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ㅡ스포많음
클라이막스란 바로 이런 것
소년은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주으려 낯선 이의 저택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치 인형처럼 잠들어 있는 소녀를 만납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아마 “오늘은” 소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소년은 소녀를 보며 인어를 연상합니다. 아름답지만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인어.
가오루코는 소녀의 어머니입니다. 소녀는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해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실상의 사망... 의사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죠. 하나는 기약 없는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사망을 인정하고 소녀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 미약한 소녀의 움직임을 감지한 가오루코는 설령 그 움직임이 자신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딸의 치료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연명치료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을 향한 막막한 도전과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즈마사는 소녀의 아버지입니다. 불륜으로 인해 가오루코와 이혼 직전에 이르렀지만, 딸의 사고로 인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혼을 보류하고 가족을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죠. 그는 BMI(Brain Machine Interface: 뇌와 기계의 연결을 통해 뇌를 통제, 조정하는 과학기술인가 봅니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불륜 전적이 있긴 해도 아내와 가정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어서, 가오루코가 원하는 것을 대부분 이루어주려 합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신념에 공감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죠.
호시노는 가즈마사 회사의 연구원으로 전기 자극에 의해 지체부자유 환자의 근육을 발달시키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를 도와 그들의 딸이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생명유지와 성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오루코 모녀에게 애착과 애틋함을 느끼게 됩니다.
후사코는 특수학교 교사로, 가오루코의 딸의 담임입니다. ‘뇌사판정을 받아서 사실상 회생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기증을 거부하고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환자 가족의 욕심’에 대해 무언가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고는 위의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동네 소년입니다. 아마도 소녀와 비슷한 또래겠지요. 우연히 잠든 소녀의 모습을 본 소고는 계속해서 소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즈호... 인어입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으나, 어머니 가오루코의 헌신으로 인해 아이에서 소녀가 될 때까지 계속 성장하고 있는 인어죠. 그녀의 마음속은 살아있는 것일까요, 죽어있는 상태일까요.
오랜만에 추리물이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대략 주요 인물 설명은 마친 것 같네요. 소설은 식물인간이 된 미즈호를 첨단 바이오기술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일반 아이와 거의 동일한 성장을 이루어가는 어머니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일반 소설도 참 잘 쓰는 작가더군요.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싶게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예상치 못한 반전, 더불어 바로 이거지! 싶을 정도의 클라이막스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해야 할지 충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뭔가 여러 가지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앞서 대강의 줄거리만 보셔도 짐작하시겠지만, 가오루코가 딸을 살리려는 노력은 일반적인 범위가 아닙니다. 엄청난 재력과 상상을 초월한 기술력,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 무엇보다 본인의 절대적인 의지력이 모두 동원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네. 소수의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거 무엇일까요? 미즈호가 다시 일어나는 것? 분명 미즈호는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아 근육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가오루코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인생을 걸어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쓰더군요. “저게 당신이 지키려는 세계야? 그 세계의 끝에 뭐가 있는데?”
처음에는 대부분이 가오루코를 돕고, 그녀의 편이 되어줍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알게 됩니다. 사실은 가오루코를 제외한 그 누구도 미즈호가 깨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요.
가즈마사의 아버지는 가오루코의 집념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동네 주민들은 식물인간인 채로 몸만 성장해가는 미즈호를 점점 기괴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도 미즈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대하는 데에 지쳐가고 있으며, 가즈마사 역시 한계에 다다르게 되죠.
그리고 일은 터집니다. 미즈호 동생의 생일날, 가족들은 가오루코에게 어쩌면 합리적인, 그러나 가오루코에게는 가장 잔인한 말을 던지고 말죠. 미즈호는 죽었다고. 사실을 인정하라고...
여기에서 가오루코는 과연 미즈호가 죽은 것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칼을 집어 듭니다. 그리고 미즈호를 찌르려고 하죠. 모두가 기겁을 하여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할 때 가오루코는 외칩니다.
“내가 여기에서 딸에게 칼을 꽂는다면 나는 살인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즈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살인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사람은 두 번 죽을 수 없다. 이제 당신들이 대답해라. 나는 살인자인가?”
아아... 이거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렇죠. 클라이막스란 건 이런 것이구나 싶더군요. 한두 페이지 남짓 서술되는 이 장면은 저의 머리와 마음을 한꺼번에 뒤흔들어버렸습니다. 누가 그녀의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뇌사는 사실상 사망이라고 믿어왔는데, 막상 눈앞에서 칼날을 들이대는 순간 곧바로 미즈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식해버리는 모순된 마음.
이 작품은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와 장기 기증 등의 의학윤리적 문제를 상당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룬 소설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런 윤리적 딜레마보다 가오루코의 한계치를 넘어선 집념의 힘이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가오루코는 불가능을 어느 정도 가능케 해버렸죠. 식물인간이 된 미즈호의 성장도 그렇지만, 미즈호를 죽은 사람으로 인식하던 이들에게 결정적인 한방을 날림으로써 그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독자도 포함됩니다. 이제 그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미즈호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이 아닌, 더 이상 죽거나 다쳐서는 안 되는 소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미즈호를 진정으로 되살린 셈이죠.
어찌 보면 그의 전작 ‘성녀의 구제’ 속의 주인공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의지력. 그러나 그것이 이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스스로 실감했을 때 바로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는 용기. 강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여담이지만, 성녀의 구제 속 주인공에게도 저는 상당히 애착이 갔습니다.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저는 그랬습니다.
결말 부분에서 미즈호는 떠나고, 가오루코는 그녀를 보내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나게 되죠. 어떤 이에게는 집념이 만들어낸 주박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달콤한 마법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미즈호는 ‘생전’의 자신에게 잠시나마 애틋한 마음을 품었던 소년에게 크나 큰 선물을 해주게 됩니다. 마치 한 편의 동화 같지 않나요?
‘신기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미즈호가 떠날 때 가오루코는 이렇게 느낍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서로가 느끼는 안타까움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의 감정이 한 번에 와닿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미즈호는 엄마에게 덕분에 진심으로 행복했었다고 말하죠. 이것은 진실일 것입니다. 미즈호의 일부가 깃든 소고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부디 가오루코 또한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잃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온전한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저는 그녀가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