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다정함의 무게

by 최글른

보통을 넘어선 다정함에는 감당 가능한 성실함이 공존해야 한다. 다정함을 펼치려면 여유가 필요하고, 때론 노동을 동반하며, 불편을 감수해야 할 피로도 따른다. 그러니까 다정함은 아무 때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


J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다정함이 가장 타고난 사람이다. 함께 대화하다 보면 그의 따뜻함에 깊이 감탄하게 되고, 나의 상식선을 벗어난 배려심에 다시 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무정한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는 그에게서 많이 배운다.


말했듯 나는 ‘무’척이나 ‘무’정한 인간이다. 무정, 무감, 무지, 무력… 다른 의미로는 무소유를 실천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다 무소유를 실천하게 되었는지는, 차차 다음 글에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그의 다정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런 순간이면 내 인성에 대해 개탄하며, 속으로 외친다. “죽어라, 나 자신. 네가 진정한 사회악이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라.”


대부분의 만남이 그렇다. 그가 다정함을 실천하면, 나는 속으로 나를 비판한다. 그러다 때때로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남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나쁜 거겠지, 하며 넘겼지만, 그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부스럼처럼 남았다. 밤이 되면 그 장면을 머릿속 상영관에서 반복 상영했다. 드르륵 탁. 다시 드르륵 탁. 대부분은 아침이면 잊히곤 했지만, 같은 장면이 다음 만남에서 반복되면 갑갑함도 반복되었고, 상영 시간도 배가되었다. 드르륵 탁. 드르륵 탁. 드르륵 탁. 아, 안 해.


해소는 딱 3년 만에 이루어졌다. 별일 없던 어느 날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카페에 가 책을 읽었다. J가 읽을 책은 내가 직접 골라 건넸고, 그는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나오면 내게 묻고는 성실히 나의 취미에 동참했다. 두 번이나 읽은 책이었는데, J가 어느 구절에서 그 기억을 떠올렸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는 시선을 책이 아닌 창가에 두고 있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효정.”

J는 사람을 부를 때 ‘아’나 ‘야’를 붙이지 않고 대뜸 이름만 부르는 습관이 있다.

“응?”

내가 대답하자, 그는 눈을 두 번 깜빡이고는 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술집에 가면 가끔 노인분들이 떡이나 엿을 팔러 오시잖아.”

애주가인 나는 익숙한 장면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들을 보면 되게 마음이 아파. 그냥 너무 마음이 아파.”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쓸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되게’, ‘너무’까지 덧붙인 진심이었다. 흐뭇하게 듣고 있는데, 다음 말이 갑갑함을 데려왔다.

“근데 사지는 않아. 그냥… 거기까지인 거야. 마음이 아픈 거.”


그 말에 마음이 풀썩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걸려 내려가지 않는 안개처럼 마음 한구석에 뭉쳐 있었고, 도무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만 다시 끄덕이고, 손에 쥔 책을 마저 읽었다.


15분쯤 지났을까. J는 직장 동료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그는 20페이지쯤 읽은 책을 덮고는 한 시간 넘게 심란한 얼굴을 했다.


10분째, 나도 덩달아 마음이 안 좋아졌다. 잘 보내드려야 할 텐데.

또 10분째, ‘자기 일처럼 심란해하네. 아이고 착해라.’

또 10분째, ‘지금이라도 가볼래?’

또 10분째, 또 10분째, 또다시 10분째…


그때 나는 갑갑했다. 걱정과 심란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인데,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나. J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부조만 해도 될까, 마음이 안 좋네…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 순간 가장 답답했던 건 그런 J보다, 그를 보며 내내 감정을 삼키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가보라고!’ 속으로 분노를 참으며 말하는 나. 그러곤 속으로 또 한 마디, “너 진짜 사이코 새끼야.”


그때 문득, 차분해진 또 다른 내가 말했다.

그냥, 네가 따라가지 못하는 다정함이라 이해할 수 없는 거란다.


급격히 차분해진 나는 책으로 돌아갔다. 내 답답함의 원인을 이해하고 나니 화가 사라졌다. 분노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니까.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다. 떡을 팔던 노인의 이야기와 부고 문자는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내겐 같은 맥락이었다. J는 남의 아픔과 노동을 보고 감정을 쏟아붓는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고, 동시에 그 다정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한 시간 후,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왜 이럴까.”


오래 알아 온 J에겐 그런 순간이 많다. 길에서 노인이 끄는 리어카에서 박스 하나가 떨어졌을 때, 별 생각 없이 주워드린 나를 보며 그는 말했다.

“사실 나도 떨어진 거 봤는데, 고민하다가 못 했어. 너 대단하다.”


나는 노동하는 노인을 봐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직장 동료 조부모의 부고 소식에도, 아마 “아이고” 하며 명복을 빈 뒤 부조를 하고 금세 잊었을 것이다.

별 감정이 없는 것들엔 오히려 움직이기가 쉽다.


J는 가끔 나에게 부럽다고 말한다. 나는 가끔 J에게 힘들겠다고 말한다. 다정함은 정말 힘이 드는 것이다. ‘T로 사는 게 편하겠다’는 말에 ‘다들 힘들지 않나’ 하고 넘겼었지만, 지금은 좀 알 것 같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J의 다정함이 실체가 되어 점점 커지다가, 결국 J 자신을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마치 진격의 거인처럼.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J를 걱정한다.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시기하며, 때로는 답답해하고, 또 감탄한다. 가끔은 정말 하등 쓸모없는 생각도 한다. ‘저런 애들만 있으면 세상이 평화롭긴 하겠지만, 발전 없이 멸종하겠지.’ 하긴, ‘나 같은 것만 있으면 핵전쟁으로 멸망할 테고.’


그리고 결국 떠오르는 말. 곁에 있어 줘서 참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쟤 나랑 왜 놀아주지.


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J처럼 모든 이들에게 다정함을 베풀진 못할 것이다. 다만 그런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안타까운 J가 마음 놓고 다정함을 마구 흩뿌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돕고 싶다.


『가녀장의 시대』에서 비건인 슬아는, 비건이 아님에도 비건식을 함께 준비해주는 아버지를 ‘비건 지향적인 사람’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나도 J를 돕는 것만으로 다정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뭐, 아님 말고.


어찌 됐건 내 바람은, J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다정한 이들이

자신의 다정함에 먹히지 않기를.

그들이 그 다정함 속에서 살아남기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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