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5대 칸이자 대원(大元, 1271~1388)을 건국한 쿠빌라이(1215~1294)는 칭기즈 칸의 4남(막내)인 아버지 툴루이와 케레이트족 출신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의 바탕을 만들었다면, 쿠빌라이는 그 바탕 위에 세계 제국이라고 부를 만한 대원을 건국해 팍스 몽골리카(Pax-Mongolica, 몽골에 의한 평화)를 실현한 인물이다. 친형제로는 4대 칸 몽케, 일 칸국의 건국자 훌라구, 쿠빌라이와 치열하게 제위 다툼을 벌였던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가 있다. 쿠빌라이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처신이 신중했으며, 어머니 소르칵타니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쿠빌라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일 칸국의 재상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역사서 "집사"(集史, 註)에 그려진 그림이 유일하다. 이 그림은 1224년 여름 무렵, 칭기즈 칸이 호라즘 정벌을 끝내고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카자흐스탄의 잠불(탈라스) 초원에서 일행과 함께 대규모 사냥을 할 때, 9살의 쿠빌라이가 짐승을 잡아 할아버지에게 바친 후 칭찬받는 장면이다. 이때 칭기즈 칸은 주변 사람들에게 쿠빌라이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지혜로운 소년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1227년 8월 25일("元史" 기록 일자) 칭기즈 칸이 죽고 아버지 툴루이가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인 감국(監國)이 되자, 쿠빌라이는 아버지를 따라 카라코룸으로 갔다. 하지만 그는 톨루이家의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몽케 칸이 등극하는 1251년경까지는 왕가(王家) 회의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집사" 삽화: 9살의 쿠빌라이가 잡은 사냥물을 바친 후, 할아버지 칭기즈 칸에게 칭찬받는 장면)
(註) "집사(일명 "연대기의 집성")는 당대 최고의 역사 및 지리서이다. 이 책은 몽골 제국의 일원이었던 일 칸국의 7대 군주 가잔 칸(1271~1304)이 1295년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후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국가 개혁의 일환으로 편찬되었다. 가잔은 개혁을 추진하는 재상으로 자신의 주치의이기도 한 라시드 앗 딘(1250~1318)을 임명했다. 가잔과 라시드는 일(훌라구) 칸국의 부흥을 위해 힘을 합쳐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몽골 제국의 역사 편찬도 함께 했다. 가잔의 몽골 제국 역사 편찬 명령에는 분명한 배경이 있었다. 즉 칭기즈 칸이 건국한 후 9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서를 지배하는 세계 제국이 되어 있었는데, 훌라구와 함께 '대서정(大西征)' 군대로 '이란 땅'에 온 자신들은 몽골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차츰 잊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잔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왜 '이란 땅'에 와 있는가. 그리고 동방의 종주국 '대원 울루스'를 비롯해, 그 밖의 울루스에 있는 몽골인들과 어떤 관계와 인연, 혹은 어떤 혈연으로 맺어져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 해소와 몽골 울루스 간의 유대감을 다질 필요성도 느꼈다. 특히 가잔은 자신이 즉위하기 직전에 세상을 뜬 쿠빌라이 칸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가잔 자신도 쿠빌라이가 세운 '대원 울루수'를 모델로 강력한 국가와 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 의욕에 불타는 가잔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몽골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몽골다움'을 자각하도록 하고자 했다. 특히 자신의 신하인 이란 방면의 몽골인들에게 현재의 영광과 부귀의 원천은, 직접적으로는 훌라구와 그 혈통을 중심으로 한 몽골인들의 결속에 있다는 것을 호소하고자 했다. 가잔이 라시드에게 요구한 것은 그런 몽골 역사의 편찬이었다. 따라서 "집사"에는 가잔의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가 강력하게 투영되어 있다. 가잔은 단순히 저술의 명령자만은 아니었고, 반 이상은 가잔이 직접 저술자라고 할 수 있다. "집사"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몽골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종족들의 역사도 망라했기 때문에 최초의 세계사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몽골사는 가잔이 사망한 뒤 그의 제위를 이은 동생 울제이투 칸의 치세 때인 1306년에 완성되었는데, 울제이투는 이 책을 "가잔의 축복받은 역사", 일명 "가잔사"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울제이투는 라시드에게 당시 세계 주요 종족의 역사도 추가로 편찬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라시드는 세계 주요 종족의 역사와 각지의 지리를 상술한 저작도 저술했는데, 각각 "세계민족지"와 "세계지리지"로 불리는 이 책들은 이미 완성된 "가잔사"와 합쳐 "집사"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1310년 또는 1311년에 완성되어 울제이투에게 바쳐졌다. 현재 제3부에 해당하는 "세계지리지"는 유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집사"에는 수백 명의 문인과 예술가가 동원되어 호화로운 삽화와 서체가 삽입되었고, 매년 두 권(각각 각 페르시아어, 아랍어)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중동, 중앙아시아, 아나톨리아, 인도 아대륙의 일 칸국에 의해 세워진 학교와 도시에 배포되었다. 라시드의 일생 동안 약 20개의 삽화가 이 작품의 사본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재 일부만이 남아 있고, 완전한 텍스트는 전해지지 않는다. 삽화는 어느 것이나 일 칸국 시대 예술로써 페르시아 세밀화의 초기작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자료이다. 이처럼 "집사"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수행된 초대형 문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라시드가 저술과 편찬자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대체로 라시드가 주도한 다국적 학자들의 집단 작업에 의한 결과물로 여겨지고 있다. 즉 라시드는 일차적으로 완성된 초고들을 검토하고 수정하면서 그 최종 본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집사"를 구성하는 모든 저작이 독창적인 내용을 다룬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칭기즈 칸 이후 시기에 관한 부분은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베이니가 저술한 "세계 정복자의 역사"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는 방대한 스케일과 사실적인 기술로 인해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학자나 저술인들에게서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집사" 삽화: 가잔 칸의 이슬람 개종 장면)
1232년 9월에 아버지 툴루이가 금나라를 정벌한 후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죽었다(이 부분은 '황금씨족의 반목과 툴루이家 부활'에서 자세히 기술). 오고타이 칸은 미망인 소르칵타니가 툴루이가를 보살펴 줄 것을 간청하자, 1236년 툴루이 가족에게 하북성(河北省) 일대의 영지를 주었다. 쿠빌라이도 이때 한 지역을 받았는데, 아직 통치 경험이 부족해 토착민에게 자치권을 허용했다. 하지만 지역 관료들의 농간으로 세금이 적게 걷히고, 조정에서 오는 보조금마저 줄었으며, 농민들이 도망치는 일도 빈번했다. 이처럼 토착 관료들의 농간과 농민의 감소로 영지가 황폐화되자, 쿠빌라이는 영지를 직접 다스기로 했다. 어머니 소르칵타니는 쿠빌라이를 돕기 위해 새로운 관료들을 보내 세법을 수정하게 했다. 이 시기에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접하면서 중국에 대한 이해도를 전반적으로 높이게 되었다. 1242년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 지역의 저명한 승려해운(海雲)을 오르도(궁전)에 초빙해 그와 담론을 나누었는데, 그의 불교 철학에 대해 감명받았고, 그래서 1243년에 태어난 큰아들 친킴(眞金)의 교육을 후일 그에게 맡겼다. 1244년부터 쿠빌라이는 본격적으로 사방에서 문인, 학자, 승려 등을 모아 가신을 구성했다. 그리고 자신이 관할하는 영지에 총독을 파견해 통치했다. 즉 형주(荊州)에 안무사(按撫司), 경조(京兆)에 선무사(宣撫司), 하남(河南)에 경략사(經略司)를 파견해 지역 사회와 민심을 파악했다. 1244년 유생 왕악(王鶚)을 몽골로 초빙하고, 해운이 같은 승려인 류병창(劉秉忠)과 중국의 도교 사제들도 쿠빌라이에게 소개했다. 류병충은 화가, 시인, 서예가, 수학자, 건축가일 정도로 다재다능했으며 해운이 사원(寺院) 건립 일을 맡아볼 때 쿠빌라이의 고문이 되었다. 산서(山西) 출신 학자 조벽(趙璧) 역시 측근으로 두었다.
몽골 제국의 2대 칸 오고타이가 1241년 12월 알코올(포도주)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고, 약 5년 동안 종친들 간에 치열한 제위 다툼의 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1946년 8월 오고타이의 서장자(庶長子) 귀위크가 칸으로 등극했다. 귀위크는 칸을 뽑는 에케(大) 쿠릴타이에 맨 먼저 도착해 자신을 적극 지지해 준 툴루이의 아내이자 숙모인 소르칵타니에게 특히 감사해했다. 그래서 귀위크는 등극 후 톨루이 가족에게 각종 부(富)와 권력을 부여했다. 반면 일찍이 원한이 있던 바투에 대한 보복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귀위크는 카라코룸으로 바투를 여러 번 소환했으나 끝내 불응하자, 킵차크 칸국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소르칵타니는 바로 밀사를 보내 귀위크가 출병했다는 소식을 바투에게 전한다. 1249년 4월, 귀위크는 토벌군을 이끌고 막 우룬구강 유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죽고 만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은 바투와 관련이 깊다. 일설에 따르면,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바투가 자객을 보내 귀위크를 암살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은 소르칵타니의 내밀하고도 신속한 정보 제공과 무관할 수 없어 보인다.
몽케 칸의 어머니 소르칵타니는 현명하고 주도면밀했다. 귀위크 칸이 사망하자, 맨 먼저 귀위크의 미망인 황후 오굴카미시를 찾아 간다. 오굴카미시는 관례에 따라 섭정이 되어 임시로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소르칵타니와 같은 지혜로움이 없었고, 아들을 다루는 재주도 없었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때 툴루이가(家)와 우호 관계에 있던 바투가 종실에 쿠릴타이를 여는 초청장을 띄운다. 자신의 킵차크 칸국에서 새로운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를 개최하겠다는 것이다. 바투는 칭기즈 칸의 장손이므로, 섭정인 황후 오굴카미시를 비롯한 종친들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관망하던 종친들도 결국 바투의 쿠릴타이에 대표를 보낸다. 반면 소르칵타니는 초청장을 받자마자 지체 없이 몽케를 보낸다. 다른 종친들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태도로 인해 바투는 소르칵타니와 몽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결국 1250년 바투의 영지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바투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몽케가 칸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차가타이 가문과 오고타이 가문에서는 이 결과에 대해 격하게 반발했다. 이에 소르칵타니와 몽케는 1250년 말에 칭기즈 칸이 즉위했던 케룰렌강 유역의 쿠데에 아랄에서 다시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의 선출을 재확인했고, 1251년 2월 24일부터 3월 25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모든 가문이 참석한 에케(大)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 칸의 선출을 못 박았다.
몽케는 칸으로 즉위 후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대숙청을 한다. 몽케의 숙청은 몽골 제국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집사"에 따르면 최고위층 77명이 사사되었다. 특히 칭기즈 칸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오고타이계에 대한 숙청이 대표적이었다. 앞선 귀위크 칸이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구한 결과로 오고타이계는 종친들의 인망도 잃어서, 그들을 보호하려는 종친과 고위 장수들이 거의 없었다. 결국 오고타이 칸의 손자인 시레문(失烈門)을 비롯한 오고타이계는 차가타이계를 끌어들여 몽케를 폐위시키려는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이 모의가 금세 발각되어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오고타이계 왕자들과 귀위크 칸의 미망인 황후 오굴 카이미쉬 등이 체포되었다. 몽케는 황후 오굴 카미시, 시레문의 생모 카다카치 카툰을 처형했다. 이외에도 오고타이계 고위 인사 77명도 함께 처형했다. 일설에는 3백여 명을 처형했다고도 한다. 색목인 출신 재상 친카이(鎭海) 등 오고타이 가문의 측근 관료들도 대거 숙청했다. "집사"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오고타이계의 처우를 놓고 몽케의 측근이 고목(枯木)을 뽑아 그 자리에 신목(新木)을 심는다는 고사를 언급하자, 이를 계기로 몽케가 오고타이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돌입했다고 한다. 황후 오굴카미쉬가 추대하려던 시레문은 용서해 탐마치(정찰병)로 강등시켰으나, 일설에 따르면 시레문이 남송 정벌군에 출전 중, 뒤늦게 반역에 가담이 드러난 몽골 장수들을 죽일 때 시레문도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고 한다. 또한 몽케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오고타이계, 차가타이계 왕자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살아남은 오고타이계 왕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몽골을 떠나 차가타이 울루스, 주치 울루스로 망명했다. 차가타이의 아들 예수 몽케 역시 처형당했고 이후 차가타이 후손들은 몽골 조정과 교류를 끊고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한다. 몽케는 반역에 가담한 위구르 출신 관료 발라, 위구르족의 족장 이디쿠트 살린디 등도 공개 처형했다. 귀위크 칸의 아들 호자와 나쿠는 사형은 면제했으나, 몽골 서부 지역으로 추방했다.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는 형식적으로는 몽케에게 복종했으나, 오고타이 가문을 몰락시킨 것에 불만을 품고 점차 몽케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반발했다. 카이두는 후일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간 내전이 발생하자 아리크부카 편에 섰고, 아리크부카 몰락 이후에는 아리크부카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에게 저항했다. 그동안은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은 이른바 황금씨족을 처형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는데, 몽케는 황금씨족까지 무자비하게 처형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 나갔다. 하지만 몽케는 이 숙청에 대한 종친들의 거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가시적인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그래서 몽케는 칭기즈 칸의 유업인 남송 정복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몽케는 칸으로 즉위하자 동생 쿠빌라이에게 남부군 총사령관 겸 총령막남한지사무(總領漠南漢地事務)에 임명해 몽골의 동부와 중국 하북성 일대를 맡겼다. 쿠빌라이는 쿠투(忽都) 땅에 잠시 주둔했다가, 곧이어 하북성(河北省) 장가구(張家口)에 금련천 막부(金蓮川幕府)를 설치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허형(許衡), 장문겸(張文謙), 두묵(竇默), 조벽(趙璧), 요추(姚樞), 적경(郝經) 등의 한족 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처럼 몽케가 몽골 동남부 지역의 책임을 맡기자, 쿠빌라이는 그동안 눈여겨보아 두었던 돌룬 노르(일곱 개의 호수)의 금련천 초원 지대로 들어가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몽케가 몽골 동남부 관리를 쿠빌라이에게 맡기고, 동생 훌라구에게는 서방을 맡긴 것도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쿠빌라이가 금련천 초원의 영지로 들어간 것은 형 몽케가 칸 자리에 오른 바로 직후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30대 중반이었다. 금련천 초원은 카라코룸과 중도(中都)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였다.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의 동남부 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이 지역의 부족 집단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했다. 이 지역은 원래 칭기즈 칸의 왼팔로 불리던 사준(四駿) 무칼리에게 주었던 땅이었다. 1216년, 칭기즈 칸이 호라즘 정벌에 나서기에 앞서 동북 방면 일대의 관리를 위해 무칼리에게 '동방왕'이라는 작위와 함께 이 지역의 관리를 맡겼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정벌에 나서면서 배후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고 자신이 가장 믿는 무칼리에게 5만에 가까운 군사를 주면서 그 지역의 관리를 맡겼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이 지역에 왔을 때, 무칼리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 지역은 무칼리의 후손(고려 말에 등장하는 나하추도 무칼리 후손)이 장악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무칼리 왕가의 세력들은 물론 동방의 여러 부족들을 휘하로 끌어들였다. 애초 소수 병력만 대동했던 쿠빌라이는 몽골 동남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세력을 끌어들여 점차 별도의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이는 쿠빌라이가 애초부터 이 동남부 영지를 발판으로 몽골 초원과 중국 대륙을 움켜잡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
1252년 6월 쿠빌라이는 몽케 칸으로부터 운남성(雲南省) 일대의 대리국(大理國)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53년 10월, 쿠빌라이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섬서성(陝西省)을 출발해 운남성으로 들어와 몇 개월 간의 전투 끝에 진사강을 건너, 그해 겨울에 대리국으로 들어갔다. 1254년 1월 2일 대리국 왕 단흥지(段興智)의 항복을 받아내,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고 운남행성(雲南行省)을 설치했다. 운남행성의 총독인 대리총관(大理總管)은 대리국의 왕족인 단씨를 임명했다. 대리국 정복 직후인 1254년 초에 쿠빌라이는 몽골로 돌아가면서 부장 우랑카다이(兀良合台, 칭기즈 칸의 四狗인 수부타이의 아들)에게 운남 일대의 관리를 맡기고 대도(大都)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4년 말에 금련천 초원으로 돌아왔다.
쿠빌라이가 첫 원정에서 금련천 초원으로 서둘러 돌아온 것은 이제는 자신의 앞날과 관련된 장기 구상을 짜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구상으로 나타난 것이 1256년부터 금련천 초원 지대인 개평(開府, 1264년 上都로 개명)에 도성을 짓기 시작해 1258년에 완성한 일이었다. 개평의 도성 설계는 나중에 대도를 설계하게 되는 중국인 출신 참모 유병충(劉秉忠)이 맡았다. 비록 개평이 몽골고원의 동남부 끝머리이기는 하지만 초원 한가운데 들어선 중국식 도성은 쿠빌라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중국식 도성을 짓는 일뿐 아니라 쿠빌라이는 정복지의 토착 세력을 끌어들여 새로운 지배 계급을 만들어 나갔다. 이처럼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나가는 쿠빌라이의 행동은 칸에게 충성하며 몽골 제국의 신하로 살아가야 한다는 초원의 원칙에서 분명 벗어나는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이러한 행태가 화근이 되어 형 몽케와 초원에 있는 몽골의 보수세력들로부터 의심(쿠빌라이가 카라코룸의 조정에 올라올 세금 일부를 빼돌렸다는 소문 등)을 받았다. 이 갈등은 제법 심각해서 1257년에 쿠빌라이 영지에 대해 집중적인 세무 조사를 받았고, 상당수의 한족 가신들이 제대로 변호조차 하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아직 자신의 세력이 미약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내 차브이를 먼저 카라코룸으로 보내 몽케에게 사죄하고, 곧이어 자신도 직접 찾아가 사죄함으로써 서둘러 갈등을 봉합했다. 이때 몽케가 공식적으로는 쿠빌라이를 용서했지만, 이후에도 쿠빌라이에 대한 견제를 쉽게 풀지 않았다.
1257년에 뭉케 칸은 남송과의 전쟁에 직접 나선다. 지지부진한 남송과의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앞장선 것이다. 뭉케는 남송 원정에 나서면서 쿠빌라이를 전격 배제시켰다. 이러한 조치에 대한 배경이나 설명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상도에서 독자세력을 키워가는 쿠빌라이에 대한 견제이자 불만에서 나온 처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쿠빌라이 자리는 동방 옷치긴家의 젊은 후계자 차가다르(塔察兒)가 대신했다. 그런데 여기서 차질이 빚어졌다. 차가다르가 이끄는 좌익군은 1257년 가을, 한수(漢水)를 사이에 둔 양양(養陽)과 번성(樊城)이라는 두 요충지 성(城)에 대해 집중 공격했으나, 악천후 등으로 실패하자 철수해 버렸다. 차가다르의 철수라는 갑작스러운 사태로 남송 정벌 작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불같은 성정(性情)의 몽케가 차가다르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몽케는 차가다르를 소환해 질책과 함께 바로 해임하고 쿠빌라이를 중로군 사령관으로 다시 기용했다. 쿠빌라이 군은 일만의 몽골군에 거란, 여진, 한인이 합쳐진 혼성군이었다. 새로 편성된 쿠빌라이 군은 1258년 12월 남송 군과 교전했으나, 그들의 거센 저항에 밀려 한발짝 후퇴했다. 쿠빌라이 군은 전열(戰列)을 재정비한 후 1259년 2월 형주(邢州)를 거쳐 5월에는 복주(濮州)에 진입했다.
1259년 여름을 산동 서부에서 보낸 쿠빌라이 군이 회하(淮河)를 건너 남송에 들어설 무렵에, 쿠빌라이는 남송 정벌을 총 지휘하던 몽케 칸이 1259년 8월 11일 사천성(四川省) 합주(合州)에서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몽케 진영에 있던 이복동생 무가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부고를 전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는 몽케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심사숙고했는데, 측근 학경(郝經)은 아리크부카가 칸에 오를 수 있다며, 남송과 협상을 하고 즉각 돌아가서 조정을 장악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명분(아리크부카는 임시 칸으로 조정을 통제)과 세력(몽골 주력군은 아리크부카 지지)이 열세인 쿠빌라이가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중로군을 지휘하는 장수 바아투르와 논의했다. 그는 쿠빌라이의 손위 동서로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수였다. 그 결과 선택한 전략은 남송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귀환해 아리크부카를 제압해야 할 것으로 보였던 쿠빌라이가 계속 남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대권 다툼의 경쟁자가 있는 카라코룸을 버려둔 채 남송과 전쟁을 계속 진행하자고 강하게 주장한 것도 바아투르였다. "우리들은 군사를 이끌고 개미나 메뚜기처럼 이 땅에 왔습니다. 이미 남송과의 전쟁에 나선 것으로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데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주장을 쿠빌라이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 선택은 아리크부카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있던 쿠빌라이의 입지를 반전시킬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몽골 군사들의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남송과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명분에서 밀리고 군사력도 열세에 있는 쿠빌라이가 두 가지를 단숨에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 보다 더 효과적인 선택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남송과 계속 전쟁은 전쟁터에서 숨진 몽케 칸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또 장강(長江) 남쪽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랑카타이 군을 구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대권 장악의 핵심이 되는 강력한 군사력 확보를 위해서도 이 선택은 현명했다. 군사력이 뒷 받침되지 않으면 대권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몽케 칸의 즉위 때 이미 입증된 사실이었다. 몽케는 주치家와 툴루이家의 군대를 배경으로 칸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당시 남송 정벌을 위한 쿠빌라이 군은 몽골과 거란, 여진, 한족의 혼성군이었다. 만일 쿠빌라이 군이 북쪽 카라코룸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면 결집력이 떨어지는 이 군대는 각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더욱이 그때까지 군벌 형태로 각지에 자리 잡은 세력들은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 채 추이를 지켜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상황이 유리해지는 쪽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쿠빌라이의 남송과 계속적인 전쟁 시도는 관망하는 세력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고심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목민은 물을 두려워한다. 땅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벌이는 전투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수전(水戰)이나 도강(渡江)은 그들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남송과 사이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장강은 이름 그 자체만 해도 유목민 군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바로 이 두려움의 장벽을 깨고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함으로써 관망하는 많은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1259년 9월, 장강 중류 북쪽에 쿠빌라이 군대가 홀연히 나타났다. 쿠빌라이는 그해 여름 산동 서부의 중국인 대군벌(大軍閥) 엄충제(嚴忠濟) 영내에서 보내며 엄씨 군벌을 비롯해 주변의 군벌을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더욱 막강해진 것은 물론 병참과 보급선까지 덤으로 확보한 쿠빌라이가 황하를 건너 장강으로 남진해 온 것이다. 1259년 9월 장강 중류에 도착한 쿠빌라이의 군대는 강을 건너 장강 수륙교통의 중심지 악주(鄂州)를 둘러쌌다. 쿠빌라이가 악주를 공격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장강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남송의 허리를 잘라 동서로 나누려는 것이 그 하나고, 운남에서 북상하는 우랑카타이 군과 만나야 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였다. 예상치 못한 도강에 남송은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쿠빌라이 군은 악주를 포위만 한 채 공격할 기색이 별로 없었다.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쿠빌라이는 의도했던 목적을 이루는 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쿠빌라이 군의 도강 작전은 상황을 지켜보던 각 세력들에게 충격이었다. 물을 두려워하는 유목민 군대가 벌인 성공적인 도강은 쿠빌라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의 진영으로 속속 세력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동방 3왕가가 쿠빌라이 진영에 합류했다. 이를 계기로 관망 상태에 있던 각지의 세력들도 쿠빌라이 진영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물론 우랑카다이 군과 옛 몽케 칸 잔류 부대의 상당수도 합류했다. 상황이 반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드디어 쿠빌라이는 방향을 다시 북쪽으로 잡았다. 대권 다툼에서 승기를 잡아야 할 상황에서 남송과의 전쟁에 더 이상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세력의 합류로 쿠빌라이는 대권을 차지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추었다. 이처럼 운명을 건 선택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쿠빌라이는 다음 수순을 치밀하게 밟아 나갔다. 운남에서 북상하는 우랑카타이 군 지원을 위해 바아토르 군대를 남겨 놓은 채 쿠빌라이는 다시 장강을 건넜다. 쿠빌라이가 군대를 이끌고 건널 때 장강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돌아서서 다시 건널 때는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강이었다.
1260년 3월, 고려의 태자(고려에서 왕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 왕전(王倎, 후일 원종)은 몽케 칸을 만나러 그의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조어산으로 가는 도중, 영하(寧河)의 육반산에 이르렀을 때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심하던 왕전은 결국 쿠빌라이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래서 왕전 일행은 서쪽으로 가던 길을 돌려 남쪽으로 향했는데 초주(楚州) 근방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도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 북상하고 있었다. 3월 20일 초주에서 왕전 일행은 쿠빌라이를 만났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했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며 왕전을 칭찬하고 크게 기뻐했다. 이처럼 쿠빌라이가 하늘의 뜻까지 거론하며 왕전을 환대한 것은 대칸 등극의 정당성이 부족한 처지에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왕전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왕전 일행은 쿠빌라이를 따라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했다. 얼마 안 있어 고려에서 고종(高宗)이 사망했다는 부고를 전하니 쿠빌라이는 왕전의 귀국을 호위하라고 명하면서, 쉬리다이와 강화상(康和尙)을 다루가치로 딸려 보내 왕전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려 태자 왕전의 이동 경로)
1260년 4월 5일 쿠빌라이는 지지 세력을 모아 자신의 거점인 내몽골의 개평(開平)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가 서둘러 칸에 올랐지만, 이 선출은 칭기즈 칸 가문의 법통에 따르면 사실상 무효였다. 칸을 뽑는 에케 쿠릴타이는 칭기즈 칸 일족의 네 울루스 대표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열려서 만장일치를 받아야 비로소 그 효력이 발생한다. 쿠빌라이처럼 자신의 세력만으로 개최한 쿠릴타이는 엄격히 말하면 정식 쿠릴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쿠빌라이의 칸 취임이 비록 불법이라 하더라도 아리크부카 진영은 크게 당황했다. 그래서 아리크부카도 칸을 칭하는데 망설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몽골고원에 체류하고 있는 세력을 모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쿠빌라이가 칸임을 선언한 지 한 달 만에 아리크부카도 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1260년 7월 쿠빌라이는 휘하 장군들에게 아리크부카 토벌을 선언했다. 9월 2일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가 위명(違命)을 날조했다며 토벌 참여를 공표했다. 옹기라트부의 나친(納陳)과 나친의 아들 하카이(哈海), 토곤(脫歡), 오로친(斡羅陳) 등이 옹기라트부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군에 참여했다. 1260년 9월 쿠빌라이 군이 카라코룸으로 진격,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 군의 교전에서 쿠빌라이의 군이 승리했다. 쿠빌라이는 사촌이자 오고타이 칸의 여섯째 아들 카단의 지원으로 카라코룸으로 들어가는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첫 전투에서 아리크부카가 패하고 그의 사령관 알마다르도 전투에서 사망해 카라코룸이 함락되었지만, 쿠빌라이가 떠나자 군대를 재정비한 아리크부카가 다시 점령했고, 1261년 11월부터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양군이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261년 말 개봉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카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 부족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이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재기를 모색하던 아리크브카는 1264년 봄, 알말리크에 주둔 중이던 아리크부카 군대가 엄청난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에 군대가 크게 동요했다. 아리크부카 산하 제후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은 쿠빌라이의 편에 섰으며,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부카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7월 29일 아리크부카는 시무투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 처리를 홀로 결정하기 부담스러워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대신들은 아리크부카와 몽케 칸의 아들 아수타이(阿速帶)의 사형만은 면해줄 것을 건의했다. 반면 훌라구, 바라크, 알루구 등의 쿠빌라이 수하의 종친들은 아리크부카의 사형을 상주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의 목숨은 살려주는 대신 유폐에 처했고, 아리크부카를 지지하던 왕족, 귀족들은 색출해 모두 처형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그에게 1년간 은밀한 형벌을 가했는데 1266년 가을에 아리크부카가 대도(大都)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일설은 쿠빌라이에 의한 독살로 추정한다.
쿠빌라이 칸은 중원(中原)과 초원(草原)을 함께 통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1271년 중국식 국호인 ‘대원(大元)’으로 나라 이름을 정했다. 이는 중원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주고, 또한 대도(大都, 현 베이징)로 수도를 옮기면서 중원 통치에 각별한 관심도 드러냈다. 이후 쿠빌라이가 남송 정벌을 위해 파견한 군대가 1276년에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현 항저우)을 점령했고, 몇 년 후인 1279년 3월 19일부터 5월 10일까지 벌어진 애산 전투(崖山戰鬪, 註)에서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송의 잔존 세력을 괴멸시키면서 마침내 중원을 통일했다. 중원 통일 후, 쿠빌라이는 세계 제국의 건설과 해양 교역로의 장악 등을 목적으로 일본, 안남(安南, 현재 베트남 북부), 점성(占城, 현재 베트남 남부), 미얀마, 자바 등으로 꾸준히 원정 군대를 보내 몽골 제국의 ‘정복 유전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註) 애산 전투가 벌어진 곳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강문시(江門市) 애문진(崖門津)이다. 오늘날 애문진은 내륙으로 6km 정도 들어가 있는 지역이나, 당시는 애산섬 앞의 해안가였다. 원나라는 남송의 마지막 거점인 애산섬을 공략하고자 한족 투항자들을 모아서 대규모 수군을 편성했다. 이 때문에 남송은 그나마 우위에 있던 수군 전력마저도 열세에 처해 애산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게다가 1278년에는 육지에서 항전하던 문천상마저 원나라 군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다. 당시 애산섬에는 각지에서 모집된 20만의 의병이 집결해 남송의 조씨(趙氏) 황실과 명운을 같이 하고 있었다. 송 태조(조광윤)에게 선양한 후주(後周)의 황족 시씨(柴氏) 가문 역시 자신들을 귀하게 대접해 준 송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애산 전투에 참전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남송 함대는 1천여 척의 대형 선박을 묶어서 화공에 대비해 진흙을 칠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결사적인 항전 끝에 여러 차례 원나라 함대를 격퇴했지만, 애산섬은 고립되어 있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원의 함대가 애산섬으로 들어가는 식수와 식량을 차단하자, 남송 함대는 굶주림에 시달렸다. 식량과 식수가 고갈된 남송의 병사들은 마른 음식과 바닷물을 먹고 구토했다. 질병과 기아로 지친 남송의 수군은 원 함대의 대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어 수만여 명에 달하는 남송 병사들이 학살당하거나 물에 빠졌다. 절망한 남송군 수뇌부는 차례차례 자살을 택했다. 남송의 총사령관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하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와 어린 황제를 데려오게 했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수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 안에서 어린 황제에게 제왕학의 개론서인 대학을 강론하다가, 결국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투신했다. 훗날 남송 소제(少帝)로 불린 어린 황제는 "다시는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으리라!"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남송 함대를 이끌던 장세걸은 끝까지 살아남아 안남으로 망명해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태풍이 불어닥쳐, 남송 최후의 함대와 함께 익사했다. 원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애산 전투 후 육지에서 항전하다 미리 잡힌 문천상이 대도로 압송 후 처형되면서 남송의 부흥 운동은 종말을 맞이했다.
(애산 전투가 벌어진 경로와 위치)
쿠빌라이는 자신의 국가를 창건하면서 중국의 행정, 제도를 대폭 수용했다. 중원의 수많은 백성들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제도의 수용과 적용 및 정착 과정을 뒷받침한 사람들이 바로 쿠빌라이가 등용한 한인 참모들이었다. 그래서 기존에는 이러한 점에 주목해 쿠빌라이는 한족의 문화에 빠진 한화(漢化) 군주였고, 몽골이 결국 한족에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쿠빌라이와 그가 세운 국가의 한쪽 측면만을 바라보고 성급히 내린 결론이다. 쿠빌라이는 결코 중국만을 바라본 사람이 아니었다. 몽골과 유목민, 그리고 초원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사례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거제도이다.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인재 선발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쿠빌라이는 중국식의 여러 제도들을 받아들이면서도 과거제도는 도입하지 않았다. 즉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시험으로 판단해 인재를 뽑을 필요성을 쿠빌라이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쿠빌라이의 관료, 참모들은 행정 능력과 실력을 주목받아 등용된 경우가 많았고, 몽골인과 색목인 중에서 공신(功臣)으로 인정받은 가문 출신은 대부분 측근의 고위 관료에 임명되었다. 조정의 핵심 고위 관료에는 몽골인, 색목인 엘리트들을 배치하면서 한인들이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쿠빌라이가 단순히 중국식으로 ‘대원’이라는 국가를 개조시킨 것이 아니라 몽골의 고유한 제도와 중국식 제도를 적절히 혼합해 운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쿠빌라이를 ‘혼합의 군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원나라의 지배 구조)
한편 쿠빌라이는 평생 ‘정통성’이라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의 형인 몽케가 죽고 자신이 제위에 오를 때몽골의 모든 제왕(諸王)과 귀족들이 모여서 칸의 선출을 협의해야 하는 전통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만 모아서 자신의 근거지인 상도(금련천 초원)에서 일방적으로 즉위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힘으로 제압했다.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 보수적인 몽골인들의 입장에서 쿠빌라이의 행동은 쿠데타와도 같았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유일한 칸이 된 이후에도 몽골인들의 내분과 갈등 때문에 내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에게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2대 칸이었던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였다. 몽케가 즉위하면서 오고타이 가문은 계승분쟁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카이두는 살아남아서 세력을 보존했고 쿠빌라이가 즉위하자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힘을 결집해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 제국의 서북 변경 지대를 침략했고, 쿠빌라이는 이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카이두 자신이 칸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카이두와 내전으로 힘을 소비해야 했다. 그리고 카이두와 싸움에서 공을 올린 사람들이 원의 정치와 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쿠빌라이가 1294년 사망한 이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1301년(혹은 1303년)에 카이두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사망하자 전세는 점차 원으로 기울었다. 이를 보면, 남송을 멸망시킨 이후 안정적인 것만 같았던 원은 여전히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서북쪽에서 카이두가 쿠빌라이와 30년 이상 대립했는데, 문제는 동북쪽에서도 터져 나왔다. 제국의 동북쪽(현재 중국의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은 칭기즈 칸의 동생인 옷치긴의 후손에게 분배되었는데, 제국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반(半) 독립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지향하면서 동북 지역에 대해서도 제국의 칸으로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에 옷치긴의 후손이 반발했고, 이러한 불만은 나얀이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반란으로 연결되었다. 1287년에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서북쪽의 카이두와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70넘은 고령의 쿠빌라이가 직접 출정을 나갔다. 그만큼 사안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비록 나얀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잔여 세력은 계속 동북 지역에서 쿠빌라이의 군대를 괴롭혔고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 고려까지 침입했다. 이에 1291년에는 고려와 원 제국의 연합군이 나얀의 잔당을 격파하면서 반란이 종결되었다. 쿠빌라이는 이러한 제국 내부의 분열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몽골 제국 역사에서 전환점을 만들었던 쿠빌라이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은 이미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쿠빌라이가 끼친 영향은 13세기 유라시아 대륙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한반도의 고려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쿠빌라이라는 인물의 존재로 인해 고려의 역사도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환점의 시작은 고려의 원종이 아직 즉위하기 전인 태자 시절에 쿠빌라이를 만났던 사건이었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몽골에 저항했던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 시대가 끝나면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고, 몽골과 화의를 맺기 위해서 세자를 보냈다. 그런데 세자가 몽케 칸을 만나기도 전에 몽케가 사천에서 사망하자 세자는 쿠빌라이를 만나게 되었고, 쿠빌라이는 자신을 찾아와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한 고려 왕실의 태도에 크게 기뻐했다. 이후 쿠빌라이는 세자가 무사히 고려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호위 인물을 함께 파견해 고려로 돌려보냈고, 고려는 쿠빌라이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1260년에 쿠빌라이가 연호를 제정하면서 보낸 조서(詔書) 내용 중에는 “의관(衣冠)은 본국(本國: 고려)의 풍속을 따르고 하나도 고치지 말라. 우리가 파견하는 사신(行人)은 오직 조정에서만 파견할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완전히 금지시킬 것이다. 옛 수도로 옮기는 것은 빨리 하든지 늦게 하든지 헤아려서 하라.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가을을 기한으로 해서 철수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쿠빌라이가 초기에는 고려에 대해 유화적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려에 요구하는 물품이 많아졌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재촉하는 등 고려에 대한 압박의 강도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세자 왕전이 원종으로 즉위한 후에는 직접 몽골로 들어가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한반도 왕조의 왕이 황제가 있는 곳으로 직접 가서 의례를 수행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고, 이는 복속한 국가의 군주가 직접 대칸을 알현해야 한다는 몽골 고유의 복속 관념 때문에 고려가 부득이 행했던 일이었다. 이후에도 고려의 왕들은 종종 몽골로 입조(入朝)했다. 쿠빌라이가 고려의 역사 흐름에 직접 개입한 사태가 1269년에 또다시 일어났다. 이때 무신 집권자였던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그 대신에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즉위시켰는데, 쿠빌라이는 이 소식을 듣고 간과하지 않았다. 최씨 무신정권 초기에 최충헌이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바꾸었을 때에 큰 갈등이 없이 왕의 교체를 인정받았던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상황이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사신의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원종, 왕창, 임연이 모두 입조해 자신의 앞에서 진술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고려의 국경에 군대까지 파견해 압박의 수준을 최대치로 높였다. 결국 임연은 몽골 측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원종을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다. 복위한 원종은 쿠빌라이를 직접 만나기 위해 또다시 몽골로 향했다. 1270년 2월에 원종은 쿠빌라이를 만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의 중서성에 문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원종의 대담한 제안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는 세자(원종의 아들)와 몽골의 공주를 혼인시키자는 요청이었다. 두 번째는 몽골의 군사를 자신과 함께 파병해 주면 강화도에서부터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는 것을 방해했던 권신들을 제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원종은 자신을 복위하게 만들었던 쿠빌라이의 권위를 빌려 무신정권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청혼은 너무 서두르는 것이라며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대를 고려에 보내달라는 원종의 요청은 받아들였다. 결국 임연은 근심 속에 사망하고 말았다.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뒤이어 정권을 잡고, 황제의 군대를 맞이하라는 원종의 명령까지 거부하며 맞섰지만,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100년(1170~1270년)만에 무신집권시대가 종결되었다. 원종이 몽골 군사를 이끌고 온 행동 하나로 인해 임연, 임유무가 모두 사망했던 것이다. 이후 개경으로 환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고려 역사의 흐름을 전환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고려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쿠빌라이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고려 왕실과 통혼을 허락했던 일이었다.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먼저 혼인을 요청했을 때 쿠빌라이는 바로 승낙을 하지 않았는데, 1271년 10월이 되어서야 쿠빌라이가 혼인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고려에 당도했다. 하지만 실제 혼인은 삼별초의 항쟁을 최종적으로 진압한 이후인 1274년 5월에 이루어졌고, 이때 원에 있던 39세의 유부남 세자(훗날의 충렬왕)와 쿠빌라이의 16세 막내딸(서녀) 쿠툴룩켈미시(제국대장공주)가 혼인했다. 원래 세자는 1260년(원종 원년)에 신종의 손자인 왕인의 딸(정화궁주)과 결혼하고, 왕씨가 이미 세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왕씨보다 14년이나 늦게 혼인한 제국대장공주가 상국인 원나라 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의 위치를 차지했다. 혼인 이듬해인 1975년에 충렬왕과 쿠툴룩켈미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충선왕이었고, 고려의 왕실이 원나라 황실 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원나라의 정국(政局)이 고려 역사에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큰 변화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는 사망할 때까지 군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 남송, 점성, 안남, 미얀마, 자바 등 일본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꾸준히 원정 군대를 보냈다. 일본에 대한 두 차례 원정(1274, 1281)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남송 원정에서는 저항했던 마지막 세력을 1279년 3월 애산섬 전투로 괴멸시킴으로써 경제력, 생산력이 높았던 남송의 영역을 그대로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성, 안남, 미얀마, 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정은 쿠빌라이가 원했던 바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군주들은 시도하지 않았던 남방 원정에 쿠빌라이는 왜 이렇게 집착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는데, 우선 쿠빌라이는 ‘바다’에 유독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양 교역을 장악해 중국 남부, 동남아시아, 인도양, 서아시아로 연결되는 항로를 이용한 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세계 제국의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 안남 등의 군주들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입조(入朝)해 복속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고려는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을 위해 군사, 선박을 동원해야 했고 이 때문에 고려 조정과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쿠빌라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고려사"에 기록된 쿠빌라이의 발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몽골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사신이 일본인 몇 명과 함께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일본인에게 “너희 나라가 중국에 조공한 지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지금 내가 너희 나라에게 입조 하라는 것은 너희를 핍박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세계 제국 군주로서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던 쿠빌라이의 속내가 드러난 장면이다. 대원의 세조(世祖) 세첸 칸 쿠빌라이는 1294년 2월, 79세에 붕어했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오래 살았던 탓에 황태자 친킴이 먼저 죽고, 손자인 성종 올제이투 칸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쿠빌라이가 원을 건국해 통치한 시기에는 동서 간의 교류가 활발해져 수도 대도에는 중동 및 유럽 각국에서 몰려든 색목인이 자주 눈에 띄었고, 외국 상품도 많이 거래되었다. 그리고 인도양을 통한 해상무역도 활발해져 중국 동남부 해안을 접한 복건성(福建省)의 항구 도시 천주(泉州)에는 무역을 하기 위한 각국의 상인들로 북적이었다. 또한 원나라가 지배하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대도를 중심으로 각 지역을 촘촘히 연결한 역참 제도의 발달도 동서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한편 쿠빌라이 치세 때 원나라에서 17년 간 체류한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의 체류 경험담을 그의 구술로 엮은 "동방견문록"(註)과 혜종(토곤테무르, 재위: 1333~1368) 시기에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쓴 여행기(註)는 유럽인들에게 동양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특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콜럼버스가 탐험에 지참할 만큼 유럽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쿠빌라이가 건국한 원은 동서를 교류시킴으로써 세계사적인 문화 대변동을 일으켰고, 그 변동은 근대 세계 형성에 큰 동력이 됐다. 따라서 역사가나 학자들이 쿠빌라이를 진정한 팍스 몽골리카를 실현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
(註) 마르코 폴로(1254~1324)는 15살 때인 1269년, 상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를 따라 원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색목인을 우대하던 쿠빌라이 칸 정책 덕분에 17년간 체류하면서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 여행을 작가 루스티첼로 다 피사에게 구술해 책으로 묶어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다. 마르코 폴로는 1296년 지중해 패권을 두고 싸우던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전(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 베네치아 병사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고, 같이 포로로 잡혀 있던 죄수 루스티첼로 다 피사가 폴로의 구술을 책으로 출판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 여행 후 전쟁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324년 70세로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여행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친구나 친척들이 "여태껏 거짓말을 했다는 걸 고백하고 죽으라."라고 권유했지만 마르코 폴로는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말하지 않았다."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이었고 처음에 무역을 위해 흑해 연안과 볼가강 유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원나라의 사신을 만나 부하라(현 우즈베키스탄)를 거쳐 베이징까지 함께 이동하게 된다. 이들의 두 번째 여행에서는 아들 마르코 폴로가 함께하며 쿠빌라이 칸이 요청했던 로마 교황의 친서를 지참하고 페르시아를 거쳐 다시 베이징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는 17년을 중국에서 보낸 후 이탈리아에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해상으로 페르시아까지 이동했다. 책의 후반부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본, 원나라 수도 북경, 중국 북부, 서남부, 동남부, 인도양, 대초원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이 한국에서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본에서 알려진 이름을 가져온 것이고, 원래 책 이름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한다. 중국 역시 이를 받아들여 마르코 폴로 유기(馬可·孛羅遊記)라고 한다.
(註)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중세 모로코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모험가, 순례자, 상인, 여행가, 법관이다. 마르코 폴로와 비슷한 시대에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모로코 탕헤르 출신이다. 이븐 바투타는 여행 후 모로코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의 명을 받고 이븐 주자이를 편집자로 삼아 유명한 "여행기(리흘라)"를 저술했다. 본래 제목은 "여러 도시의 경이로움과 여행의 신비로움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시작한 나이는 불과 21세로 이후 30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 10만 킬로미터를 종횡무진 누비며 14세기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본인이 무슬림인 만큼 여행 동기도 종교적 신의를 기반으로 시작되었기에 당시 여러 곳에 토착화된 현지 무슬림들을 기록에 남겨 현대 종교학계에서도 사료로 많이 인용된다. 원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필사본이 남아있기에 그 기록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븐 바투타는 1304년 모로코의 탕헤르의 법학자 집안으로 태어났다. 1325년 메카를 향해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왕들의 사신과 대상을 겸하여 중동, 중앙아시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동아프리카, 남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을 거치는 장대한 여행을 했다. 2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서아프리카 말리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여정을 여행기에 자세히 남겼으며 말년엔 모로코에 돌아와 법관으로 일하다 1377년 사망했다. 이븐 바투타는 133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 황제를 알현했다. 당시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에 상륙, 이후 킵차크 칸국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Öz Beg khan)의 기독교인 아내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 Bayalun Palaiologina)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우즈베크 칸의 명령으로 그녀를 수행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오갔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나 이븐 바투타는 워낙 그의 여행기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그의 장대한 여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중세 시대 아프리카부터 중국의 대원제국까지 직접 경험한 시대상과 문화, 정치, 종교, 사회에 대해 폭넓게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워낙 장기간 여행한 터라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이븐 주자이에게 기억이 헷갈려 엉뚱한 이야기를 말하기도 한다. 이 책은 이븐 바투타 사후 중동 특히 그의 모국인 모로코에서 큰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정되며 아랍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울리히 야스퍼 시첸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중동 여행 중에 "여행기"의 축약본을 구입했고, 이후 많은 유럽 학자들이 축약 출판물에서 "여행기"의 일부를 발췌해 번역했다. 영국에서는 사무엘 리가 1829년 아랍어 축약판으로 번역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발간했고, 프랑스에서는 183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완벽한 형태의 "여행기"가 발견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져 번역되었다. 그리고 1853년~1858년까지 번역, 4권으로 출간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문화 상대주의 따위는 없었던지라, 여행한 지역의 토착민들의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야만인 취급을 곧잘 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말리 제국에서는 '금과 자원이 넘쳐나는 자원이 풍부한 제국이자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말리의 종교 문화는 이슬람교와 아프리카 토착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융합되어 있는, 좋게 보자면 종교의 다양성이 있는 사회지만 그의 눈에는 이교도가 판치는 사회였다. 말리의 여자들은 히잡 등 머리카락을 가리는 의상을 입지 않았고,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거리낌 없이 대화할 수 있었으며,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등 자주성을 가졌다. 역시나 이 또한 현대의 시각으로는 성평등적인 사회지만 그의 눈에 말리는 '야만적이고 문명화가 덜 된' 모습이었고,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말리 제국의 환상을 철저히 박살 냈다고 그의 여행기는 말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당시 말리의 황제였던 만사 술레이만의 행보였는데,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지로 뒤덮인 꼬질꼬질한 일개 병사 두 명과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바투타에게 큰 충격이었다. 또한 황제를 직접 알현한 자리에서 이븐 바투타는 빵덩어리 세 조각과 구운 소고기, 그리고 발효된 크림을 대접받았는데, 이는 말리에서 전통적으로 여행객에게 대접하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돈과 황금 등의 선물을 기대했던 바투타는 이를 보곤 실망한 나머지 비웃음을 크게 터뜨렸다고 한다. 사실 금을 주지 않은 말리 제국도 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말리는 고립 정치를 하고 있었기에 외부 영향을 피하고 금을 외교 관계에서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금광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현대인들의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법학 지식이 풍부했던 이븐 바투타는 여행 간 지역에서도 법관으로 일하면서 풍족하게 먹고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자신에게 풍족하게 잘해주었던 지역에 관해서는 술탄이 영웅호걸이다. 지역 주민들이 신앙심이 깊다. 정직하다 등등의 갖가지 칭찬을 써놓았지만, 상술한 말리 같은 경우에는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국가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건만 자신이 기대하던 만큼 대접해주지 않았는지 감정을 담아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여행지에 대한 개인감정에 따라 어조를 바꿔서 서술하는 편이었다. 그가 방문하고 장기 체류했던 몰디브 역시 이슬람을 믿었지만 아무도 히잡을 쓰지 않고 현지인 여성 대부분이 배꼽부터 무릎까지만 가리고 상반신을 노출하고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몰디브인들이 매우 신앙심이 깊고 정직하다는 등등 칭찬 위주의 서술을 남기기도 했다. 즉 이븐 바투타의 이러한 편향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행기는 해당 지역의 신변잡기나 정치경제적·문화사회적 현황, 그리고 당대 현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다.
※ 중국의 역사 지명으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한자음으로,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로 표기하는 것이 표기 원칙이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모두 한자음으로 표기한다. 또한 몽골 울루스도 '칸국'과 '한국'이 혼용되고 있으나 칸국으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