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의 미국,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우연히 마주친 덩치에게 이끌려 강제로 함께 술자리를 가지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머로이, 은행 강도로 8년을 복역하고 나와서 ‘벨마’라는 전 연인을 잊지 못하고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이 바는 벨마가 예전에 일하던 곳이죠.
이제 흑인들 전용 바로 변한 이곳에서 머로이는 바의 주인에게 벨마의 행방을 묻는 과정에서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는 경찰에 쫓기게 되고 덩달아 조사를 받던 필립은 경찰에게 도리어 벨마라는 여성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됩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벨마를 찾으면 머로이의 행방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의뢰를 수락한 필립은 벨마가 일했다던 바의 옛 주인을 찾아가는데, 주인은 사망하고 할 수 없이 그의 부인, 제시 플로리안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시에 의하면 벨마는 아름다운 빨강 머리의 쇼걸이었는데, 현재 사망했다고 하죠.
자, 이제 벨마의 사망으로 의뢰 내용은 대강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필립에게 린제이 마리오라는 남자에게 새로운 의뢰가 들어옵니다. 의뢰 내용은 불륜 관계인 여자 친구가 고가의 목걸이를 도둑맞았는데, 보석 갱들 측에서 목걸이를 헐값에 찾아가라는 제안을 해왔기에 거래 현장에 보디가드로 동행해달라는 것이었죠.
이에 거래 장소까지 린제이와 동행한 필립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고 기절해버리고,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필립은 우연히 린제이의 시체를 발견한 앤 리어든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앤은 정직 경찰의 딸로서 사건에 상당히 관심을 보입니다. 물론 살인사건이다 보니 경찰이 개입을 하게 되고요.
이번에도 역시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는 필립. 경찰에서는 목걸이 도난 사건이 갱들과 린제이의 공모라고 의심하지만, 필립 입장에서는 찜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보디가드 의뢰를 하고 선금까지 지급한 의뢰인을 지키지 못해 결국 살해당하게 되어 버렸으니, 그의 탐정으로서의 본능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찰은 살인 사건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 경고를 하지만, 이미 발동이 걸려버린 필립은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합니다. 이런 그에게 앤 리어든이 찾아와 두 가지 단서를 주게 되는데요. 하나는 린제이와 묘한 관계를 가졌던 목걸이의 주인이 방송국을 소유한 갑부의 아내 루인 로크리지 그레일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린제이의 사체에서 빼돌린 담배 안에서 줄스 암사라는 신경전문의의 명함이 나온 것이죠.
필립도 나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가 벨마 건으로 방문했던 제시 플로리안의 집이 린제이에게 저당 잡혀 있었으며, 심지어 제시가 린제이의 가정부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죠.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해왔던 두 사건의 연결고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정말 이 두 사건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을까요?
머로이에게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 필립은 그의 죄는 그저 ‘검둥이’를 한 명 죽인 것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치부합니다. 흐음... 이 소설에 몇몇 인종차별적 요소가 눈에 띄는데요. 필립이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캐릭터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지, 작가가 실제로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편하게 넘어가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네요.
아무튼 필립은 그레일 부인을 보게 됩니다. 정확히는 그녀의 사진을 보게 되죠. 상당한 미모의 금발 여성. 조금 전에 벨마의 사진을 보다가 그레일 부인의 사진 장면으로 넘어가는데요. 사실 추리물을 조금 보신 독자분들이라면 여기에서 벨마가 누구인지 눈치채실 수 있습니다. 곧이어 그레일 부인과 실제로 대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서도 진 히로인의 등장임을 느낄 수 있죠. 김이 샌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엄청난 팜므파탈의 첫 등장 장면으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전개였습니다. 적어도 저는 꽤 마음에 들었어요.
그레일 부인은 필립에게 도난당한 목걸이를 찾아달라고 의뢰를 합니다. 이 장면에서 앤 리어든도 함께 있는데, 두 명의 여주가 벌이는 신경전, 그리고 서로를 유혹하는 필립과 그레일 부인의 장면들도 고전적이지만 재미있습니다. 서로를 찔러보다가 밀당 없이 바로 진행되는 유혹 방식이 요즘 세대들이 보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듯도 하고요.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젊은 시절의 게리 올드먼과 샤를리즈 테론, 캐리 멀리건이 각각을 연기한다고 상상하며 읽었습니다. 실제 영화에서는 로버트 미첨과 샬롯 램플링이 연기했더군요.
여기서 그레일 부부의 관계도 범상치 않은데, 60이 넘은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러도 내버려 둡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아내를 잃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하는 느낌인데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성품 같은데 뭔가 안타깝더군요.
필립은 그레일 부인과 썸을 타면서 희생자의 담배에서 발견된 명함 주인인 줄스 암사를 찾아갑니다. 이 과정에서도 역시 인디언에 대한 편견 어린 묘사들이 있는데, 이 당시 미국 마초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나 봐요. 어쨌거나 우리의 상남자 필립은 줄스에 의해 강제로 약물이 주입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머로이를 숨겨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요.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아챈 필립은 가까스로 그곳을 탈출하고, 린제이와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제시 플로리안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이미 머로이에게 살해된 제시의 시체였죠.
머로이는 이제 두 명의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상태와 기타의 정황 상 머로이는 실수로 제시를 죽이게 된 것 같지만, 그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죠. 필립은 일이 이렇게 꼬여만 가는 머로이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냉소적이고, 이성에게 절조도 그다지 없어 보이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이지만, 한번 마음에 들거나 동정을 느끼는 상대에겐 상당히 의리를 지키는 인물인 듯합니다. 꽤나 매력 있는 캐릭터예요.
조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규모는 점점 커집니다. 경찰, 병원장, 방송국 사장, 보석 갱단 등이 모조리 개입된 사건이 보통의 사건일 리가 없죠. 필립은 하드보일드 느와르 소설의 주인공답게 행동으로 돌진합니다. 마치 한 마리의 작은 벌레가 벽을 타고 목표지점까지 올라가는 것처럼, 여기저기 위험천만 요소를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 그는 사건이 발생한 도시, 베이 시티에서 밤의 대통령 급으로 통하고 있는 도박장 운영자 ‘블루넷’을 찾아가게 됩니다.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그라면 이러한 규모의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리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죠. 머로이의 일을 모른 척하는 그에게 다짜고짜 쪽지를 건네며 혹시라도 머로이를 만나게 된다면 전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그레일 부인과 만나자는 약속을 잡죠.
먼저 필립을 찾아온 사람은 머로이입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레일 부인이 찾아오고요. 쫓기던 신세인 머로이는 다급하게 몸을 숨기고, 필립은 그레일 부인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담담하게 말해줍니다.
이 사건은 범인이 머로이가 탐정인 필립에게 벨마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고 착각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필립은 제시를 방문하고, 벨마가 사망했다고 둘러댄 제시는 자시의 전 고용주 린제이에게 필립에 대해 이야기했죠. 범인 입장에서는 사건을 캐고 다니는 필립과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내연남 린제이 모두가 골칫거리가 됩니다. 이 둘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목걸이 도난 사건을 만들어 낸 거죠. 린제이에게 필립을 살해해달라고 의뢰를 하고, 린제이는 이를 위해 필립을 일부로 고용합니다. 그러나 린제이는 필립을 제대로 살해하지 못했고, 그 자신은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 겁니다. 필립이라는 존재가 계속 거슬린 범인은 그를 유혹하는 동시에 처리하려고 계속 시도하였고, 그 사이 머로이는 벨마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실수로 제시를 살해합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죠. 그리고 범인인 벨마, 즉 그레일 부인이었던 겁니다.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낸 그레일 부인.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머로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벨마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죠. 8년 전 자신을 밀고하여 감옥살이를 시키고,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도 않았으며, 그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히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던 그녀. 그러나 머로이는 진심으로 벨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온전히 용서하려고 합니다. 벨마의 총에 맞아 숨지기 때문에 결국 그녀에게 용서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요. 오랜 세월에 걸쳐진 한 남자의 순정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벨마는 도망치고 경찰에 쫓기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 지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결국 경찰에게 덜미가 잡힌 그녀는 자신을 체포하려던 경찰을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된 후 필립은 사건에 대해 상념에 잠깁니다. 그는 생각하죠. 벨마는 뛰어난 미인입니다. 배심원들에게 동정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외모죠. 거기다가 그녀에게는 나름의 동기도 있습니다. 연인의 범죄로 절망에 빠진 한 여자가 가까스로 생활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전 연인이 나타나 그녀를 위협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더욱이 그 남자는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인 살인자. 그녀가 그를 쏘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재판을 유리하게 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일류 변호사를 구해주고, 기자들을 구워삶아 여론의 방향을 바꿔버릴 수 있는 돈 많고, 착하고, 그녀에게 푹 빠져있는 남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미국 추리소설계의 거장 레이몬드 챈들러의 최고 걸작인 동시에, 그 빼어난 문학적 표현은 추리소설의 범위를 넘어서, 전체 소설의 범주를 통틀어 보아도 손에 꼽힌다고 칭송되는 명작 소설입니다.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 결말부에 드러난 벨마의 진심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벨마가 머로이와 어떤 연애를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녀가 그레일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죠. 그 수많은 불륜 상대 중 진심인 상대가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돈 많고 나이도 많고 나약하고,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왔고 앞으로도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남편. 그녀의 체포로 인해 그레일의 평판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온갖 가십에 시달리겠죠. 돈과 시간과 명예를 모두 쏟아 버려야 할 일만 남은 그레일. 벨마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선택은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른 삶을 살게 해 준 남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사는 이런 필립의 생각을 반박합니다. 그녀는 결코 그런 희생을 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맞습니다. 벨마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좋은 여자? 갱생의 여지가 있는 여자? 둘 다 아닙니다. 그러나 필립은 그것을 확신하죠. 벨마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레일을 철저하게 이용해왔더라도,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벨마의 진심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벨마의 이해가 가지 않는 그 최후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요.
안녕 내 사랑아... 는 누구를 향한 대사였을까요? 머로이가 벨마에게? 벨마가 그레일에게? 머로이는 전과가 있는 연쇄살인범이며, 벨마는 철저한 악녀입니다. 그러나 필립은 이들이 밉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 참 허망하고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마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수하는 모습을 애틋하게 생각합니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제목의 대사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벨마는 작품 내내 단 한번도 진심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이전에 리뷰한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주인공 카라와는 결이 다른 철저한 팜므파탈인 거죠. 하지만 그녀는 하드보일드의 주인공답게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살해하고,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덧붙일 게 있을까 싶네요. 하드보일드 계의 대가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대표작으로 그의 페르소나 격인 필립 말로우가 등장하는 2번째 소설입니다.
하드보일드란 완숙한 계란이 단단하다는 데에서 착안된 용어로 비정한 사실주의 소설 장르를 일컫는 말이죠. 폭력이나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건조합니다. 인물들의 성격도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요. 그래서인지 하드보일드에 등장하는 주인공, 탐정 역시 ‘정의를 수호하는 우리의 영웅’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한편에서 보면 범죄자 역시 타고난 악마나 사이코패스 느낌이 아니고요. 양측 다 길게 늘어선 인간의 성격의 스펙트럼에서 평균보다 조금씩 좋은 쪽, 나쁜 쪽으로 기울어진 정도랄까요.
어찌 보면 주인공도, 악역도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작품 속 갈등에 상당히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사건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이 냉정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애초에 사회의 어두운 속성을 바라보는 장르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어둠이 딱히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하긴 그래서 이 장르를 느와르라고 부르기도 하죠. 하드보일드와 느와르는 비슷한 듯 하지만 소소한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제가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담 번에 기회가 되면 좀 더 공부를 해서 다뤄보겠습니다.
글이 길어졌는데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저는 하드보일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재미도 감동도 덜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돈되지 않은 듯한 전개 방식도 괜히 버거웠고요. 이 작품을 보기 전에는요. 네. 과거의 일입니다. 하드보일드를 안 좋아하던 것은.
별로 구미에 당기지는 않는데 하도 유명해서 본 작품인데, 제 마음속에서는 대박을 쳐버렸습니다. 이래서 편식은 안 좋은가 봅니다. 벨마와 머로이의 뒤틀린 사랑에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특히 벨마... 그레일은 벨마의 마음을 알기는 할까요? 그에게 유언 한마디 안 남기고 그렇게 허무하게? 심플하게? 떠나버린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드보일드에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던 예전의 제 모습이 후회되더군요. 추리소설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마음이 뒤흔들릴 줄이야...
전에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리뷰한 적이 있죠.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역시 하드보일드 소설을 대표하는 명작인데요. 그 소설의 저자 제임스 M. 케인 역시 레이먼드 챈들러와 동시대에 활약한 거장이라 이쪽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셔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작품은 얼핏 보면 남 녀 간의 그릇된 사랑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본질은 인간의 업보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작품은 연쇄살인사건을 주 내용으로 하면서 사랑,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었던 사랑이 주제라는 점인데요. 비정함의 끝판왕 장르인 하드보일드계의 대표작들임에도 꽤나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도 수준급의 하드보일드 소설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이런 감성이나 낭만은 옛 소설 쪽이 한수 위인 듯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필립 말로우는 여전히 벽을 타오르고 있을 작은 벌레와 더 먼 곳으로 가버린 벨라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각자의 벽을 타오르고 있을까요? 평생을 바쳐도 빌딩 꼭대기까지, 아니면 그저 3층 창문까지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며 타오르고 싶었던 것. 지키고 싶었던 것. 용서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죠.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죽어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나 자기 색깔이 분명한 악역들이라니... 그래서 이 작품이 저에게는 이토록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