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102)

이산갑과 강지윤의 혼사허락

by 이 범

새벽녘, 안개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희뿌연 물결이 논둑을 지나 사랑채의 처마 끝을 스치고, 대지 위에 남겨진 짙은 침묵은 아무도 깨지 못한 채 고여 있었다.
조병수의 한옥은 다른 집들보다 크고, 새 기와가 반질반질 빛나는 권력자의 집이었다.
사랑채 안, 황동 장식의 재단장된 책상 위에는 일본어로 된 문서와 금괴 몇 개, 그리고 새로 도착한 관보가 놓여 있었다.




조병수는 금괴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굴렸다.
부피가 작은 금속이 내는 무게와 소리는 묘하게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 정도면… 한 사람쯤은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 수 있겠지.”
그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낮았고, 범죄자의 냄새는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밖에서는 닭이 울었다. 마을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날부터 마을 전체는 끝없는 의심과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며칠 뒤, 면사무소 뒤편에서 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등허리는 찢겨 있었고, 손목은 묶인 채였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입을 다물었고, 일본 경찰은 너무도 신속하게 “용의자”를 한 명 붙잡았다.

그는 마을에서 떡을 팔던 노총각, 누구보다 순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만식이었다.

하지만 이산갑은 믿지 않았다.

시신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어딘가 맞지 않는다고 직감했다.

고문 흔적의 방향, 결박 방식, 발자국의 형태, 범인의 체격을 가늠할 수 있는 손의 힘…

어느 것 하나 만식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기록을 모두 정리해 덮어씌웠다.

결론은 마치 이미 정해진 듯했다.

이 모든 과정 뒤에 조병수가 박성표 면서기와 만나 은밀히 서류를 교환했다는 소문만이 마을에 바람처럼 떠돌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이야기였다.


씨 가문 저택, 사랑방.
이산갑은 강무일 앞에 앉아 있었고, 마루 사이로 가을바람이 은은히 스며들었다.
벽에 고정된 낡은 족자는 선비 가문의 긴 세월을 품고 있었다.

강무일은 한참 동안 말없이 이산갑을 응시한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가운 강철 같지만, 그 속에는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고민과 통찰의 빛이 감돈다. 그는 이산갑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으며, 동시에 그 의지가 가져올 파장을 헤아리고 있다.


강무일은 이산갑을 마주 앉혀놓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고민하는 빛이 있었다.



“호당 선생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소. 계몽학당이라…그리고 일본 당국에 찍힌 사람 이 아니요?.”
이 말에 이산갑의 등 뒤 그림자가 떨렸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 채 사랑방 기둥에 걸려 있었고, 마치 두려움과 결의가 동시에 흔들리는 듯했다.

또한, “윤서영이라는 여자가 선생의 학당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됐소? 고문당해 죽지 않았소?”

이산갑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눈빛—상처투성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사람을 믿고 싶어 하던—그 눈빛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제 잘못입니다.”
이 한마디는 검은 돌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강무일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딸을… 그런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소.”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평생 존경하고, 함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무일은 냉소하며 말했다.
“사랑은 아니란 말이지.”

이산갑은 난감해 했다.

이때, 방밖에서 자윤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 저들어가도 될까요? "

강무일이 어험 기침하며 " 어~~어.." 어찌할지 엉거주춤하는사이 방문이 열렸다.
강지윤.
그녀의 눈빛은 이미 결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는… 이산갑 선생님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사랑방의 공기가 흔들렸다.
등잔불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리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편안한 삶도 좋겠죠. 하지만… 제 영혼은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이 집안의 오래된 질서에 균열을 만들었다.
지윤의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편지—사랑을 포기하고 평생 후회했다는 이야기—그 조용한 고백이 다시 떠올랐을 때, 강무일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말했다.

마침내 그는 말했다.
“…혼인을 허락하겠소.”
하지만 곧 덧붙였다.
“단 하나만 약속하시오.
내 딸을… 서영처럼 만들지 마시오.”


그러나 혼사 허락은 시작일 뿐이었다.


마을은 점점 불안 속으로 잠식되고 있었다.
김만식 사건이 덮였다는 소문이 돌자, 몇몇 주민은 “조병수에게 밉보이면 누구든 죄인이 될 수 있다”며 술자리에 속삭였다.
이산갑은 그저 듣기만 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침착했지만, 밤마다 그는 잠들지 못했다.
마당에서는 바람이 갈대를 스치며 울었고, 어둠 속에 발소리라도 들리면 번뜩 눈을 떴다.
조병수의 집에서는 밤마다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검정 코트를 걸친 일본 순사, 그리고 박성표 면서기의 그림자—가끔은 웃으며, 가끔은 종이에 도장을 찍는 소리만 들렸다.
이상한 건 하나였다.
사건 당일, 조병수가 마을에 없었다는 ‘증언’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것.
마치 이미 준비된 듯 일제히 나왔다.
누군가 증언을 맞춰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밝힐 방법은 없었다.
조병수는 마을에서 누구보다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웃으며 쌀을 기부하고, 장독대에 비를 피하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면사무소 행사에는 언제나 기부금을 냈다.
그런 사람이 여인을 죽일 리 없다고 모두가 말했지만, 이산갑은 어딘가에서 그의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욕망을 참는 사람의 눈.
빈틈 없이 계산하는 사람의 눈.
그리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의 눈.


겨울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시신 발견지 근처에서 찢어진 천 조각 하나가 나왔는데, 그것이 마치 조병수의 외투와 흡사했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그 천 조각은 며칠 뒤 싹 사라졌다.

증거를 보관하던 일본 순사는 “착오였네”라고만 말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산갑은 그날 밤, 조병수가 면사무소 뒤편에서 박성표와 짧게 무언가를 건네는 장면을 보았다.

흰 종이봉투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얼굴의 어두운 미소는 너무 분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김만식에게는 일본 경찰이 고문 중 자백을 받았다는 발표가 나왔다.

사건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마을은 잠잠해졌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권력을 건드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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