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101)

학당 재건

by 이 범

탄 잔해 위에 선 두 남자
1936년 늦가을, 회색빛 안개가 학당 터 위로 가라앉았다.
하얗게 식어버린 재는 아직도 탄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이산갑이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새로 그린 학당 재건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다.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는 다시 세울 생각이었다.
서영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때 수수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이산갑 씨, 현장 조사를 위해 왔습니다.”



정혁진.
겉으로는 총독부 특파 수사관이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독립운동을 돕는 이중 신분을 가진 남자였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냉정하고 형식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잔해 뒤편, 인부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정혁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형님. 큰일이 났습니다.”
이산갑의 손끝이 떨렸다.
그의 직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화재는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의도다.
정혁진은 소리 없이 한 장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한호건이 어젯밤 보고했습니다. 김상돌, 시마다 겐죠, 그리고 백정치… 셋이 비밀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정혁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더욱 낮게 말했다.
“학당 화재는… 조병수가 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이름.
이산갑의 심장이 순간 얼어붙었다.
조병수.
지역 최고의 유지이자 장사꾼.
일제와 결탁한 대표적인 친일파.
그리고 박성표 면서기와는 의형제로 맺어진 관계.
마을 회계, 토지 거래, 면서무 문서—모두 조병수와 성표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런 자가, 학당을 태웠다?
이산갑의 두 눈에 불길 같은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정혁진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증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조병수가 교묘하게 조작해 두었습니다. 지금 모든 혐의는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탄 기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군가 고의로 석유를 뿌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정혁진은 탄 시멘트 덩어리를 들어 보여주었다.
“백정치의 도장과 서류 조각이 함께 발견됐습니다. 마치—그가 범인인 것처럼.”
이산갑의 눈동자가 번쩍 떨렸다.
“조병수가 꾸민 건가?”
“확실합니다. 그는 박성표 면서기를 통해 문서 원본을 바꿔치기하고, 백정치에게는 은근히 ‘형님이 독립운동과 관련 있다’는 말을 흘렸습니다. 지금 수사 기록도 조병수 쪽에서 확보했습니다. 곧 형님을 비밀조직의 우두머리로 조작해 넘기려는 계획까지 있습니다.”
이산갑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숨결이 떨렸다.
서영이 죽을 때까지 고문을 견뎠던 이유가 이제 선명히 보였다.
“…놈들. 서영을 그렇게 몰아놓고도 부족했단 말인가?”
그 순간, 이산갑은 결심했다.
“정 형. 끝까지 밝혀내세.”
정혁진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조병수의 돈 흐름을 잡아야 합니다. 시마다가 넘긴 돈. 면서기 문서 조작 흔적. 그리고—”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조병수가 실제로는 ‘현장에 없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 그 부분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두 사람은 형식적인 대화를 가장하며 현장에서 멀어지는 인부들을 바라봤다.
“보고서에 기록하겠습니다. 화재 시각은 밤 11시로 일치합니다.”
“예. 마을 여러 사람이 봤습니다.”
그 말은 대외용이었다.
실제 목적은 미궁 속 진실을 찾는 것이었다.
멀리서 인부가 물동이를 들고 다가왔고, 다시 주변이 재의 냄새와 바람에 묻히자 정혁진이 조용히 덧붙였다.
“형님, 보름 후… 조병수와 시마다가 ‘큰 계획’을 발표한다 합니다. 그날이 분수령입니다.”
이산갑은 재건 설계도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전에 진실을 끄집어내야지.”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를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있었다.
누군가, 잔해 위에서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미묘하게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손
며칠 뒤, 마을 회관.
밤이 깊었는데도 조병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짙은 먹색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 속에는 시마다가 건넨 ‘감사비’.




그리고 박성표 면서기가 정리해 둔 ‘조정된 문서 목록’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산갑을 끝장낼 수 있겠지.”
박성표는 술에 취한 듯 웃었다.
“형님, 이 정도로 조작해두면 경찰도 이산갑을 의심할 겁니다. 백정치는 이미 겁을 잔뜩 먹고 형님 말만 듣는 상태고요.”
“좋아. 학당? 태워버리면 그만이지. 다시 지으려고 한다고? 허허… 꿈 깨라고 전해줘야지.”
그들의 대화 중 문밖 그림자가 살짝 움직였다.
그러나 문을 살핀 조병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남자였다.
의형제 박성표가 있으니 문서는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면 단위 상단을 장악했으니 돈은 흘러넘쳤다.



경찰과도 눈짓이면 통했다.
“내일이면 소문이 퍼질 걸세. 이산갑이 비밀 결사를 운영한다는 소문이.”
“유언비어 작전 말씀이십니까?”
“그래. 백정치가 한다고 하더군. 잘하겠지.”
조병수는 잔을 들었다.




“자네는 문서만 잘 챙기게, 성표야. 우리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도 사람 하나를 끝낼 수 있어.”
그 말은 진실이었다.
조병수는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항상 거리 두기를 유지한다.
모든 흔적은 다른 사람에게 묻힌다.
그리고 이 모든 음모가 움직일 때—
정혁진의 조사망도 동시에 조병수를 향해 좁혀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조작, 드러나는 균열
정혁진은 시마다의 장부를 확인하려 했지만, 예상보다 견고한 방어가 있었다.
장부의 절반은 박성표가 작성한 가짜 기록으로 덮였고,
나머지는 일본어로 복잡하게 암호화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호건, 산우, 산호, 그리고 한도회 청년들이 은밀히 자료를 모아오고 있었다.
증거는 흩어져 있었지만, 하나둘 조각이 모였다.
학당이 불타기 하루 전, 조병수가 ‘이상한 석유통’을 옮긴 기록




그 시간대, 공교롭게도 박성표가 면사무소 출입기록을 지움
백정치에게 넘겨진 금액
조병수의 알리바이가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점
정혁진은 결론을 내렸다.
“조병수는 완전범죄를 설계한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증거를 단 하나도 그에게 직접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산갑은 이를 듣고 깊이 생각했다.
“정 형, 우리가 지금 바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형님. 지금 움직이면 오히려 형님이 ‘범행을 숨기려 한다’는 명목으로 잡혀갈 수 있습니다.”
이산갑의 주먹이 떨렸다.
“그럼 서영은…”
정혁진은 고개를 숙였다.
“증거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서영 선생의 억울함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때, 창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휙—
흑색 두루마기 끝이 담장 너머 사라졌다.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불길 아래 숨은 진실
보름 뒤.
시마다는 마을 전체를 불러 모아 ‘새로운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는 조병수와 박성표도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정혁진과 한도회 청년들이 자료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화재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누군가가 석유를 뿌리고, 누군가가 차용증을 위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금이—”
정혁진은 장부 중 한 페이지를 꺼내 들었다.
“이 장부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시마다는 비웃었다.
“그 장부는 나와 상관없어. 조병수 씨가 이미 증명했어. 그 시간에 그는 가와이 경찰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맞아! 나도 봤어!”
“면서기님도 같이 있었잖아!”
일본 경찰과 면서기, 그리고 조병수의 하수인들이 일제히 증언했다.
모든 눈과 손이 이미 조작돼 있었다.
정혁진은 치아를 악물었다.
증거는 충분했지만—
모든 증언이 뒤틀려 있었다.
그때 이산갑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그렇겠지. 너희는 증거도, 증언도 마음대로 꾸밀 수 있겠지.”
그의 눈은 조병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조병수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은 누구도 숨길 수 없다.”
조병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 아래, 희미한 떨림이 있었다.
이산갑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서영은 끝까지 침묵했다. 너희가 아무리 고문해도, 그녀는 누명을 벗지 못했지.”
그는 설계도를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학당은 다시 지어질 것이다.
진실은 결국 불 속에서도 남는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누군가는 조병수를 의심하는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두려움에 고개를 돌렸다.
조병수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의 죄가 완벽하게 가려졌다는 확신의 미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균열을 알고 있는 자의 미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의 저녁,
누군가 조병수의 집 뒤편에서 장부를 훔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새로운 미스터리의 물결이 시작된다.
진실은 아직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영의 뜻은,
재건될 학당의 첫 기둥처럼—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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