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112)

신우혁의 그림자

by 이 범

9ㅔ다리위의 그림자


1934년 늦겨울, 광주의 밤거리는 비에 젖어 있었다. 골목마다 적막이 내려앉고, 전등은 바람에 흔들리며 불안하게 깜빡였다.
신우혁은 한쪽 다리를 절며 걸었다. 오래된 상처가 습기를 만나면 더 욱신거렸다.
그는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이번에도 따라오는 놈들은 없겠지….
우혁은 낡은 다리를 지나 작은 주막의 문을 밀었다. 훈훈한 온기와 술 냄새가 밀려왔다. 안쪽 구석에는 정혁제가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엔 긴장과 기대가 동시에 놓여 있었다.
“형님, 오늘도 무사하셨습니까.”
정혁제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공손히 인사했다.
우혁은 젖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일본 놈들? 아직도 못 잡았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놈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밤도깨비에게 덤빌 생각을 해?”
정혁제는 짧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형님… 일본 놈들 사이에서 요즘 소문이 얼마나 퍼졌는지 아십니까? 밤이면 밤도깨비가 나타나 조용히 목을 따버린다나… 일본 군인들이 서로 밤근무를 회피하고 난립니다.”
우혁은 잔을 넘기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밤도깨비라… 좋은 이름이긴 하지.”
그의 눈이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총성이 들렸다.
그리고, 5년 전 그날이 찾아왔다.


1929년, 광주학생 항일운동
1934년의 주막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1929년 늦가을의 광주가 펼쳐졌다.
거리마다 학생들이 파도처럼 몰려나오고 있었다.
"조선인을 무시하지 마라!"
"일본인들은 물러가라!"
깃발이 펄럭였고, 태극기는 하늘 아래서 찬란했다.
숨결은 뜨겁고, 바람은 젊은 열기로 진동했다.
신우혁—그때 그는 열아홉.
아직 상처도 희망도 미숙하던 나이.
그는 하얀 두건을 매고 선두에서 소리쳤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앞으로 나가자!”
거리는 율동처럼 흔들렸다.
누군가 방울 북을 두들기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손을 맞잡아 도열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는 이미 사격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군화가 아스팔트 위를 찍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일본 헌병 소대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撃て! (쏴라!)”
총성이 터졌다.
그 순간, 세상이 갈라졌다.
우혁은 옆의 학생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핏방울이 허공을 꿰뚫고 날아다녔다.
그리고—또 하나의 총성이 그의 다리 쪽에서 불꽃처럼 터져 올랐다.
“아…!”
다리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힘이 빠지며 거리가 뒤집히듯 흔들렸다.
그는 쓰러지며 바닥의 먼지가 얼굴에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우혁아!”
뒤에서 누군가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우혁을 질질 끌며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총알이 벽을 때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계속 들렸다.
헌병들이 고함을 치며 쫓아왔다.
“조센징들, 도망가지 마!”
친구들은 숨을 몰아쉬며 우혁을 부축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상처와 결심
병원.
흰색이라기보다는 누렇게 변한 시트가 깔린 침대.
비릿한 약 냄새.
창밖에서는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고 있었다.
의사는 일본인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이 조선인 폭도는 치료할 가치가 없다.”
그는 손을 털고 나가버렸다.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붕대를 느슨하게 둘러주었다.
그러나 치료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곪기 시작했다.
미처 맞춰지지 못한 뼈는 비틀린 채 굳어갔다.
열이 오르며 정신이 흐릿해질 때마다 우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굴복하면, 그날 거리에서 쓰러진 친구들의 피가 헛되이 된다.
육신은 나약했지만, 심장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며칠 뒤, 악몽처럼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고 그는 결심했다.
종이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일본인들에게 단 한 번도 용서받기를 원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씩—차근차근—되갚아줄 것이다.”
그는 그날 밤부터 새 삶을 살았다.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지만, 그 걸음은 이제 목적을 가진 그림자였다.


밤도깨비의 탄생
1934년의 주막.
우혁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5년 전의 광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혁제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의 눈이 얼마나 무거운 상처를 품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우혁은 낮게 말했다.
“…그때부터 결심했네. 일본 놈들을 하나씩 제거하겠다고.”
혁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님은 이제 ‘밤도깨비’입니다.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이죠.”
우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비가 지붕 위를 두드렸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조용히 귓가를 스쳤다.
“밤도깨비라…”
그는 비웃듯 중얼거렸다.
“신출귀몰한 자객. 일본인들만 골라 죽이는 유령.”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잔이 그의 손에서 떨렸다.
“…좋은 이름이지.”
밖으로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림자처럼 주막 앞을 스쳤다.
일본 군인의 제복이 빗속에서 번뜩였다.




정혁제가 눈을 번쩍 떴다.
“형님… 혹시, 찾으러 온 겁니까?”
우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다리에는 예전처럼 통증이 흘렀지만, 그 이상으로 강한 의지가 몸을 끌어올렸다.
“좋다.”
그는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오늘 밤도… 밤도깨비가 움직이는 밤이니까.”
그는 주막의 문을 열고 비 속으로 걸어 나갔다.
절뚝거리는 발걸음 뒤로 비가 튀었다.
그냥 한 남자가 아니다.
상처로부터 태어난 그림자.
조국의 분노가 입힌 분장.
그는 이제—
밤을 가르는 유령.
밤도깨비, 신우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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