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손, 무거운 봉투
법성포 조창(漕倉)의 복도는 겨울밤의 냉기가 그대로 스며드는 듯 차가웠다.
형광등이 없던 시대, 등유 램프에서 퍼지는 희미한 황빛만이 어둠을 겨우 밀어내고 있었다.
그 밝지 않은 불빛 아래로 박성표의 그림자가 길게 깔렸다.
사무실 문이 덜컥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박성표는 마치 그 소리가 자신의 등을 향한 총성이라도 되는 양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손에 들린 봉투가 사각거리며 흔들렸다.
안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지금 조창 노동자들이 한겨울에도 장갑 없이 일하고, 농민들이 쌀을 빼앗겨 굶고 있음에도…
그 돈만큼은 말끔히, 때 묻지 않은 새 조선은행권으로 차곡차곡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박성표는
(속삭이듯, 그러나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듯)
“이산갑… 네가 계속 위험한 짓을 하면… 결국 윤서영처럼 될 것이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박성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윤서영.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지 1년.
그녀가 사라진 날, 조창 뒤편의 부두에서는 밤새도록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박성표는 고개를 저으며 그 기억을 밀어냈다.
“내선일체만이 답이야… 저항은 무의미한 희생만 부를 뿐이지.”
그는 힘주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압도하기 위해 세운 벽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벽은, 누가 보더라도 이미 금이 가 있었다.
그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품속 깊이 넣었다.
마치 그 돈이 다른 누구에게라도 보이면 불에 타오를 듯 숨가쁘게 감추었다.
복도 저편에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창문이 덜컹거리고, 헛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쥐의 움직임이 어둠을 갉아먹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혼잣말을 했다.
“나는… 잘못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민족을 위해… 모두를 위해서다…”
입술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걸음은 점점 더 느리고, 더 무거워졌다.
마치 발목에 족쇄라도 채운 듯.
진실을 보는 자, 정혁제
복도를 빠져나와 창고 쪽으로 향하던 박성표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늘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조직에 순응한 충실한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잠깐 그를 안도시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는,
한 쌍의 눈이 조용히 그의 모든 움직임을 뒤쫓고 있었다.
조창 창고의 뒤편,
가장 오래된 목재 상자들이 쌓인 곳.
그 사이의 좁은 틈에 정혁제가 숨어 있었다.
그는 숨소리조차 없는 그림자였다.
눈앞에는 박성표의 등이 작아지며 멀어져 갔다.
정혁제는 떨림 없이 속삭였다.
“박성표… 역시 야마모토의 앞잡이로구나.”
그 말은 한숨과도 같았고,
이미 알고 있었던 진실을 확인하는 체념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조용히 수첩을 꺼냈다.
달빛이 없기에, 창고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등유램프의 노란 빛만이 종이에 닿았다.
그는 짧지만 결정적인 문장을 적었다.
“박성표 – 야마모토 켄지와 접촉.
이산갑 학당 감시 지시받음.”
적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첩 위의 글자가 마치 불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산갑.
조선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지키려 나선 청년.
강지윤과의 혼인으로 더욱 표적이 된 남자.
정혁제는 이 보고가
신우혁에게 어떤 결정을 부르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박성표가 조창을 벗어날 때까지, 정혁제는 그림자 속에 그대로 있었다.
박성표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그는 봉투의 무게가 자신에게 더 큰 책임감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에게 진실은 단 하나였다.
“제국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조선인의 생존이다.”
그러나 정혁제의 눈에 비친 박성표는,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저당 잡힌 사내였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간극은
복도 끝을 밝히던 등유 램프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다.
정혁제는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상자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오듯, 소리도 없이.
신체를 낮게 유지한 채 창고 뒤편 외벽을 스치며 이동했다.
수십 번의 잠입 임무로 이미 습관처럼 체화된 움직임이었다.
그는 창고 뒤쪽의 수문 근처까지 다가왔을 때
웅덩이 위를 떠다니는 달빛 한 줄을 밟았다.
멈추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형님께… 보고해야겠군.”
그 한마디는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에 섞여
마치 얼음처럼 쪼개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은 이미 결심을 담고 있었다.
밤도깨비의 칼은,
곧 바르게 향할 것이다.
사라지는 그림자, 시작되는 파문
정혁제는 창고 뒤편에서 몸을 돌려
조창에서 이어지는 협곡 같은 골목으로 향했다.
바람이 스쳐가며
그의 검은 두루마기를 날렸다.
그 실루엣은 한순간
등유 램프 불빛 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미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는 그림자 같았다.
—
박성표는 집으로 가는 길에
오늘 있었던 일을 스스로 정당화하며 되뇌었다.
곧 다가올 재앙을, 그는 조금도 예감하지 못했다.
정혁제는 어둠 속 어딘가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찾아갈 곳은 단 하나.
밤의 주인.
신우혁.
그에게 보고가 전달되는 즉시,
영광의 고요한 마을에
작은 파문이 아닌—
전쟁 같은 폭풍이 밀려올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 밤 조창 복도에서
봉투 하나가 오가는 순간 시작된
느리지만 거대한 균열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머지않아 피와 운명을 뒤흔들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아직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