 1232년 9월 툴루이는 40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형을 대신해 죽은 툴루이의 희생은 몽골 제국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오고타이도 감격해 마지않게 된다. 툴루이 죽음은 이렇게 신비스럽게 포장되어 "몽골비사"에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영웅으로 부상한 툴루이는 몽골 장수들의 존경과 부대 장악 등에 있어서 칸의 그것을 압도할 지경이었다. 오고타이도 전쟁 영웅 툴루이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 툴루이가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그리고 옷치긴 등 3인의 유력자에게는 매우 성가시고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정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툴루이는 뜻밖의 시점에 갑자기 죽었다. 부담스러운 툴루이가 절묘하게 사라져 준 것이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그리고 옷치긴에게는 다행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온 마흔 살의 건장한 장수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 실제 상황이었을까? 이후 나머지 유력자들은 호위호식하면서 살아간 흔적이 뚜렷이 드러난다. 차가타이는 마치 툴루이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 오고타이 칸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몽골 땅의 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오히려 칸보다 더 기세 좋게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옷치긴 역시 동방 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권한을 마음껏 누렸다. 껄끄러운 존재가 사라진 뒤 몽골 제국은 이들 3명의 유력자에 의해 통치되는 삼두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여러 정황상 툴루이는 경쟁자들의 야합(샤먼을 동원)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훗날 칸의 제위에 오른 툴루이의 두 아들(뭉케, 쿠빌라이)과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린 또 다른 아들 훌라구도 아버지 툴루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원사"나 "집사" 등 어느 사서에도 당시의 의문스러운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바가 없다.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입장에서 툴루이가 오고타이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황금씨족과 자신들의 권위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톨루이가 죽기 직전에 오고타이에게 자기의 처자식을 돌보아달라고 유언을 남기게 된다. 오고타이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죽음을 자처한 툴루이의 간청을 듣고 툴루이의 남겨진 자식들을 자기 아들보다 더 챙기겠다고 굳은 약조를 했다. 그런데 툴루이가 죽고 난 후에 발생한 사건들을 보면 대칸 오고타이는 철저하게 툴루이를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톨루이 가족을 괴롭혔다. 오고타이는 툴루이 가족을 이끄는 핵심은 툴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르칵타니에게 조서를 내려 자기의 서장자(庶長子)인 귀위크에게 개가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귀위크는 27살이었다. 소르칵타니의 큰아들 몽케보다 몇 살 더 많지 않았다. 몽케는 어렸을 때, 오고타이의 양자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자의 어미를 자기의 아들에게 시집가라고 명령한 것이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처사였다. 오고타이의 숨은 뜻은 이 기회에 톨루이 가족의 병권과 재산을 오코타이계로 옮기려는 것이었다. 또한 톨루이 가족의 정신적 지주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대칸 오고타이의 조서를 받은 소르칵타니는 진정하고도 완곡하게 답변한다. "저는 감히 대칸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전에 맹서를 한 적이 있는데, 툴루이의 자녀를 성년이 될 때까지 기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맹서를 어길 수 없습니다." 톨루이가 형을 위해 죽었다는 명성이 자자했고, 소르칵타니가 아주 부드럽게 거절했으므로, 오고타이도 더 이상 트집을 잡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젊은 귀위크는 부친의 뜻도 모르고, 소르칵타니를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고타이는 할 수없이 명령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귀위크와의 혼인이 소르칵타니가 직면한 유일한 골칫거리는 아니었다. 이후 오고타이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고 종친과 일절 상의도 없이, 툴루이 가족의 3천 군호를 자기의 둘째 아들인 고단의 아래로 옮겨버렸다. 이 도전은 노골적이었다. 툴루이 부하 장수들도 격분했다. 심지어 그들은 정의를 세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전혀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부하들에게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으며, 그들의 분노를 사그라들게 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그녀의 아들과 장수들은 인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외에 소르칵타니는 이러한 손해를 이익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부하와 재산을 돌려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깨끗이 승복하고 차제에 고단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고단은 미안한 마음에 오고타이계에서 톨루이 가족을 가장 지지해 주는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아쉽게도 고단이 일찍 죽으면서 톨루이 가족에게 더 이상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톨루이가 죽기 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던 큰형 주치는 이미 사망했다. 주치의 영토 또한 머나먼 돈강, 볼가강 일대의 킵차크 칸국이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주치와 남편이 죽고, 킵차크 칸국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소원하게 하지 않았다. 소르칵타니의 주재 하에, 주치 가족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 점도 오고타이가 함부로 톨루이 가족에게 손을 뻗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소르칵타니의 관리 하에, 톨루이 가족은 오랫동안 공손하게 오고타이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오고타이도 더 이상 그들을 심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이후 톨루이의 네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갈수록 실력이 강해졌다. 오고타이도 그들을 더 이상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아끼게 되었다. 오고타이는 소르칵타니에게 다소 미안한 감정이 있었으므로,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가능한 들어주게 되었다. 하지만 소르칵타니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1241년 12월, 56세인 오고타이가 알코울 중독(말 젖을 발효해 만든 몽골 전통주 아이락 보다는 포도주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여섯째 황후이자 귀위크의 생모인 퇴레게네가 오고타이의 유언(손자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명)을 바꾸어 귀위크를 추대하려고 하자 여러 분란이 일어나 칸의 지위가 다시 5년간 비어있게 된다. 이 5년 간 무수한 종친들이 제위를 노리고 싸우게 되어 황금씨족이 엉망진창 되어 버린다. 톨루이 가족은 비록 실력이 강했지만, 소르칵타니의 주도 하에 이 혼전에 끼어들지 않았다. 퇴레게네가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 4년이 지난 후인 1246년 봄에 다시 한번 쿠릴타이가 카라코룸에서 열리게 되어 귀위크가 칸에 오르게 되었다. 오고타이의 생전 유언으로 셋째 아들 고추의 아들인 시레문(失烈門)이 대칸을 승계하도록 한 바 있고, 여러 종친들마저 퇴레게네의 장자인 귀위크가 칸을 승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특히 주치의 아들 바투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그래서 쿠릴타이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이때 소르칵타니는 주도면밀하게 판세를 읽고 섭정 퇴레게네의 뜻에 따라 쿠릴타이에 맨 먼저 도착해 귀위크의 칸 즉위를 찬성했다.
1246년 귀위크가 칸에 오른 후, 그는 소르칵타니에게 매우 감사해하면서 톨루이 가족에게 각종 영예와 권력을 부여했다. 귀위크가 툴루이 가족에게 은혜를 갚는 와중에도 일찍이 원한이 있던 바투에 대한 보복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귀위크는 킵차크 칸국을 토벌하기로 작정했다. 소르칵타니는 금방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재빨리 밀사를 보내, 귀위크가 출병했다는 소식을 은밀하게 바투에게 전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귀위크를 자기편으로 만든데 이어, 바투까지도 자기에게 감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양측 모두의 지지를 확보한 소르칵타니가 이끄는 톨루이 가족은 앞으로 탄탄하게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 1249년 4월, 귀위크는 바투 토벌군을 이끌고 막 우룬구강 유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사망한다. 그의 사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추정이 있지만 거의 모두 바투와 관련이 있다. 어떤 견해에 의하면,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바투가 자객을 보내 귀위크를 암살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소르칵타니의 내밀한 정보 제공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소르칵타니는 현명하고 주도면밀했다. 첫 번째로 사람을 보내어 귀위크의 황후를 찾아뵙는다. 대황후 오굴카미시는 관례에 따라 섭정이 되어 임시로 권력을 장악한다.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소르칵타니와 같은 두뇌가 없었고, 아들을 다루는 재주도 없었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순간에 바투는 종실에 초청장을 띄운다. 자신의 킵차크 칸국에서 새로운 칸을 선출하는 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이다. 바투는 징기즈 칸의 장손이므로, 섭정인 대황후 오굴카미시를 비롯한 종실 사람들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투가 주도한 쿠릴타이에 대표를 파견한다. 바투는 스스로 칸에 오르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국면을 살펴본 후에 톨루이계에게 칸을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톨루이 장남인 몽케를 새 칸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몽케가 새 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운스럽게도 지혜로운 모친 소르칵타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르칵타니는 바투가 새 칸을 뽑는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몽케를 보낸다. 다른 종실들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태도로 인해 바투가 몽케를 친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되고, 그는 몽케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칸이 될 것으로 믿게 된다. 바투의 극력 지지 하에, 몽케는 주치계와 톨루이계의 공동 추천으로 새로운 대칸에 오른다. 이 소식은 금방 차카타이계와 오고타이계에 알려져, 그들은 몽케의 대칸 즉위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소르칵타니와 몽케는 이미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에게 연속 2년 간 초청장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후에, 몽케는 스스로 쿠릴라이를 소집한다. 1251년 여름, 몽케는 정식으로 카라코룸에서 칸에 오른다. 동시에 부친 톨루이를 영무황제로 추존하고, 예종(睿宗)으로 한다. 몽케가 칸이 된 것에 대해 오고타이계는 계속 저항을 한다. 그들은 처음에 맹서한대로 대칸의 지위는 영원히 오코타이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귀위크의 아들 나후는 오고타이의 다른 두 손자인 쿠두헤이, 시레문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반란 소식이 중도에 누설되었고, 몽케는 이 기회에 차카타이계와 오고타이계에서 자신을 반대한 모든 사람을 체포한다. 그리고 재판을 거쳐 모두 죽여버린다. 그중 가장 주의를 끄는 재판은 바로 소르칵타니의 금장(金帳)안에서 진행되었다. 재판받는 사람은 귀위크의 황후 오굴카미시와 시레문의 모친인 다하치하툰이었다. 이때 몽케와 소르칵타니는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내던 모습이 아니었다. 오굴카미시와 다하치하툰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실토하게 되며, 사형을 선고받는다. 오고타이계는 이로써 뿔뿔이 흩어진다. 다만 나이가 어리거나 톨루이 가족과 가까운 일부 오고타이의 후손들이 오코타이 가족의 옛 땅을 나누어 갖게 되어, 몽케에게 위협이 될만하지 않았다. 톨루이가 죽은 후 19년 동안 소르칵타니는 가족의 이익을 보호하고, 조용히 가족의 세력을 키웠으며 결국 몽골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다. 소르칵타니는 그녀의 총명한 두뇌와 정치적인 처세를 통해 역사상 가장 우회적인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다. 그녀는 원나라 역사상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녀의 위치는 칭기즈 칸의 모친인 호엘룬에 다음가는 정도이다. 큰아들 몽케가 몽골 제국의 칸이 되고, 남편이 황제로 추존된 다음 해에 소르칵타니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나이는 60세 전후였고 왕실 묘지 기련곡에 묻혔다.
※ 중국의 역사 지명으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한자음(변경 등)으로,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개봉→카이펑, 사천→쓰촨, 채주→차이저주 등)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모두 한자음으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