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162)

소박한혼례

by 이 범

소박한 혼례

원칙의 가문, 윤화정을 맞이하다
해가 서쪽 산자락에 걸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던 날, 전라도 영광 이기영의 집 사랑채 뒤뜰에서 조촐한 혼례가 열렸다.
혼례는 양반가의 그것이라기엔 너무나 소박했다. 붉은 비단 대신 푸른 무명을 깔았고, 화려한 병풍 대신 자연스러운 대나무 발을 드리웠다. 잔치 손님이라곤 가까운 이웃 몇과 이기영이 아끼는 옛 부하 오진삼 가족 정도가 전부였다. 대궐 같은 잔치가 아니었지만, 공기 중에는 묵직하고도 진실된 기운이 감돌았다. 이는 무인(武人)의 강직한 혼례였기 때문이리라.
혼례상에 마주 앉은 이기영(李基英)의 표정은 그가 일곱 번의 민란을 평정할 때보다 더 진지했다. 그의 눈빛은 맑았으나, 스물여덟 살의 상민(常民) 출신 과부 윤화정(尹花貞)을 아내로 맞이하는 이 순간이 이 양반 가문에 미칠 파장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윤화정은 곱게 단장한 얼굴이었으나, 긴장과 함께 감격이 서린 눈빛이었다. 한양 남대문 근처 주막에서 홀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녀가 명망 있는 무관 가문의 맏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편 이기영은 그녀의 신분이나 과거를 묻지 않고 오직 사람 됨됨이만을 보고 혼인을 청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맞절을 하고 술잔을 교환하는 교배례(交拜禮)와 합근례(合巹禮)를 마쳤다.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이윽고 이기영의 아버지인 전 첨사(僉使) 이성준(李成俊)이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했다. 이성준은 겉은 온화하나 속은 강철 같은 원칙주의자였다. 그의 시선이 윤화정에게 닿자, 화정은 숨을 죽였다.
이성준은 며느리 앞에 서더니, 따뜻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며느리, 고생이 많을 것이오."
윤화정은 그 짧은 한 마디에 담긴 시아버지의 깊은 배려를 느꼈다. 평생 상민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상의 차별과 편견을, 이 양반 가문의 어른은 단숨에 씻어주는 듯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깊이 절하며 진심을 담아 답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이성준은 윤화정을 일으켜 세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혼례가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했음을 알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 속에서 가문의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우리 집안은 비록 대대로 문과(文科)로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이었고, 내가 무관(武官)이 된 후에도 원칙을 목숨처럼 지켜왔소.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과 체면을 중요시하지만, 나는 다르오."
이성준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참석한 이들의 귀에 우레처럼 울렸다.
"우리 집안은 비록 양반이지만, 원칙을 중히 여기는 집안이오. 신분보다 사람을 보고, 옳은 것은 옳다 하는 집안이오."
화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주막에서 고단하게 살면서도 굳건히 지키려 했던 삶의 태도를, 이 위대한 시아버지가 인정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참고 굳게 다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평생 지키신 그 원칙을 저도 따르겠습니다."
이성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러니 며느리도 당당하게 사시오. 상민 출신이라고 주눅 들 필요 없소. 당신의 맑고 강인한 눈빛을 보고 우리 아들이 선택한 것이오. 우리 가문은 그 마음을 존중하오."
그 말에 윤화정의 눈가에 결국 뜨거운 물기가 맺혔다.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분 사회인 조선에서, 한 양반 가문의 어른이 '상민 출신이라고 주눅 들 필요 없다'고 선언해준 이 배려는 그녀의 삶 전체를 인정하고 껴안아주는 위로와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지 않고 묵묵히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때, 신랑 이기영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칼을 잡던 무인의 단단한 손이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화정, 고생이 많을 것이오."
이기영의 목소리에도 무관으로서의 묵직함 대신, 한 남편으로서의 미안함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윤화정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머금은 채 미소 지었다. 이 고생 많을 자신의 앞날보다는, 드디어 굳건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감사함이 더 컸다.
"아닙니다, 서방님. 이렇게 좋은 집안에 시집와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서방님과 아버님의 원칙을 따라 평생을 살겠습니다."
윤화정의 대답은 단순히 며느리의 겸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기영의 무인으로서의 삶, 이성준의 강직한 원칙이 마침내 한 여인의 인생과 굳건히 결합되었음을 선언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랑채 뒤뜰의 소박한 혼례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이기영과 윤화정의 강인한 원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삶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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