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신의흔적(3)

비 오는 날의 우산

by 이 범


강태호는 32세 변호사였다. 로펌에서 일하며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성공, 돈, 명예.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없었다.

"승소했습니다!"

법정을 나서며 동료들이 축하했지만, 태호는 공허했다. 의뢰인은 대기업이었고, 상대는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였다. 법적으로는 이겼지만, 도덕적으로는 진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태호는 우산이 없었다.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모두 만차였다. 그는 정장 재킷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잠깐만요!"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늘 법정에서 진 쪽의 변호인이었다.

"우산 없으시죠? 함께 쓰고 가시죠."

"아니, 괜찮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이 저희 쪽이잖아요. 그냥 가세요. 제가 따라갈게요."

태호는 난처했다. 오늘 상대편 변호인과 우산을 같이 쓴다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비는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작은 우산 아래서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다. 처음엔 침묵이 흘렀다.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죄송합니다. 결과가..."

"아니에요.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법이 그런 거죠."

"그래도 찝찝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승리 같아서요."

여변호사는 잠시 걷다가 멈춰 섰다.

"선생님,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모든 사건에서 정의가 이기길 바랐죠. 그런데 깨달았어요. 우리는 신이 아니라는 걸요. 완벽한 정의를 구현할 수 없어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죠."

"그럼 의미가 있나요? 우리가 하는 일에?"

"있죠. 오늘 제 의뢰인은 졌지만, 싸울 수 있었어요. 누군가 옆에서 같이 서줬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을 거예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태호는 우산을 돌려주려 했다.

"제가 택시 잡아드릴게요."

"아니에요. 저 이 우산 선생님 드릴게요."

"네? 왜요?"

여변호사는 가방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 우산 손잡이에 끼웠다.

"오늘 비에 젖은 선생님 보니까, 문득 생각났어요. 예전에 제가 비 오는 날 법원 앞에서 울고 있을 때,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고 갔던 일이요. 그때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다음에 누군가 비 맞고 있으면, 이 우산을 전해주세요'라고요."

"저를 몰랐으면서 왜 우산을 씌워줬을까요?"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아는 사람에게 친절한 건 쉽지만, 모르는 사람, 심지어 오늘 나와 싸운 사람에게 친절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태호는 메모지를 펼쳤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는 의인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같이 내립니다. 신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누구든, 이 우산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이거... 성경 구절 아닌가요?"

"비슷한 거죠. 마태복음 5장 45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저는 무신론자였는데, 그날 이후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변호사는 손을 흔들며 빗속으로 걸어갔다. 태호는 우산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이후, 태호는 그 우산을 소중히 보관했다. 비가 올 때마다 그 우산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비 맞는 사람을 찾았다.

첫 번째는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던 고등학생이었다. 태호는 우산을 건네며 메모지를 보여줬다. 학생은 놀란 표정으로 우산을 받았다.

"저... 돌려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다음에 비 맞는 사람 있으면 전해줘. 그게 이 우산의 여행이야."

두 번째는 노숙인이었다. 지하도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노인에게 우산을 건넸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한테 왜 이런 걸 주시오?"

"당신도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세 번째는 임신한 여자였다. 병원 앞에서 비를 피하던 그녀에게 우산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택시를 못 잡아서..."

"조심히 가세요. 산모는 몸조심해야죠."

매번 우산을 건넬 때마다, 태호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물질적으로는 잃는 것이었지만, 마음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 우산을 사서 같은 메모지를 붙였다.

6개월 후, 태호는 로펌을 그만뒀다. 동료들은 미쳤다고 했다.

"파트너 직전인데 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

태호는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소였다. 수입은 줄었지만, 삶은 풍요로워졌다.

어느 비 오는 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 익숙한 우산을 들고 있었다.

"변호사님, 혹시 이 우산 기억하세요? 2년 전에 제가 고등학생일 때 받았던 건데, 여행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오늘 변호사님 사무실 앞에서 비 맞는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가 '이거 여기 변호사님 거 아니냐'라고 하시더라고요."

태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산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이제 이 우산은 여행을 많이 했구나. 고마워, 돌려줘서."

"변호사님,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우산 나눠주고, 무료 상담하고. 돈이 안 되잖아요."

태호는 창밖의 비를 바라봤다.

"비는 모두에게 내리잖아.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신의 사랑이 그렇듯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구에게나 같은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사람."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태호는 우산을 벽에 걸어두었다. 그 우산은 이제 사무실의 상징이 되었다.

비 오는 날마다, 태호는 그 우산을 보며 생각한다. 신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이런 작은 우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를 적셔주는 비를 막아주고, 그 따뜻함이 계속 전달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 속 신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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