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딩
강씨 가문의 넓은 마당은 늦은 햇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송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기와지붕의 윤곽은 금빛 테두리를 두른 듯 서늘하게 빛났다.
멀리서 풍로에 올린 저녁 국물이 끓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스쳤다.
강무일의 사랑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았다. 말보다 더 무거운 감정이 함께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산갑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방 안에서 그가 다가섰던 것은 허락이었지만, 마당에서는 책임이, 그리고 시대라는 벽이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석양 아래 나란히 걷는 두 사람
강지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지윤은 “드디어… 아버지께서 허락하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떨림 속에는 안도의 숨과 결연함이 동시에 있었다.
이산갑은 오래 묵힌 숨을 내쉬었다.
이산갑은 “영감님께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그의 말끝이 공중에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그 순간, 강지윤이 그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단단하지도, 지나치게 망설이지도 않은, 그저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에게 닿는 정도의 힘이었다.
강지윤은 “저는 괜찮아요. 우리… 함께 걸어가기로 했잖아요.”
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끌어올리며 저물어가는 빛에 흔들렸다.
이산갑은 강지윤의 손을 더 깊이 움켜쥐었다.
그 손 안에는 서영의 추억으로 얼룩진 과거와, 지윤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새 길이 동시에 존재했다.
두 사람의 마음속을 스치는 그림자
이산갑은 생각했다.
―정말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이 시대에서. 일본 경찰의 발길이 문턱을 넘어오는 세상에서.
그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다.
지윤이 바라보고 있는 미래가 너무 투명해서, 그 믿음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강지윤은 또 다른 그림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허락하셨지만… 저 수많은 시선들은 어떨까?
면서기 박성표와 조병수 같은 이들이 아버지 곁에서 무슨 속삭임을 할까?
이산갑 선생님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덫을 마련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산갑의 옆에서 걸어가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두려움을 마음속 깊이 감추었다.
붉은 하늘 아래 피어오르는 불갑산의 실루엣
두 사람은 어느새 마당 끝, 오래된 우물가에 다다랐다.
저 멀리 불갑산이 보였다. 석양이 그 능선을 따라 번졌고, 산의 그림자가 강가를 따라 우묵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강지윤은“저기 보이죠…? 불갑산. 어릴 때 어머니랑 자주 갔어요. 산 자락 아래엔 시장도 열리고… 오래된 사찰도 있고…”
말을 이어가다가 그녀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죠? 저기서…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라는 게.”
이산갑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말 뒤에는 무겁게 걸리는 한 문장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붉은 노을이 서서히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시대가 만든 잿빛 긴장 속에서
서늘한 공기가 마당을 스쳤다.
기와지붕 끝에 붙은 작은 쇠물이 바람에 울며, 한 번, 두 번… 잔잔하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이 시대에는 행복이라는 단어조차 빚쟁이에게 저당 잡힌 듯 언제든 빼앗길 수 있었으니까.
그 순간, 이산갑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사랑채 뒤편에서 누군가 빠르게 몸을 숨기는 실루엣이 스친 것이다.
그는 알아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실루엣은… 강무일의 집에 들락거리며 일본 경찰과도 교류하는 박성표 면서기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지윤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 더럽혀질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깊은 이유는—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산갑은 “평생… 후회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강지윤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윤도 “저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제 선택을 했으니까요.”
그녀의 눈빛은 석양보다 더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 아래에는 이미 작은 균열이 나 있었다.
조병수가 교묘히 조작한 문서들, 조작된 목격자, 바뀐 필적, 흔적 없이 사라진 서류들…
누군가를 ‘확정된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숨어 있는 손길들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불길함을 두 사람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산갑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등 뒤에서 자꾸만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석양의 마지막 빛이 마당 끝을 스칠 때,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서로의 손은 따뜻했지만, 주변의 공기는 싸늘했다.
강지윤은 “산갑 선생님…”
그녀가 불렀을 때, 이산갑은 고개를 돌렸다.
강지윤은“우리…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이산갑은 솔직하게 답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허락해야만 하는 거니까.
대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산갑: “걷는 곳까지… 함께 갑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먼 곳의 불갑산을 향해 맞춰졌다.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그 어둠은 평온이 아니라—
조용히 다가오는 무언가의 그림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