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손잡이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김민준은 습관처럼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37세, 중견 기업 과장. 15년째 같은 루트로 출근하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토스트를 입에 물고, 현관문을 나서는 시간까지 정확히 23분. 그의 아침은 언제나 기계처럼 정확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행 첫차. 민준의 하루는 항상 이 차에서 시작됐다. 빈 지하철 안, 그는 늘 서던 자리에 섰다. 세 번째 칸, 왼쪽에서 다섯 번째 손잡이. 15년 동안 그 자리였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를 깨웠다.
요즘 민준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승진 압박, 주택담보대출, 아이 교육비, 아내와의 미묘한 거리감. 모든 것이 그를 짓눌렀다. 삶이 그저 의무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밤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이 오면 또다시 같은 루트를 반복했다.
그날따라 지하철이 유난히 붐볐다. 민준이 잡은 손잡이에 다른 손이 함께 올려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70대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서 계셨다. 주름진 얼굴에 미안한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젊은이. 잠깐만 이것 좀 잡아도 될까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할머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킨슨병일까? 아니면 그저 추위 때문일까? 민준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할머니, 앉으시죠. 제가 자리 찾아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한 정거장만 가면 돼요."
하지만 지하철은 두 정거장, 세 정거장을 지나도 서지 않았다. 신호 대기 때문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렀다. 할머니의 손은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민준은 결국 자신의 팔로 할머니를 지탱했다.
"할머니, 제 팔 잡으세요. 더 안정적이에요."
할머니는 고맙다는 듯 민준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민준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 작은 도움이 왜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걸까?
"젊은이는 참 착하네요. 요즘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니."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민준은 쑥스럽게 웃었다.
"별말씀을요. 당연한 거죠."
"당연한 게 아니에요. 세상에 당연한 친절은 없어요. 모든 친절은 선택이에요."
할머니의 말이 민준의 가슴에 꽂혔다. 그는 최근 몇 년간 누군가에게 친절했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에게도 친절하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병원이에요. 남편 면회 가는 길이에요. 작년에 중풍으로 쓰러지셔서요."
"아... 힘드시겠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하느님께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원망도 했어요. 50년을 함께 산 사람이 말 한마디 못 하고 누워 있으니까요."
민준은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어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신 게 아니라, 함께 이겨낼 기회를 주신 거라는 걸요. 매일 아침 남편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해요. 대답은 못 하지만, 눈으로 알아요. '고맙다'라고, '사랑한다'고요.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내릴 차례였다.
"젊은이, 오늘 아침 당신이 제 손을 잡아준 것도 하느님의 손길이에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신은 당신을 통해 일하시고, 당신도 신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어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할머니가 내린 후, 민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엔 아직 할머니의 떨림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할머니를 지탱했던 자신의 힘이 느껴졌다.
'나를 통해 일하신다...'
민준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15년 동안 이 지하철을 타고, 이 손잡이를 잡고, 이 자리에 선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그는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는 의미가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민준은 평소와 다른 아침을 맞았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했고, 신입사원의 서류를 함께 검토해 주었다. 점심시간엔 혼자 먹던 식사를 동료와 함께했다.
저녁, 집에 돌아온 민준은 아내에게 꽃을 건넸다.
"갑자기 왜?"
"그냥. 고마워서."
"뭐가?"
"내 옆에 있어줘서."
아내의 눈이 촉촉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렸던 온기가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날 밤, 민준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이런 순간들 속에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그 손을 통해 자신도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일상 속 신의 현현이 아닐까.
민준은 내일 아침에도 같은 지하철을 탈 것이다. 같은 손잡이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의미는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를, 그리고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별이 빛났다. 민준은 오랜만에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