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 가넷 감독의 1946년도 작품으로 라나 터너, 존 가필드 주연입니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포스트맨과 불륜을 저지르는 영화 아닐까 싶지만, 실제 영화에 포스트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제목은 두 주인공의 카르마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제목은 들어보신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1981년에 나온 잭 니콜슨 주연 버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원작이 따로 있더군요. 원작은 제임스 M. 케인이 쓴 동명의 추리소설이며, 1946년 이미 영화로 한번 제작이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그 유명한 라나 터너. 제가 이 영화를 리뷰하는 이유는 좋은 작품인 것도 있지만, 바로 라나 터너 때문입니다.
잠시 딴 길로 새자면, 혹시 킬빌을 기억하시나요? 그 영화 2편에 보면 대강 이런 대사가 나오죠. “빌은 금발을 좋아한다. 빌이 어릴 때 본 영화에서 라나 터너가 등장할 때 눈빛을 보고 그가 금발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사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빌은 라나 터너에게 반해서 취향이 금발로 굳어졌고, 결국 우마 서먼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것이겠죠. 솔직히 이 정도의 대사를 들으면 얼마나 대단한 여배우길래 저 유명한 영화에서 저렇게까지 언급을 하나 싶었습니다.
한 가지 더, 캐서린 제타 존스와 샤론 스톤. 이 둘의 연관점은? 마이클 더글러스......가 아니라 바로 이 라나 터너의 전기 영화의 제작과 관련하여 라나 터너 역할을 두고 경쟁을 펼쳤던 배우들입니다. 결국 배역은 캐서린 제타 존스에게 돌아가서 샤론 스톤이 엄청나게 아쉬워했다고 하네요. 라나 터너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면서 말이죠. 결국 제작은 무산된 건지, 연기된 건지 지금까지 소식이 없지만,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탐을 냈다는 역할의 실제 주인공 라나 터너.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은 과거 주말의 명화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배우가 나온 영화를 몇 편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와 “마담 X”가 바로 그것이죠. 둘 다 눈물샘을 확실히 자극하는 영화로 이 두 영화에서 라나 터너는 다 큰 자녀를 둔 어머니 역할로 나옵니다. 저도 이 두 영화를 대강 본 기억은 나고, 그래서 저의 기억 속 라나 터너는 어딘지 중년 여성. 어머니상.. 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 그녀의 작품을 보니 명불허전. 남, 녀 배우 모두 금발보다는 흑발을 좋아하는 저로서도 홀려버릴 만큼 흠잡을 데 없는 매력을 지닌 배우였습니다.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단순히 제임스 M. 케인의 추리소설이 원작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아주 아주 좋아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동시대를 살아간 라이벌? 비슷한 관계의 추리소설 작가라는 점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는 작품이길래 이렇게까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일까? 한 궁금증 때문이었죠.
내용은 오늘만 살자 주의인 주인공 프랭크는 숙식제공을 조건으로 스낵바가 있는 주유소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잠깐 가게 사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프랭크의 발밑으로 립스틱이 하나 굴러와서 주웠을 뿐인데...
그렇게 그 둘은 만납니다. 립스틱의 주인은 사장의 아내인 카라, 바로 라나 터너죠. 짧은 반바지에 하얀 헤어밴드를 한 라나 터너의 등장 씬은 임팩트가 대단하더군요. 원초적 본능의 취조실 장면에서 샤론스톤이 올백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것은 이 영화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제 눈에 남주는 좀.. 생각보다 귀엽다고 해야 하나, 유약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싶은 인상이라 의외였습니다. 잭 니콜슨 같은 센 이미지를 기대했기 때문일까요. 그래도 계속 보다 보니 별생각 없이 사는 건달 역할을 잘 소화한 것 같았습니다.
일단 카라도 처음부터 악녀가 될 생각은 없었는지, 자신의 마음이 프랭크에게 끌리는 것을 경계하여 프랭크를 고용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일부로 까칠하게 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 당시 영화가 화끈한 건지, 이 당시 사람들이 더 솔직했던 건지 영화는 시작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둘의 관계가 급진전됩니다. 남자는 대놓고 유혹하고, 여자는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눈치 없는 남편의 방관에 힘입어 넘어가고 말죠. 여기서 남편 참... 부인을 믿는 건지 무심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예 바람나라고 등을 떠밀더군요. 카라는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려 합니다만 남편이 도통 협조를 안 하네요.
어쨌든 불륜이든 살인이든 옆구리 쿡쿡 찌른 것은 남자 쪽이었고,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여자입니다. 사고사로 위장해서 남편을 죽이려 시도하지만, 갑자기 찾아든 불청객 고양이, 경찰 그리고 정전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 미수에 그치게 됩니다. 수사팀은 뭔가 수상함을 감지하지만, 딱히 증거는 없습니다. ‘예쁘고 늘 뭔가를 꾸미는 고양이는 결국 완전히 시체가 되어버렸다.’며 중간중간 불청객 고양이에 대한 경찰의 언급은 여주인공 카라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 같습니다.
잠시 후 부상만 입었던 남편은 완전히 회복하고, 경찰의 의심을 두려워한 이들은 여기에서 계획을 중단하지만 남편은 가게를 팔아버리고 자신의 누나와 합가 해서 전신마비 누나의 병간호를 카라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카라를 위해 프랭크는 음주운전 사고를 위장한 완전 범죄를 실행합니다. 고전 영화답게 살해 장면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사고 이후 계속 이들을 주목해온 검사는 이번 사고도 이들의 범행임을 확신하고, 프랭크를 계속 압박합니다. 이 과정에서 범행의 또 다른 숨은 동기가 드러나죠. 바로 프랭크는 모르고 있었던 만불짜리 보험증권인데요. 여태껏 카라가 자신에 대한 마음 때문에 남편을 살해했다고 알고 있었던 프랭크는 충격을 받고, 이로 인해 이 둘에게는 균열이 생깁니다. 검사는 카라가 남편과 프랭크 둘 다를 살해하고 혼자 돈을 차지하려 했다는 방향으로 몰아 프랭크로 하여금 카라를 고소하게 만들죠.
이제 공범자에서 피해자, 가해자 관계가 된 둘. 카라 역시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하고 다 죽자는 심정으로 죄를 자백하려 하지만, 변호사의 영악한 전략으로 사태를 역전시킵니다. 심증 말고는 별다른 증거도 없고,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과 호남 용의자의 조합은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죠. 어이없게도 검사와 판사는 금방 합의를 하고, 이들은 과실치사이지만 집행유예 같은 것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보험금을 통해 가게를 확장시킨 카라. 중간에 협박범으로 인한 위기가 생기기는 하지만 가볍게 해결됩니다. 어쨌든 재판 덕분에 카라는 셀럽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가게도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하지만 이들은 행복하지 않죠. 서로를 의심하느라 잠도 못 이루는 데다가 다른 이성에게 한눈까지 팔게 됩니다. 결국 프랭크의 외도로 인해 폭발한 카라는 프랭크를 죽.....이지는 않고 의외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눕니다. ‘사실은 외도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당신밖에 없다. 아이가 생겼다. 한 생명이 태어나면 다른 생명을 앗아간 것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등등.. 이들에게도 죄책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카라와 프랭크는 다시 한번 잘해보기 위해 바닷가에 놀러 가고, 거기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프랭크의 운전 중 한눈을 팔아 사고가 나고 카라는 사망합니다. 카라의 사망 장면 역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맨 처음 프랭크에게 굴러갔던 그 립스틱이 축 늘어진 그녀의 손에서 떨어집니다. 프랭크와 카라의 시작과 끝에는 굴러다니는 립스틱이 함께하네요. 이 사망 장면은 저에겐 ‘차이나타운’에서의 페이 더너웨이의 사망 장면에 이어 가장 마음에 든 표현이었습니다. 안타깝고 애잔합니다.
카라는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금발의 팜므파탈(‘보디 히트’의 캐서린 터너나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같은)과는 결이 다른 살인범입니다. 저들이 서늘하고, 머리 좋고, 누구나 유혹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초인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라나 터너의 카라는 늘 안절부절못하고, 오히려 유혹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인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아슬아슬하죠.
아무튼 카라는 사망하고, 이번에는 빼박 카라의 살인 누명을 쓰게 된 프랭크. 아무리 자신은 억울하다고 외치지만, 갑자기 카라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물증이 발견됩니다. 이러니 카라의 죽음이 과실치사로 판결되더라도 어차피 프랭크는 다시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될 겁니다. 이 시대에 살인 유죄를 받으면, 사형으로 거의 직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즉 프랭크는 카라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도 죽게 될 처지에 처한 거죠.
여기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프랭크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죠. 꼭 받아야 하는 편지를 받은 셈이라고요. 포스트맨은 벨 소리를 못 들어서 편지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벨을 꼭 두 번씩 울리기 때문에, 행여 편지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편지를 외면하고자 도망 다닌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죠. 벨이 몇 번씩 울리더라도 편지는 반드시 편지의 주인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카라도 프랭크도 기어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는 행동의 대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전 인간의 숙명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카라와 프랭크는 처음 남편을 살해하려 시도합니다. 거기에서 첫 번째 벨소리를 듣죠. 그러나 이는 미수에 그치고 그들은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묻어버리고 각자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치 두 번째 벨소리를 들은 듯이 그들은 기어코 다시 만나 범행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포스트맨은 속죄를 위한 벨도 가차 없이 두 번 울려서 죽음의 편지를 둘에게 전달합니다. 마치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이 모든 것을 깨달은 프랭크는 감옥을 찾아온 신부에게 설령 지옥에 가더라도 카라와 함께 있도록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살인범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뭔가 낭만적이지 않나요? 신세를 완전히 망쳐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옥마저 함께 하고 싶다니... 이 둘은 범죄자 커플이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벌 작가인 레이몬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아’에서도 결말은 진심 어린 애정으로 마무리되죠. 사이코패스들이 난무하는 요즘 스릴러들을 보다 보니 이런 고적적인 설정은 오히려 신선하게 와닿더군요.
다시 라나 터너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는 라나 터너가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영화는 아닙니다. 원작이 탄탄한 데다가 연출도 좋습니다. 연기는 오히려 남주 쪽이 더 노련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라나 터너의 영화입니다.
얼핏 보면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비정한 악녀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 속 카라는 사랑에 빠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어설프고 위태로운 여자입니다. 이 때문에 어찌 보면 매력이 반감될만한 요소들이 은근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카라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냅니다. 외모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라나 터너의 연기는 평이 엇갈렸던 것 같습니다. 더 치명 치명한 느낌의 악녀를 원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라나 터너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영화 중간에 보면 카라가 혼자서라도 남편을 죽일 듯이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을 본 프랭크는 이거 도저히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듯이 그녀를 도와 살인 계획을 세우죠. 바로 이 부분에서 뭔가 어설픈 듯 위태로운 라나 터너의 연기는 남자가 자발적으로 지옥의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갈 만한 명분을 부여하죠.
라나 터너 이후 등장한 아름다운 두 명의 금발 배우는 바로 ‘현기증’의 킴 노박, 그리고 이제는 그 이름마저 보통명사 급의 전설이 되어버린 마릴린 먼로입니다. 킴 노박이야말로 샤론 스톤이랑 꽤나 비슷한 이미지의 차도녀 그 자체이고 마릴린 먼로는 스윗하고 부드러운 관능미가 돋보이는데, 신기하게도 라나 터너는 이 둘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느낌, 그러나 부드럽고 정숙한 이미지. 이러니 상대방이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게 와닿죠.
피해자와 가해자를 넘나드는 연기는 안소니 퀸과 공동 주연한 ‘검은 초상’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지만 아직 이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보게 되면 바로 리뷰 올리려고요.
글을 너무 주인공 배우의 이야기에 많이 할애한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제목을 참 잘 지은 작품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제목 때문에 안 보신 분들의 많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죄를 수수께끼나 재미 형태가 아닌, ‘죄’ 자체의 측면으로 접근한 영화로서 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진실한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러나 질척거리지는 않게 다가오는 수작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