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불씨
ㅣ늦가을의 그림자
늦가을의 영광.읍사무소 뒤편 창고는 마을 사람들 누구에게도 관심 받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린 밤, 싸늘한 바람이 나무판자를 긁었고, 창고 틈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으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박성표 — 영광 면서기, 40대 초반. 차가운 이성과 철저한 현실주의자.
백정치 — 아첨에 익숙한 밀정
구판길 — 마을을 휘어잡는 악명 높은 선동가. 일본 헌병의 사주를 종종 받아 움직이는 사내.
촛불 하나만이 어둠 속에서 떨리며 흔들렸다.
그 불빛은 환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세 남자의 그림자를 길게 찢어놓는 듯했다.
구판길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를 불렀다는 이유가 뭔가, 박 서기?”
박성표는 주변을 살피며 낮게 속삭였다.
“조용히 하게. 누가 들으면 안 돼.”
백정치는 잔뜩 굽신거리며 덧붙였다.
“면서기님께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구판길은 비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박성표를 바라보았다.
“이산갑 도련님 학당 때문이지?”
박성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이 그의 안경테를 살짝 비추며 흔들렸다.
“그래. 이산갑의 계몽학당…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불씨의 이름
구판길은 코웃음을 쳤다.
“계몽학당? 듣기는 좋지. 사실은 독립운동의 소굴 아니던가.”
백정치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윤서영이란 여자도 수상쩍고요.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가르치는지…”
박성표의 얼굴에는 오래된 확신이 비쳐 있었다.
“이대로 두면 마을이 일본 당국에 찍힌다네. 내선일체에 역행하는 위험한 곳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크단 말일세.”
그의 말에는 두려움이 아닌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 신념은 비뚤어졌지만 단단했다.
구판길이 박성표를 향해 시선을 좁혔다.
“그래서? 자네들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잠시의 침묵.
창고에 흐르던 바람마저 멈춘 듯했다.
박성표는 성냥갑 하나를 꺼내, 촛불 옆 테이블에 ‘톡’ 하고 내려놓았다.
“… 학당을 없애야 하네.”
백정치가 숨을 삼켰다.
“없앤다니… 그게 무슨…”
“학당이 사라지면, 이산갑도 활동할 수 없어. 윤서영도 마찬가지고.”
구판길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도, 분노도, 공포도 아닌…
위험한 흥미가 떠올랐다.
“학당을 없앤다… 불을 지르겠다는 건가?”
박성표는 대답 대신 성냥갑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성냥갑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 불이지.”
세 사람의 갈림길
구판길은 성냥갑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하. 역시 면서기 양반이야. 돌려 말하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박성표의 목소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이것은 민족을 위한 선택이네. 이산갑 같은 자들이 계속 저항하면… 조선 전체가 일본 제국의 보복을 받게 될 거야.”
그 말은 마치 오래전에 굳어져 버린 신앙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구판길이 몸을 기울여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럼 누가 불을 지르나?”
박성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본 사람은 구판길 뿐이었다.
“… 일본 경찰에게 보고하겠네. 학당이 불온한 곳이라고. 그러면 놈들이 직접 처리할 거야.”
구판길의 웃음이 깊어졌다.
“결국 일본 놈들한테 떠넘기겠다는 거로군. 자네 손은 깨끗하게 남기고.”
“이것은… 민족을 지키기 위한 일이야!”
박성표의 외침은 삐걱거리는 창고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구판길의 비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민족을 위한다면서 결국 일본 놈들한테 고자질하는 꼴이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나.”
그는 박성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일본 제국에 충성한다.’”
창고의 공기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박성표의 주먹이 떨렸다.
“자네가… 뭘 안다고…”
“뭘 아냐고?”
구판길은 담배를 바닥에 내리누르며 말했다.
“나는 적어도 위선 떨지 않아.”
백정치는 두 사람 사이를 두려운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구판길이 코트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학당에 대한 소문은 퍼뜨리지. 일본 경찰이 주목한다는 얘기 정도는. 그게 내 일일 테니까.”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하나만 충고하지. 이산갑… 만만한 상대 아니야.”
박성표의 눈이 휙 돌아갔다.
“그의 집안은 함평 이 씨. 무인 집안이지. 건드리면… 자네가 다칠 수도 있어.”
“협박인가?”
“충고지.”
구판길은 담배 연기를 한 번 토해내고는
차가운 늦가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불씨
창고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백정치가 불안에 떨며 입을 열었다.
“… 면서기님, 정말로… 일본 경찰에게?”
박성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성냥갑에 고정돼 있었다.
성냥 한 개, 불 한 점.
그 조그만 불씨가 마을의 가을밤을 뒤집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백 씨.”
“… 네?”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거야.”
박성표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촛불이 천천히 흔들리다 이내 곧게 섰다.
“민족을 위해서.”
그의 말과 달리,
창고 밖에서는 더 차고 어두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도 보지 못한 밤.
불씨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