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아니 근데

by 최글른

고양이의 사체를 보았다. 하교 시간이었다.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4차선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한꺼번에 켜질 때 중앙에 드러누운 작은 고양이를 못 본 이는 없으리라. 차 안의 운전자도, 학교 가방을 멘 아이들도,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도, 건너편 흡연중인 남자도.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그 사정은 아마 고양이 자신도 알지 못했으리라.

아스팔트를 달구던 햇빛이 아직 매섭던 시각이었다. 신호가 켜지고 다가가 아이의 목덜미를 집어 들자, 털은 뜨거웠고 몸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 열기는 고양이의 체온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열이었고, 그 무게는 짧은 생을 버겁게 견뎠을지 모를 생의 무게임을 오직 나만이 알았다.

혹여 모른다면 알아두길, 고양이의 사체는 구청에 전화하면 ‘데리러 온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조금 망설였다. ‘수거’라고 해야 하나 싶다가도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망설인 것도 아니다. 그냥 데리러 온다고 했다. ‘모시러 온다’라고 할까도 생각했으나, 그건 고양이보다 오는 이를 낮추는 말이지 않나. 물론 세상엔 가끔 고양이보다 못한 이들도 있다고, 아니다, 농담이다. 하, 사실 사실이다.

인간보다 마음을 주게 되는 존재들이 생긴다. 집 앞 소나무에 매일 인사하는 걸 믿겠는가. 학교 앞 울타리를 감싼 장미꽃을 며칠 간 못 보면 속으로 안녕을 빌게 되는 것도 믿겠는가. 때론 책 속의 마침표 하나에, 때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노랫말에 마음이 붙는다. 그들은 내게 애정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아끼고, 보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고, 단어 하나를 오래 씹기 위해 음절을 무한히 반복한다. 내게 이런 낭만이, 사랑이 있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루는 혼자 영화를 보고, 서점에 들르고, 카페에서 글을 쓰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문득 완벽한 하루였다는 생각에 휩쓸려 세상 모든 풍경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혹시 박애주의자가 아닐까 근엄하게 의심하다가, 벽화가 예쁘게 칠해진 담벼락 앞에서 노상방뇨하는 아저씨를 보고야 말았다. 노란 물줄기를 본 순간, 쓰잘데기 없는 의심을 한 내 자신이 우스웠다.

흠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나 또한 나의 흠에 괴로워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더랬다. 그러니 인간을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일이 훨씬 쉬웠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를 사랑하려면 품어 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했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데는 그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흠투성이임에도 어쩔 수 없이 경배하게 되는 것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는 것들. 그것들은 대체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 좀 더 솔직해지자. 나는 인간에게도 금사빠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녀석이 나다. 그런데도 왜 많은 이들을 혐오하는가.

혐오가 자유가 된다면 아마 가장 먼저 사라질 존재는 나일 것이다. 동양인에, 여성에, 만만하게 생긴 얼굴까지. 아마 며칠 위험한 길가를 다니다보면 혐오 범죄에 죽어나갈 것. 농담이다. 사실 사실이다. 때문에 난 혐오를 지양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말이다-

혐오는 쉽고 사랑은 어렵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둘 다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흔하지만,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드물다. 전자를 혐오하고 후자를 사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전자가 넘쳐난다는 것. 그래서 드문 후자들을 마주치면 나는 금세 사랑에 빠진다. (내게 함부로 정의와 친절을 보이지 마라. 사랑해 버릴 테니.)

한 번은 적당히 혐오하는 이와 길을 걷다 길고양이를 만났다. 그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에 그가 내게 말했다.

“와, 나도 저렇게 좀 봐주면 안 되냐.”

지랄, 적당히에서 완전한 혐오로 바뀌던 순간이다.

그래, 내 글이 늘 그렇듯 또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돌아가, 첫 문단, 내가 그 아기 고양이의 사체를 인도 가장자리로 옮길 때

지나가던 학생들은 박수를 쳤다.

장을 보고 오신 아주머니가 감탄을 했다.

구청에 전화를 마쳤을 즈음,

누군가 다가왔다.

“저, 혹시. 그게, 너무, 멋지셔서요. 전화번호 좀.”

그 모든 순간이 어쩐지 얄궂게 느껴지지 않던가. 세상이 밉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각박하다고, 예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의를 실천하려 애쓰는 내 앞에서 멀뚱히 서서 바라보다 박수만 치고 사라지는 이들이 달갑게 여겨지진 않았다. 더구나 한참 전부터 건너편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바라보던 그의 모습을 아는 내겐 더욱.

차가운 사체가 아닌, 오래도록 달궈진 고양이의 온도를 아는 내겐 더더욱.

맞다. 동물의 사체를 만지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옳은 행동을 알지만 회피는 쉽고 실천은 어렵다. 자신이 못하는 일을 선뜻 해내는 이가 얼마나 멋진지, 금사빠인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짧은 글은 아니었지만,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고 나니 깨닫는 건.

역시나 잘 모르겠다는 거. 내가 하는 것을 다른 이들도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혐오는 쉽고 사랑도 쉽다.

물론

정의는 어렵고 불의는 쉽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정의의 모양이 달라진다 해도, 옳고 그름이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불쾌감이 불쑥 치밀어 오를 때,

뉴스 기사를 접할때, 그들을 혐오하지 않으려 애쓰는 가끔 회의감이 든다.

대체로 그들은 자유롭게 혐오를 퍼붓는 이들이기에.

내 혐오를 정당화하고 싶은 유혹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타인의 혹은 나의)혐오감으로부터 부지런히 도망친다.

때론 넘어지더라도 부지런히 도망친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어쩌면 저 창밖을 지나가는 고양이를 위해서. 어쩌면 당신들을 위해서.

하지만, 우리 서로 사랑하자는 다짐은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다, 그래도 나 하나라도 해야하지 않겠나.

아니 근데 쟤네가 먼저.

휴, 모르겠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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