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117)

법성포 조창

by 이 범

겨울, 새벽부터 찬 바람이 법성포를 휘돌았다. 바람 끝은 갯내와 얼음 냄새가 뒤섞여 살갗을 베어냈고, 항구에서 들려오는 철제 사슬 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배의 기적음이 혼탁한 안개 속에 퍼져나갔다. 조창 창고 앞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쌀가마니를 실은 도라무꾼들의 어깨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들의 얼굴엔 피곤이 배어 있었지만, 일본 헌병들의 매서운 눈빛을 의식해 아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이 항구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는 딱 한 곳이었다.
법성포 조창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야마모토 켄지의 사무실.




조선을 수탈해 배불리는 자가 머무는 공간답게, 그곳은 외부의 겨울을 잊은 듯 언제나 따뜻했다. 호화로운 장식과 고급 목재 가구들, 그리고 벽에 걸린 두 자루의 일본도까지—모든 것은 이곳의 주인이 얼마나 ‘권력과 쌀’을 손에 쥐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아침, 박성표는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코끝이 얼얼했다. 모자의 챙에는 미세한 서리가 내려앉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달래며 숨을 고르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오늘은 왜 부른 걸까?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 피맛을 본 뒤였다.
문을 열자, 실내에서 퍼져나오는 따뜻한 공기와 녹차 향이 스치며 코를 간질였다. 순간, 박성표의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풀렸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의 시선은 책상 뒤에 넉넉하게 앉아 있는 야마모토 켄지를 향했다.




야마모토는 오늘도 얼굴에 반들반들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구레나룻은 축축하게 늘어져 있고 콧날은 매부리처럼 휘어 있었다. 배는 더욱 불룩했다. 조선 농민들이 들여온 쌀이 채우는 건 창고뿐만 아니라 그의 위장도 마찬가지였다.
야마모토는 박성표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 실눈을 떠 웃었다.
“어이쿠, 박 상, 오셨나요.”
익숙하면서도 항상 불편한 호칭.
일본인들에게 ‘상(さん)’이라는 말이 존중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톤으로 박성표의 귓전에 꽂혔다.
“야마모토 님, 부르셨습니까.”
그는 모자를 벗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야마모토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앉으시오, 앉으시오. 차도 한잔 하시지.”
탁자 위에는 갓 우려낸 듯 향이 짙은 녹차가 올려져 있었다. 잎사귀가 비친 연둣빛 표면에 조명등이 일렁였다.



조선의 농민들은 보리차 한 모금도 귀한 시대에, 일본에서 공수한 고급 녹차를 마시는 이 기득권자의 배부른 취향에 박성표는 늘 목 안쪽 어딘가가 쓰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입술만 적셨다. 뜨거운 향기와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감돌았지만, 마음은 냉기로 얼어붙은 듯했다.
야마모토는 여유롭게 녹차를 넘기며 갑자기 배를 두드렸다.
“하하하! 박 상은 정말 제국에 협조적 이시오. 조선인 중에 박 상 같은 분이 더 많으면 좋을 텐데.”
입꼬리의 주름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 비웃는 듯한 친절함이 박성표의 속을 서늘하게 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다만… 현실을 직시할 뿐입니다.”
그는 늘 그 말을 달고 살았다.
현실을 직시한다.
속뜻은 하나였다. 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일본에 맞서는 것은 바람을 손으로 막겠다는 어리석음과 같다.
그 자신도 믿지 못하는 변명을 되뇌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오늘 부른 이유는 말이오…”
야마모토가 잔을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순간, 박성표의 등골이 굳었다.
일본 관리가 이렇게 나지막하게 말할 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영광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소.”
영광.
그곳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박성표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돌렸다.
“… 이상한 움직임이라면?”
“이산갑이라는 자, 알고 있소?”
짧은 침묵.
박성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계몽학당을 운영하는 자입니다.”
“그 학당이 문제요.”
야마모토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박성표에게 건넸다. 서류 상단에는 ‘경성 총독부 보고’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경성에서 보고가 올라왔소. 그곳에서 불온한 사상을 가르친다는 정보가 있소.”
박성표는 문서를 받는 척했지만, 실은 내용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에 이산갑과 그가 운영하는 학당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던 곳.
그 순수한 공간이 ‘불온’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것은 참으로 잔혹한 왜곡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강지윤이 있었다.
경성대학 출신 신여성.
이산갑의 아내.
일본의 감시 명단에 올랐던 인물.
그녀가 영광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박성표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는…
그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박 상, 내가 박 상을 믿기 때문에 이 일을 맡기는 거요.”
박성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산갑의 학당을 감시하시오. 누가 드나드는지, 무엇을 가르치는지,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모두 보고해야 하오.”
박성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 무거운 쇳덩어리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는 굴종과 회피, 그리고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야마모토의 입가가 후들거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좋소! 역시 박 상은 믿을 만하오.”
그가 책상 아래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건 사례금이오.”



박성표는 봉투를 받는 순간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속에서는 미묘한 파문이 일었다.
또다시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
그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대고 변명을 반복했다.
가족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시대가 강요한 선택이었다고.
그러나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비겁함이 늘 잊힌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계속 협조해 주시오. 박 상 같은 사람이 있어야 조선이 평화로워지는 거요.”
그 말은 너무나 뻔뻔했다.
실제로 조선을 평화롭게 만들고 있는 건 헌병대의 총부리와, 그 총부리를 피해 도망치는 무고한 사람들의 침묵뿐인데.
박성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야마모토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향해 걸어가던 박성표는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야마모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조선인들은 정말 쉽군. 돈 몇 푼이면 동족도 팔아넘기니… 하하하!”
그 웃음은 사무실 안에서 마른 장작을 태우는 난로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박성표의 귓가에도 깊게 박혀, 문 밖의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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