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귀빈실
— 신우혁, 그리고 한 장의 소식 —**
2층 귀빈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건물 아래층에서는 축배와 음악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지만, 이 층에 올라오면 소리는 마치 지하에 묻혀버린 유령처럼 희미한 울림으로만 남았다. 바람 한 줄기조차 스산하게 스며드는 적막—그 적막 속에서,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앉아 있었다.
정혁제는 차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강지윤 고모님께서 혼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방 안의 공기를 바꾸었다.
신우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예리하면서도 어디선가 한 겹 부드러움이 스며 있었다.
강지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여성이겠지만, 신우혁에게는 한때 자신이 지켜야 했던 마지막 혈육이자, 이제는 멀리 떨어져 사는 소중한 육친이었다.
“… 그래. 지윤 고모께서.”
그의 목소리는 오랜 세월 덮어두었던 감정의 문이 다시 열리는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혁제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이어 말했다.
“영광의 이산갑이라는 분과 혼인하셨다던데요.”
이산갑.
그 이름은 신우혁에게도 생소하지 않았다. 최근 한도회 내부에서 그 청년을 주목한다는 말이 종종 들려오곤 했다. 조용하지만 강단 있고, 이상에 흔들림이 없는 교육자. 겉보기엔 평범한 청년이지만, 지역에서는 이미 민족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
신우혁은 천천히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의 전등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외부에서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산갑… 계몽학당을 운영하는 그 청년인가?”
“네. 한도회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영향력이 꽤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민족운동에도 연루된 인물이라…”
혁제의 목소리는 아주 미세하게 경계의 빛을 띠고 이어졌다.
그러나 신우혁의 눈빛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고모께서 좋은 분을 만나셨군.”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다행이네.”
한순간, 정혁제는 형님의 표정에 스쳐 지나간 미묘한 안도와 아릿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신우혁이라는 사람은 일찍이 가족을 잃고, ‘지켜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를 거의 잃은 채 살아온 사내였다. 그런 사람이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리만치 묘한 기색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혁제는 알고 있었다.
“형님.” 정혁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한도회에서… 이산갑을 접촉해 볼까요?”
한도회는 정보와 자금, 그리고 ‘어둠 속의 일’를 다루는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한도회의 손길은 은밀했고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결코 깨끗하지 않았다.
신우혁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그는 교육자네.”
우혁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걷는 길,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 그런 것과는 다른, 훨씬 곧고 위험한 길을 가는 사람이지. 우리 같은 자객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네.”
그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으나, 혁제는 아직 그 깊은 층까지 읽지 못했다.
첫째는 ‘그를 더럽혀선 안 된다’는 뜻.
둘째는 ‘우리의 방식에서는 그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혁제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형님께서 고모님의 안전은 챙겨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광 지역은 요즘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많습니다. 일본인 관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그 순간, 신우혁의 가쁜 숨이 방 안에 드러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창가로 다시 걸어가 창틀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창밖에는 밤거리의 희미한 불빛, 사람들의 이동,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신우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지윤 고모의 어린 시절 모습이 살아났다.
유일하게 그에게 따뜻함이라는 감정을 가르쳐준 사람.
그는 그 기억을 오래전 묻어두었지만, 다시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그건… 그렇네.”
그는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다시 예리하게, 그러나 어딘가 애틋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만간 영광에 내려가 봐야겠군.”
정혁제는 멈춘 호흡을 내쉬었다.
형님의 말은 언제나 결심이자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엔 오래전부터 이어진 규칙이 숨어 있었다.
— 지킬 수 있다면 지킨다.
지킬 수 없다면 지켜낼 방법을 찾는다. —
귀빈실의 공기가 이 말을 삼킨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혁제는 한동안 형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우혁이라는 사내의 그림자는 늘 길고 고독했다.
가족이 없고, 동료라 말할 사람도 거의 없고, 의지할 이도 없다.
그저 싸움 속에서 버티며, 죽음과 삶을 조율하는 칼날 같은 하루를 살아내는 인간.
하지만 지금—
그는 누군가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혁제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형님.”
정혁제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제가 먼저 내려가 정보를 수집해 오겠습니다. 산갑이라는 그 청년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신우혁은 이를 거부했다.
“아니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하겠네.”
“하지만—”
“혁제야.”
신우혁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눈빛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결의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누군가를 향한 사랑 같은 감정도.
“이건 단순한 임무가 아니야.
그저 감시도, 접촉도, 보고도 필요 없네.”
그는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창밖에서 지나가던 인력거가 삐걱이는 소리, 술에 취한 일본 관리의 웃음, 기생의 노래가 스산한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 그저 살아 있는지 보고 싶을 뿐이네.”
혁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너무 인간적이었고, 너무 소중했고, 동시에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자신이 개입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우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외투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뒷모습은 삐걱이는 등잔불 아래 길게 늘어져 있었다.
“준비하게.
오늘 밤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새벽이 오면 바로 출발하네.”
정혁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예, 형님.”
그렇게 귀빈실의 등불은 두 남자의 그림자를 벽에 붙여놓은 채 흔들렸다.
밤은 깊어가고, 영광까지의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신우혁은 이미 마음을 정해버린 사람처럼 조용히 창가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
어둠 속을 헤매던 사내가, 오랜만에 따뜻한 빛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은 다른 남자의 곁에 서 있는, ‘강지윤’이라는 한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