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99)

어둠 속 밀담 (密談)

by 이 범

어둠 속 밀담 (密談)
​해 질 녘, 영광 마을 조병수의 사랑방에는 붉은 노을 대신 어둠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시작했다. 희미한 등불만이 방 안을 비추고, 그 빛은 벽에 걸린 낡은 족자와 빛바랜 풍경화를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바깥에서는 매미 소리가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지만, 사랑방 안의 공기는 이미 서늘한 가을밤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뒷문이 스르륵 열리고, 백정치가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의 옷차림은 주변 시선을 피하려는 듯 남루했고, 얼굴에는 죄책감과 함께 묘한 결의가 섞여 있었다. 마치 비에 젖은 낙엽처럼 축 처진 어깨는 그의 불안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왔나?”
​방 한가운데 앉아 차를 우리 던 조병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백정치를 맞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차가움이 숨어 있었다. 백정치는 고개를 숙인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흙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인 사랑방 공기가 그를 짓누르는 듯했다.
​“예… 조 선생님.”
​백정치는 조병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조병수는 백정치의 찻잔에 진한 녹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유로웠지만, 동시에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됐나?”
​조병수는 차분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 향기가 방 안에 은은하게 퍼졌지만, 백정치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의 심장은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예, 조 선생님. 제가 말씀드린 유언비어 작전… 성공으로 이끌겠습니다.”
​백정치는 품에서 구깃구깃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시장 통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산갑이 일본에 반대하는 비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겁니다.”
​조병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메모지 위에서 백정치의 입술로 옮겨갔다.
​“음… 계속 말해보게.”
​“그리고 ‘학당 재건은 겉으로는 아이들을 위한다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도 함께 퍼뜨리겠습니다.”
​조병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번뜩였다.
​“좋아, 좋아. 그런데 사람들이 믿겠나?”
​백정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의 시선은 조병수의 눈을 피한 채 허공을 헤맸다.
​“제가 직접 서영이 선생을 밀고했던 사람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은 제가 일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흘리는 정보라면 사람들이 믿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군. 밀정이었던 자가 이산갑의 비밀을 폭로한다… 설득력이 있어.”
​조병수가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사랑방의 고요를 깨뜨리며 왠지 모를 섬뜩함을 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백정치가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 그의 눈빛에 번뜩이는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이산갑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명단도 만들었습니다. 한도회 회원으로 의심되는 자들입니다.”
​그는 메모지를 조병수에게 건넜다.


조병수는 메모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최동규, 박재홍… 이 사람들 이름을 슬쩍슬쩍 소문에 섞어 넣으면 되겠군.”
​“예, 그렇게 하면 경찰도 움직일 것이고, 이산갑의 영향력도 약해질 겁니다.”



​“좋아! 아주 좋아!”
​조병수는 흥분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에는 확신에 찬 기운이 넘쳐흘렀다.
​“자네, 정말 영리하군. 김상 돌 그 자가 자네를 포섭하려 했다지? 하지만 자네는 더 현명한 선택을 했어.”



​서랍을 열자, 두툼한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돈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것은 자네에게 주는 선금이야. 일이 성공하면 더 줄 거네.”
​백정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그의 눈동자가 돈봉투 안의 지폐를 탐욕스럽게 훑었다.
​“감사합니다, 조 선생님.”
​“하지만 명심하게.”
​조병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빈틈없이 잘해야 해. 만약 이 일이 실패하거나, 자네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그는 백정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백정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조병수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의 경고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자네 가족이 어떻게 될지 모르네. 늙은 아버지 백길호, 그리고 자네 어머니까지 말이야.”
​백정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걱… 걱정 마십시오. 저는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이산갑의 동생들… 세무서장 이산우, 읍사무소 서기 이산호, 그리고 수녀인 이은혜까지. 이들의 동향도 살펴야 해.”
​“알겠습니다.”
​“특히 이산호는 학당 재건 허가와 관련이 있으니 주의 깊게 봐야 해. 그 자가 무슨 서류를 만들고 있는지 알아내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조병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신하는 듯했다.
​“자네가 이 일을 성공시키면, 이산갑은 끝장이야. 경찰에 잡혀가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학당 재건도 무산되지.”
​“그럼 학당 부지는…”
​백정치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조병수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시마다 겐죠도 이산갑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어. 그 자가 있는 한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거든.”
​“이산갑은… 이 고장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백정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망설임이 엿보였다.
​“그래서 더욱 없애야 하는 거야! 조선인들이 그런 인물을 우러러보면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지 않겠나?”
​조병수는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선일체! 우리는 모두 대일본제국의 신민이야. 이산갑 같은 자들이 있으면 그게 방해가 돼.”
​“… 알겠습니다.”
​백정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갈등의 파도가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 김상 돌과는 계속 접촉하게. 그 자의 계획도 알아내야 해.”
​“하지만 김상 돌은 저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자네가 서영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그 자도 알고 있어. 그래서 자네를 포섭하려는 거잖아. 계속 흔들리는 척하면서 정보를 빼내게.”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소문을 퍼뜨릴 때 교묘하게 해야 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고, ‘내가 우연히 들었는데…’, ‘누군가 그러던데…’ 이런 식으로 말이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타이밍도 중요해. 한꺼번에 퍼뜨리지 말고 서서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스스로 믿게 만들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조 선생님.”
​백정치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 조병수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의 목소리는 백정치의 발걸음을 붙잡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백정치, 이번이 자네의 마지막 기회야. 서영을 밀고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우리 편에 완전히 서야 해.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백정치는 품속의 돈봉투를 만지며 뒷문으로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쇠사슬에 묶인 듯 무거웠고, 얼굴에는 깊은 고뇌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조병수는 홀로 남아 창밖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성공에 대한 확신과 비릿한 탐욕이 가득했다.
​“이산갑, 네 시대는 끝났어. 이제 이 땅은 일본의 것이고, 나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세상이야.”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영광 마을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고뇌와 또 다른 남자의 야욕이 뒤엉켜 새로운 비극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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