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왜?”
맨 처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을 보면서부터 가졌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비로소 들은 기분입니다.
존 왓츠 감독, 톰 홀랜드, 젠데이아 콜맨 주연의 2021년 개봉작입니다. 어벤저스 멤버로서의 3번째 작품이며, 파 프롬 홈과 연결되는 이야기이고요.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삼파이더맨이 등장하는, “뉴 유니버스”의 실사화라고 보아도 무방한 종합 선물세트죠.
그간 각각의 스파이더맨이 쌓아 올린 막대한 서사들을 조금씩이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줄거리는 최대한 압축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에서 미스테리오에 의해 정체가 발각 난 데다가 테러범이라는 누명까지 쓴 피터 파커는 자신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되자,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여기서 중요하 부분은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인데... 절친 네드와 연인 엠제이, 해피 및 어벤저스 멤버들, 그리고 메이 큰어머니가 여기에 해당하죠.
어쨌거나 피터 파커에게 동정심을 느낀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고 주문을 외우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잊히는 것은 싫었던 피터의 추가 요청에 따라 주문을 5번이나 바꾸게 됩니다. 이때 평행우주의 통로를 건드려버린 것인지 다른 차원의 피터 파커를 알고 있는 자들까지 지금의 세계로 건너오게 되는데, 하필이면 빌런들만 골라서 이동하게 됐나 봅니다.
토비 맥과이어의 숙적 그린 고블린, 닥터 옥토퍼스, 샌드맨. 앤드류 가필드와 싸웠던 리자드맨, 일렉트로... 이 모두가 막 한꺼번에 나타나서 만행을 저지르죠. 이 와중에 같은 차원에서 온 빌런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생각보다 유쾌하게 전개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 마법의 상자를 써서 빌런들을 다시 되돌려 보내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자기들 차원에선 이미 죽은 자들이죠. 빌런들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낀 피터는 갱생의 기회를 주고자 닥터 스트레인지를 따돌리고 이들을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일종의 혈청 같은 것을 개발합니다. 빌런들도 피터의 아이디어를 따르지 않으면 다시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죽음을 당한 처지이기 때문에 순수히 응합니다. 처음에는요.
닥터 옥토퍼스를 제정신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기쁨도 잠시, 그린 고블린이 빌런들을 충동질하여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버리죠. 빌런들의 집단 만행을 피터 파커 혼자서 막아내기란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터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큰 어머니 메이가 사망하게 되어버리죠. 그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괜한 짓을 했다며 후회하는 피터에게 메이는 스파이더맨 그 대사를 말합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한편 피터의 상황을 걱정하던 엠제이와 네드는 피터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 빼돌린 마법 반지를 사용하는데, 이때 드디어 등장합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앤드류 가필드가요. 아 진짜... 영화관에서 봤다면 이 장면에서 관객들 반응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더군요. 혼란에 빠진 엠제이와 네드는 자신들의 피터를 찾는데 이번에는 역시 토비 맥과이어 피터 파커가 등장합니다.
셋 다 피터 파커이니, 그냥 앞으로는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배우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토비와 앤드류는 천재 과학도 답게 평행우주 이론을 언급하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 납득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톰 홀랜드를 찾아가 협력하기로 하죠.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들고 당당히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근처로 상자를 이용해 빌런들을 유인하고, 삼파이더맨이 각 빌런들에게 혈청을 주입시키는 것이 계획입니다.
톰을 제외한 나머지 스파이더맨들은 팀워크를 해본 일이 없기에 처음에는 고전합니다만, 점차 승기를 잡아갑니다. 하나씩 빌런들을 갱생시키는 스파이더맨들. 그리고 톰은 메이가 사망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친 그린 고블린과 일대 일 혈투를 벌입니다. 아아.. 그린 고블린. 등장인물 중 최고령과 최연소 배우의 대결이다 보니 고블린의 상태가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검색해보니 고블린 1955년 생, 톰은 1996년생, 무려 41살 차이가 나네요.
이러하니 승부는 당연히 젊은 톰의 승리로 끝나고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해 그린 고블린을 그대로 죽이려 하지만, 토비가 이를 만류합니다. 이 세계의 스파이더맨은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나 봅니다.
토비의 마음을 이해한 톰은 그린 고블린에게 혈청을 주입하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우주의 차원이 갈라지면서 스파이더맨을 알고 있는 온갖 사람, 빌런들이 쏟아져 들어오려고 합니다.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고 싶었던 톰은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처음 했던 부탁을 다시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잊게 해 달라고요.
그래서 서로를 만나서 기뻤던 삼파이더맨들도, 닥터 스트레인지와 어벤저스들도, 가장 소중했던 네드와 엠제이도 이제 피터 파커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피터 파커는 너무나 소중했던 한 사람을 영원히 잃고, 나머지 둘에게 잊혀버립니다. 이것이 그가 큰 힘을 가지게 된 대가로 치러야 하는 희생인 거죠. 하지만 그에게는 큰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네드와 엠제이를 다시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죠. 그 약속을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취향 정 중앙 스트라이크였습니다.
우선 재미있습니다. 미스테리오의 만행 때문에 고구마 전개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유쾌 발랄하게 풀어가더군요. 플래시와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도 귀엽고, 닥터 스트레인지와의 만담도 재미있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압권은 삼파이더맨과 반가울 빌런들의 등장이겠죠. 영화가 유쾌하다 보니 그 살벌하던 빌런들도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하나같이 이전 영화들에서 짠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던 캐릭터들만 이렇게 소환했는지, 감독과 작가의 센스와 배려에 무한한 감사를 바치고 싶었어요.
소니의 스파이더맨부터 언급하자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제가 기대하던 스타일이 아니라 큰 인상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에 대한 팬심으로 본 영화라서 인지 몰라도 조금 더 엽기 발랄한 느낌을 기대했기에, B급 정서가 없는 서사와 인물 설정이 오히려 낯설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1편은 찬 재미있게 봤는데, 2편과 3편으로 갈수록 점점 더 취향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아 물론 3편 어둠의 댄스는 무척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부분은 그 명대사였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던... 좋은 말이죠. 맞는 말이고요. 그런데 저는 왜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요?
피터 파커가 그 말을 들은 것은 삼촌에게서 입니다. 그가 일부로 놓친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후에 그린 고블린에게 왜 인간을 도우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하죠. “그게 옳은 일이니까.”
삼촌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부조리함을 읊으며 함께 세계를 제패하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저는 이 부분이 왜 이리 어색할까요.
삼촌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딱히 피터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속인 도박장 주인을 위해 굳이 강도를 잡아야만 했을까요? 히어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는 아직 각성 전인 십 대 히어로입니다. 누구라도 강도를 보낸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후 그의 후회와 각성은 ‘큰 힘을 가진 히어로’로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책과 분노라고 보였습니다. 그냥 “부모님 살아계실 때 정성을 다하자.”,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는 참지 말자.” 정도의 일반적인 교훈이라고 해도 되는 정도의 상황에서 굳이 그 대사가 큰 공감의 파도를 일으킬 정도인지 의문이었어요. 오히려 샌드맨이나 그린 고블린과 같은 빌런의 고민과 서사에 더 몰입되더군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역시 재미는 보장된 작품이었지만, 피터 파커라는 인물을 볼 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예 새로운 히어로를 내세운 것이라면 모를까. 잘생긴 얼굴, 타고난 머리, 큰 힘이 없을 때도 갖추고 있던 책임감, 정의감. 거기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암시까지 더해졌죠. 솔직히 이는 신화 속에 나오는 대를 잇는 영웅의 서사로 보였을 뿐 “큰 힘을 가지게 되고 나서 자각하게 된 큰 책임감”이라는 테마에 공감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도 오히려 빌런의 고뇌가 더 와닿았는데요. 특히 리자드맨의 경우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일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힘을 가지게 된 그는 그 힘을 그릇되게 휘두르지만 마지막엔 스파이더맨을 구함으로써 남아있는 인간성을 스스로 수호해냅니다. 이런 서사가 더 드라마틱하고 뭔가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너보다 더 착한 아이는 없다.”라고 말하는 숙모의 발언은 살짝 뜬금없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달랐습니다. 영웅이지만 고되고 불운한 삶을 살아가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유쾌하고 산뜻하지만 미숙한 소년의 모습이더군요. 어떻게든 토니 스타크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이른바 ‘아싸’에 허영심 많고 유치하지만, 천재에 장점도 많은 평범한 소년. 여기까지는 딱 “다정한 이웃”이죠. 아직까지 큰 책임을 운운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리고 서서히 성장해갑니다.
1편에서는 허영심을 자제하게 될 줄 알게 되며, 2편에서는 경솔함으로 인해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3편.
아직도 미숙하고, 뭔가 어정쩡합니다만, 그는 스파이더맨 1편과 2편 사이에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거쳤죠. 죽었다가 살아나고, 처절하게 싸웠으며, 소중한 동료들을 잃었습니다. 바로 이 피터 파커가 주위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하고, 빌런들에게도 자비심을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는 보다 큰 힘을 가졌고, 이제 큰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거죠.
피터 파커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서, 혹은 그가 워낙 착한 소년이기 때문에 큰 책임을 실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작은 책임을 지고 싶었던 것뿐이죠. 처음에는 친구들의 입학을, 다음에는 자신 때문에 차원 이동을 한 빌런들의 갱생을... 이렇게 책임의 범위는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그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그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죠.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일 그에게 메이가 읊은 그 대사는 지금까지 그 어떤 스파이더맨 때보다 강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피터 파커의 큰 힘으로 인해 어떤 희생이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면,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된다. 절망감 때문에 멈춰 서지는 말아라. 왜냐하면 큰 힘에는 큰 대가, 큰 책임이 필수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 대사는 히어로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책하고 좌절한 히어로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그렇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이 영화에서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글이 다소 단정적인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 위로가 있었기에 피터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할 수도 있는 선택을 기꺼이 할 수 있었고, 검정고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용기를 가질 수 있었으며, 엠제이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있는 성숙함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면라이더 빌드’와 비슷한 처지가 된 스파이더맨이군요. 톰 홀랜드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엠제이와 네드를 바라보던 표정. 참 좋았어요. 오랜만에 본 토비 맥과이어는 상당히 성숙해졌더군요. 피터 파커로서의 삶도, 배우 자신도요. 쉽지는 않지만 엠제이와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는 점도 그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앤드류 가필드는 여전히 꽃미남에 착한 스파이더맨이었고요. 등장 씬이 참 좋았습니다. 말 그대로 훅 들어오더군요. 그웬 때문에 아직도 힘든 모양이지만, 그녀의 마지막 대사처럼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과 만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돼야 하는지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하게 되겠죠.
빌런들도 하나같이 이전 시리즈에서 죽기엔 아쉽고, 짠한 사연들을 가진 인물들만 모아서, 이들이 다시 삶을 살아갈 기회를 가지게 됐다는 점도 좋았어요. 너무 이상적인 결말인가요? 하지만 피터 파커가 그만큼 큰 희생을 했으니, 그가 지키고자 했던 나머지 인물들을 좀 동화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괜찮겠죠. 이것이 큰 힘이 필요한 이유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