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적응은 유의어가 아닐까 고민하는 요즘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며칠 전 읽은 책 한 권 때문이다.
『어떤 호소의 말들』 - 최은숙
이 책에는 차별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쉽게 말해, 아주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는 차별을 들었을 때—그걸 그냥 흘려넘기거나, 웃고 넘기거나, 되짚어보느라 분노할 틈조차 없는 여성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여성’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분노할 누군가가 있겠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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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니까 밤늦게 다니지 말라’는 걱정이나 잔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여성과 남성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아르바이트 중 성희롱을 겪어본 사람은?
모두 경험했다고 해도, 그 횟수는 어땠을까.
이런 식의 질문을 해서 납득을 구해야 할까 봐 부연하는 것이지만, 사실 당신이 이해할 때까지 이 질문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귀찮아질 상황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첨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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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나는, 극심한 안전불감증을 가진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온갖 공포영화와 체험으로 단련된 심장, 그리고 수많은 범죄가 매일같이 일어나는데도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는 막연하고도 무지한 믿음이 그 이유다.
한국의 치안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그런 일들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바보 같고도 아둔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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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조차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공포를 느낀 건 고등학생 시절, 스터디카페에서였다.
공부를 하긴 싫고 괜히 늦게까지 남아 있던 20@@년 여름. (음, 맞을 거다. 하복이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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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쯤, 편의점을 가기 위해 2층에서 계단을 내려왔다.
커피우유를 하나 사서(그땐 아메리카노를 ‘걸레 빤 물’이라 불렀다. 지금은 샷을 두 번 추가하지 않으면 밍밍하게 느껴질 만큼 달라졌지만), 세계지리를 외우고 싶지 않아 건물 앞에서 빨대를 물기보단 질겅거리며 서성였다.
그때였다.
내 뒤편,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띵—’ 하고 동영상 촬영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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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 나는 나 자신의 안전에 굉장히 무지하다.
교복 차림의 하복, 비하의 의미로 쓰자면 ‘똥꼬 치마’까진 아니었지만 허벅지 반쯤 드러나는 치마 길이.
아무 걱정도 없이 뒤를 돌아본 순간, 허름하고 술에 취한 듯한 왜소한 남성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렌즈는 정확히 내 다리를 향하고 있었고, 내가 뒤를 돌자 그는 어리숙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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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하러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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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주한 곳은 엘리베이터 바로 앞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3초쯤 굳어버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드라마에서 교통사고 직전 멈춰 서는 인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여!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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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침은 당시의 내게 닿지 않았다.
몸은 마네킹처럼 굳고, 생각은 소용돌이쳤다.
움직여도 되나? 따라오면? 내 얼굴도 찍혔나? 화내야 하나? 핸드폰을 뺏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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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했고, 스터디카페로 돌아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짐을 챙기며 문득,
‘아직 아래에 있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자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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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날이 밝고 아침 6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갔다.
다행히 여름이라 해가 빨랐다.
물론, 그 4시간 동안 공부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겨우 선생님이 짚어준 나라 몇 개의 위치 정도만 눈에 들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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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이 이야기를 친구 D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 늦은 시간에 왜 돌아다녀.”
“치마는 왜 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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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들이 돌아올까봐.
그러게.
그 말을 듣기도 전에 떠올리며, 나는 왜 겁먹고, 걱정하고, 분노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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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야동 사이트에 들어가 본 적 없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들어가봤다.
무엇을 검색해야 할지 몰라 가장 흔한 이름을 입력했고, 그곳에서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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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몰카’, ‘교복’, ‘고딩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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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할 때마다 쏟아지는 썸네일들.
그걸 훑으며, 예전에 친오빠가 토를 했을 때보다 더한 역겨움을 느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었고, 핸드폰을 내던지고 싶었다.
폰을 끄고,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야동 사이트의 썸네일에 나의 나체가 떠 있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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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일 아침이 찾아온 것에 생전 두 번째로 안심했다.
첫 번째는, 그날 밤을 무사히 넘겼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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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마치 첫 코를 꿴 것처럼,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은 이어졌다.
말로 하기조차 껄끄러운 기억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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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반복되며 나는 차별 섞인 농담에 익숙해졌고,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가벼운 터치, 외모에 대한 지적, 모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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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런 나를 무던하다고 했다.
칭찬처럼 말하는 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고, 나는 각각에게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난 원래 이런 성격이야.”
“아냐, 나도 참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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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반복하다 보니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렸다.
정말 참는 걸까? 아니면, 괜찮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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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망각일까, 적응일까.
아직도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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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문득 마음 한 켠의 꾸러미에서 과거의 말들이 문장 그대로 튀어나온다.
그때야 깨닫는다.
내가 그것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거슬려 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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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아질까봐 덧붙이지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우리나라엔 두 부류의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인권 운동가와, 혐오로 물든 변형된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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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후자를 곱게 보지 못하고, 전자를 따르기엔 지식이 부족한 사람.
굳이 말하자면 전자를 응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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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글이나 쓰는 평범한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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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을 외친다고 해서 여성 혐오 범죄가 줄어든다는 말에는, 솔직히 아직까지 확신이 없다.
무지성으로 약자를 범죄 대상으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본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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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학적으로 여성은 ‘약자’로 분류된다.
그래서 나는, 그저 ‘조심해라’는 말이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소멸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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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다녔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책임은 오직,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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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나는 다시 안전불감증이 되었다.
술에 취해 새벽에 기어 들어가기도 하고, 산책이 하고 싶다며 새벽 세 시에 저수지를 향해 걷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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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말짱할 땐, 오빠가 사준 후추 스프레이를 손에 쥐고 다닌다.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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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바람을 즐기다 어둠이 짙은 골목이 보이면, 가로등이 많은 길로 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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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전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내가 왜 새벽바람을 즐기지 못해야 해?”
그 분노와 오기로, 나는 다시 밖을 나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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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망각일까, 적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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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망각인가, 적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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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적응의 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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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어는, 정말 유의어일까.
검색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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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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