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편
모든 것은 ‘코미디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코미디언’은 대략 1930~40년대에 활약하던 미국의 1세대 히어로 중 한 명입니다. 은퇴 후 정체를 숨기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던 그를 누가, 왜 살해했을까요?
뭔가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었음을 눈치챈 경찰은 사건을 대강 종결하려고 하지만, 주인공 로어셰크는 이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독자적으로 사건을 수사해 나갑니다.
로어셰크(Rorschach)에 대해서는 부연이 조금 필요한데, 그는 2세대 히어로 ‘크라임 버스터즈’의 멤버로 잉크 얼룩무늬 가면을 쓰고 다니기 때문에 로어셰크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 잉크 무늬는 심리검사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되는 검사 도구인데요. 종이에 잉크를 떨어뜨린 후 반으로 접어서 무늬를 만든 후,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지를 대답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기법입니다. 이 검사방법을 흔히들 ‘로샤 테스트’라고 하는데, 왓치맨에서는 로어셰크라고 부르더군요.
그 누구보다 가치관이 명확한 인물인 로어셰크가 잉크 무늬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쩌면 왓치맨의 세계관을 암시하는 것 같긴 하지만요.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나 가치 기준.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은 세상 등을 말이죠.
각설하고, 코미디언이 살해당한 이유가 전직 히어로였기 때문이라고 여긴 로어셰크는 이미 은퇴하여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동료 히어로들을 찾아다니며 수사를 이어갑니다.
맨 처음 만난 사람은 대니얼, 전직 히어로 ‘나이트 아울’입니다. 그는 은퇴 후 정체를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워낙 금수저 출신이라 딱히 생활에 불편이 없는 그는 선량하고 차분하지만 어딘지 우유부단하기도 한 면모가 있습니다. 요 밑에 소개될 로리 저스페직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바이트, ‘오지맨디아스’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던 히어로로서 전직 히어로였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과 관련된 굿즈 등을 판매하여 큰 수익을 올리고, 현재는 거대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거물급 CEO입니다. 큰 성공을 이룬 만큼 배짱도 두둑하고 머리가 상당히 좋은 인물입니다.
세 번째는 신과 비견될만한 초능력을 지닌 닥터 맨해튼, 본명은 존 오스터맨입니다. 프린스턴에서 원자물리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연구소 근무 시절 실수로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원리에 의해서인지 사망한 그의 신체는 점차 재생하여 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됩니다. 물 위를 걷거나 바다를 가르는 장면까지는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신과 가까운 지능과 예지력, 자기 자신과 타인, 사물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키거나 분해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죠.
사고 이후의 그에게 인간적인 감정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여전히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고 있고, 연인도 있지만 그의 사고는 늘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방관할 뿐이죠. 그에 대한 전 연인의 평가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아요. 인간을 제외하고 말이죠.”
네 번째는 로리 저스페직,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실크 스펙터’라는 이름의 히로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과거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어 보이네요. 닥터 맨해튼의 연인이지만, 그의 인간미 없는 모습이 질려 지금은 헤어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1세대 히로인이었으며, 현직 시절 코미디언으로부터 신체적 폭행과 성폭행을 당할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코미디언을 혐오하고 있었으나 로어셰크는 이 사건에 대해 “애국자의 ‘일시적 타락’”이라고 단정 지음으로써 그녀의 분노를 사게 되죠.
방금 소개한 이들이 2세대 히어로들로서 1977년 제정된 킨 법령에 의해 강제로 활동이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의 삶을 묻어두고 제2의 인생을 무난하게 이어나가고 있지만, 로어셰크는 다릅니다. 그는 여전히 이 사회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죠. 그는 스스로를 왓치맨이라 생각하며, 마치 다크 나이트와 같이 사회를 수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민들이 그의 보호를 체감하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에게는 그것이 사명이자 숙명인 것이죠.
사건을 조사하던 로어셰크는 코미디언이 우연히 어떤 거대한 음모에 대해 알아챘고, 이로 인해 살해되었음 알게 됩니다. 한편 닥터 맨해튼은 자신의 연인의 암 선고 소식에 충격을 받고 화성으로 휴가를 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 연인뿐만 아니라 자신과 과거에 관계되었던 사람 중 무려 20명 가까이가 암으로 인해 사망 혹은 투병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모처럼 인간적인 상념에 잠겨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한창 미국-소련 간 대립으로 인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는 거죠. 미국을 압도적 우위에 위치하게 만들었던 닥터 맨해튼이 없는 지금, 소련의 군사적 도발을 우려한 미국은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로어셰크는 생각합니다. 역대 히어로들 중 한 명인 코미디언은 살해당했고, 닥터 맨해튼은 충격을 받고 지구를 떠났습니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하나씩 몰아내고 있다면? 일단 러시아 정부의 테러일 확률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뭔가 찜찜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바이트 살인 미수 사건이 발생합니다. 말이 미수이지, 현장에서는 그를 대신해 비서가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일어난 살인사건. 조사를 계속하던 로어셰크는 진범의 함정에 빠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당합니다.
여기에서 로어셰크의 과거가 등장합니다. 본명은 월터 조셉 코백스. 윤락여성인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해왔고, 주변의 또래들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약자에게 자행되던 뒷골목의 폭력이 질린 그는 살해당한 젊은 여성이 버린 옷을 손질해 로어셰크의 가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면이 바로 자신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약하고 추한 코백스가 아닌, 강하고 아름다운 로어셰크가 자신의 본질이라고 말이죠.
이런 그를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킨 법령에서 히어로의 활동을 금지하든 말든 그는 계속해서 뒷골목 자경단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로어셰크마저 체포된 상황에 로리와 대니얼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 각국에 소규모 테러와 전쟁이 발생하고 있고, 사회는 각종 범죄로 들끓습니다.
이대로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가? 냉혹해진 인간성에 대해 비애를 느끼며, 이것 저것 다 놓고 도망치고 싶어 집니다. 둘 사이에는 애정의 기류가 흐르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관계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불안감과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 둘이 선택한 돌파구는 다시 히어로가 되는 것입니다. 킨 법령이고 뭐고 다시 가면을 쓰고 복장을 갖춰 입습니다. 로리가 만든 비행정을 타고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과거의 영광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깨닫죠. 히어로가 된 그들에게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고나 테러, 범죄 등은 죽을 만큼 압박을 주는 위협이 아닌, 해결 가능한 사건일 뿐이라는 것을요.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은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누명을 쓴 로어셰크를 구하러 출동합니다. 마침 로어셰크는 그의 자경단 활동으로 인해 잡혀온 범죄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까스로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세 사람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리죠. 일단 경찰을 피해 은신처로 이동하려고 할 때 갑자기 닥터 맨해튼이 로리를 찾아와서 자신과 화성으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가 이런 뜬금없는 제안을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요. 닥터 맨해튼에게는 예지능력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즉 그는 향후 인류가 대규로 전쟁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로리가 자신에게 인류를 구원해달라는 부탁을 할 것이란 것을 미리 예견하고, 이를 거절하기 위해 로리와 대화를 하려는 것입니다.
로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닥터 맨해튼은 과거 연인들의 죽음에 이어 로리와의 관계마저 단절아 되자, 더 이상 인류와 자신과의 연결고리는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인류는 하등의 쓸모도 없으며, 수명도 짧은, 무의미한 존재들이죠.
그의 예측대로 로리는 그를 설득하고, 부탁하고, 애원합니다. 인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들을 구원해주기를요. 그러다가 결국 그녀는 자조적으로 외치죠. 마음대로 하라고, 어쩜 맨해튼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니 자신의 인생은 한낱 코미디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요. 그녀가 이렇게 부르짖은 이유는 바로 자신이 코미디언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성폭행을 한 데다가, 딱 한 번뿐이었다며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그 타락한 영웅의 딸.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닥터 맨해튼이 마음을 바꾼 것이죠. 단 한 번의 강제적인 관계에서 생겨난 딸. 하지만 그 단 한 번을 통해 10억 개의 정자들이 하나의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고, 이를 통해 한 생명이 성공적으로 잉태된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로리라는 존재는 먼 조상 세대로부터 이러한 확률게임이 무수히 많이 발생하여 이루어진 ‘열역학의 기적’ 그자 체라는 것을 말이죠. 로리는 묻습니다. “나의 탄생이 열역학의 기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닥터 맨해튼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죠. 모든 인간이, 인류 자체가 기적의 산물이라는 것. 다만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아서 우리 스스로가 그 기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것을 깨달은 닥터 맨해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요.
한편 지구에서는 다시 나이트 아울이 된 대니얼과 로어셰크가 히어로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이트 살인미수 사건을 조사하던 중 킬러들을 고용한 회사에 대해 알게 됐고, 그 회사가 바이트, 즉 오지맨디아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범인이 바이트일 것이라고 직감한 나이트 아울과 로어셰크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오지맨디아스의 남극 은신처를 향합니다. 로어셰크는 말하죠. 타협 없는 인생, 후회도 없었다고요.
바이트, 오지맨디아스는 두뇌가 비상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미치 예측이나 했던 것처럼 나이트 아울과 로어셰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 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하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는 재력과 강함이 있습니다.
그의 계획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전에 고 노회찬 의원께서 이런 발언을 하신 적 있으시지요. “우리나라와 일본이 사이가 안 좋지만, 외계인이 침공한다면 힘을 합쳐 싸우지 않겠느냐.”고요.
오지맨디아스 역시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 위협 등에 진절머리가 난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식의 대응, 즉 가장 강한 국가가 승자독식 형태로 지구를 사실상 지배하게 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고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외계의 생명체가 지구를 공격할 것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상호 협력을 하게 하려는 것”을 목표로 남극의 은신처에서 이식된 두뇌를 갖춘 거대 괴물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미디언의 죽음은 이를 눈치챘기 때문에 그가 직접 나서서 살해한 것이었고, 이 외에 이 계획에 동참한 인물들, 과학자들, 인부들을 모두 몰살시켜버렸습니다. 이제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지맨디아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히어로들 뿐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느냐며 반신반의하던 나이트 아울과 로어셰크에게 오지맨디아스는 말합니다. 이미 뉴욕 한복판으로 그 괴물을 순간 이동시켰다고요. 순식간에 뉴욕은 초토화가 되었고, 이제 오지맨디아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닥터 맨해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지맨디아스는 타키온 입자를 전송시켜 닥터 맨해튼의 예지능력에 일시적으로 타격을 준 뒤, 그가 처음 사고를 당했던 진성장으로 유인해 다시금 그의 몸을 분해시켜버립니다.
하지만 닥터 맨해튼은 다시 자신의 몸을 재조립하여 부활하여 오지맨디아스를 제압하려고 다가갑니다. 그때 각 방송사별 뉴스 속보가 쏟아져 들어오죠. 너무나 참혹한 뉴욕의 모습에 놀란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는 동시에 일단 타국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내용에 관한 것을요.
히어로들은 대 혼란에 빠집니다.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은 잔인하고 참혹했지만, 어쨌거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닥터 맨해튼 역시 지금으로서는 오지맨디아스의 결정이 합리적이었으며, 이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는 것만이 그나마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고 인정니다. 나이트 아울과 로리, 실크 스펙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지만 로어셰크는 단호합니다. 그가 평생을 바쳐서 지켜왔던 뉴욕의 뒷골목이, 비록 타락하고 더럽고 그에게 상처를 줬지만, 그렇기에 그가 더 지키고 싶어 했던 뉴욕의 아이들이 이런 ‘망할’ 유토피아를 위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을 그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그를 닥터 맨해튼은 ‘합리적 판단’에 의해 제거해버립니다.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는 더 이상 이러한 혼란과 비극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미루고, 단지 현재 자신들이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만을 느끼려고 합니다.
다시 외계 행성으로 떠나려는 닥터 맨해튼에게 오지맨디아스는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한 일이 옳은 것이 맞느냐고요. 닥터 맨해튼은 대답하죠. 끝은 없을 것이다. 결국 인류는 다시 전쟁을 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이토록 큰 희생이 가져올만한 영원한 평화라는 것은 없을 것이란 것을요. 흠... 그렇다면 오지맨디아스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작품은 마지막에 다시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추며 끝이 납니다. 로리와 대니얼이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네요. 그리고 로리의 어머니 1세대 실크 스펙터가 어쩌면 코미디언을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닐까 하는 듯한 묘한 여운을 남겨주네요.
하아... 이번 리뷰는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을 다룬 작품에서 이렇게 현실적인 참담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왓치맨은 제가 손에 꼽는 명작이며 상당히 재미있게 본 작품이지만, 리뷰를 위해 세세히 뜯어보기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리뷰는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여기서 마무리를 하고요. 후속 편을 통해 캐릭터 몇 명의 분석과 전체적인 감상을 덧붙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