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의 침묵
지친 영혼
새벽 2시, 간호사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박수진은 차트를 정리하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29세. 대형 병원 암 병동 간호사 3년 차. 오늘도 밤근무였다.
"수진아,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선배 간호사 김미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피곤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수진은 지쳐 있었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이. 특히 이곳, 암 병동에서 일하는 3년 동안 그녀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처음엔 울었다. 환자가 떠날 때마다 화장실에 숨어서 울었다. 하지만 이젠 울지도 않았다. 울 기운조차 없었다.
307호. 차트에 적힌 이름은 이상훈, 44세, 췌장암 말기. 수진은 그 병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들어가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웠다. 이상훈 씨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이.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이상훈 씨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45층 병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 살아 숨 쉬는 도시. 하지만 이 병실 안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상훈 씨, 링거 확인하러 왔어요."
"... 네."
짧은 대답. 이상훈 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수진은 익숙한 동작으로 링거를 확인하고, 혈압을 재고, 체온을 쟀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었다. 환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대하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세요?"
"아니요. 약 때문에 괜찮아요."
"가족분들 오셨다 가셨어요?"
"... 가족 없어요."
수진은 말문이 막혔다. 차트에는 적혀 있었다. '보호자 없음'. 하지만 직접 듣는 것은 달랐다. 혼자. 이 사람은 혼자 죽어가고 있었다.
병실을 나오며 수진은 가슴이 답답했다.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할까. 착한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이런 일을 그냥 보고만 계실까.
"수진 씨, 오늘 근무 끝났으니까 빨리 들어가."
미정 선배가 등을 토닥였다.
"네, 선배님도 고생하셨어요."
수진은 간호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밤 2시의 병원 복도는 고요했다. 가끔 병실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 간병인의 발소리, 그리고 자신의 발소리만이 복도를 채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45층에서 1층까지. 긴 하강이었다. 수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자야지. 내일 오후 2시에 또 출근이야.'
딩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침묵 속의 만남
문이 열리자, 수진은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밤 2시에, 45층에.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깔끔한 회색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성경책을 들고 계셨다.
"아,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수진은 고개를 저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니에요."
1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침묵이 흘렀다. 수진은 피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섰다. 45층에서 1층까지는 약 2분. 그 짧은 시간만 버티면 집에 갈 수 있었다.
"힘드시죠?"
갑자기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수진은 고개를 들었다.
"네?"
"간호사님 표정을 보니 많이 지쳐 보이시네요. 오늘 특별히 힘든 일이 있으셨나 봐요."
수진은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힘든 일? 매일이 힘들었다. 오늘만 특별히 힘든 게 아니었다.
"괜찮아요. 늘 이래요."
"늘 힘드시다는 말씀이신가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수진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왜 울고 있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저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 그 따뜻함에 무너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왜 이러는지..."
수진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환자 앞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낯선 사람 앞에서 우는 자신이 한심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깨끗하게 다려진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수진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손수건에서는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울어도 괜찮아요. 우는 것도 치유의 한 방법이니까요. 간호사님, 당신은 매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주하시잖아요. 그 고통이 당신 안에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수진은 손수건을 꽉 쥐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늦은 시간에 병원에, 그것도 45층 암 병동에 무슨 일로 계실까.
"할아버지는... 환자분이세요?"
"아니요. 저는 환자가 아니에요."
"그럼 보호자세요?"
"그것도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는 목사입니다. 매주 화요일 밤, 이 병원에 와서 환자분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죠."
"밤에요? 이 시간에요?"
"네. 30년째 그렇게 하고 있어요."
30년. 수진은 놀라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30년이면... 그것도 매주.
"왜요? 왜 그렇게 하세요?"
할아버지는 손에 든 성경책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제 아내가 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거든요. 30년 전에. 바로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병실로 매일 면회를 왔었죠. 2년 동안이요."
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30층, 25층, 20층. 하지만 두 사람은 숫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깨달음의 순간
"아내는 유방암이었어요. 45살이었죠. 우리 결혼 20주년 되던 해였어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저는 하느님을 원망했어요.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아내는 평생 착하게만 살았거든요. 교회에서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나쁜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런 사람이 왜 고통받아야 하나고 매일 하느님께 따졌어요."
수진은 공감이 갔다. 자신도 똑같은 질문을 매일 했으니까.
"2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았어요. 아내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봤고, 체중이 30킬로나 빠지는 걸 봤고, 고통으로 밤새 신음하는 걸 들었어요. 그때마다 저는 무력했어요. 남편으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요."
엘리베이터가 15층을 지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아내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이었어요. 저는 여기 45층 병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죠. 아내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어요. 그때 아내가 제 손을 잡더니,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말했어요."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보. 나는 이제 곧 떠나요.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이제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거예요. 오히려 당신이 걱정이에요. 당신도 자유로워져야 해요. 나를 보내고 나서, 당신만의 삶을 살아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어떻게 당신 없이 살아?' 그랬더니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엘리베이터가 10층을 지나갔다.
"'여보, 이 병원에는 나 같은 사람이 수백 명이에요. 고통받는 사람들, 두려워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 어떨까요? 내가 받았던 위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도 자유로워질 거예요.'"
5층, 4층, 3층.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제 손을 잡은 채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어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어요.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조용히 떠났어요."
2층, 1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다시 버튼을 눌렀다. 45층.
"그래서 저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어요. 매주 화요일 밤, 이 병원에 와서 각 층을 돌며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30년 동안요?"
"네. 처음 몇 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의무감으로 했어요. 아내와의 약속이니까. 하지만 5년쯤 지나니까 깨달았어요. 제가 그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저를 위로하고 있다는 걸요."
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환자들이 할아버지를 위로한다고요?"
"네. 고통 속에서도 웃는 환자들을 봤어요.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걱정하는 어머니들을 봤어요. 죽음 앞에서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버지들을 봤어요. 그들을 보면서 저는 삶의 의미를 다시 배웠어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남기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요."
엘리베이터가 다시 4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지만 할아버지는 나가지 않았다.
"간호사님, 당신도 힘드시죠? 매일 환자들의 고통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끼시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시죠?"
수진은 숨이 막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아는 걸까.
"맞아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환자들의 병을 고칠 수도 없고, 고통을 없애줄 수도 없고, 죽음을 막을 수도 없어요. 그냥...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할아버지는 수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니에요.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요."
"뭔데요?"
"곁에 있어주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게 전부예요."
할아버지는 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환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건 고통이 아니에요. 외로움이에요. 혼자라는 느낌이에요. 당신이 그들 곁에 있어주면, 그들은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 그들은 버틸 수 있어요.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기적이에요."
"하지만..."
"하느님은 기적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게 아니에요. 때로는 당신 같은 간호사를 통해서, 저 같은 늙은 목사를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일하세요. 당신이 오늘 환자의 손을 잡아줬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에요."
수진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저... 할아버지와 함께 가도 될까요? 기도하시는 거 옆에서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함께 가요."
침묵이 말하는 것
두 사람은 45층에서 내렸다. 할아버지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각 병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묵 속의 기도였다.
451호, 452호, 453호. 할아버지는 각 병실마다 멈췄다. 때로는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환자가 잠들어 있으면 그냥 기도하고 지나갔다. 깨어 있으면 조용히 들어가 손을 잡아주었다.
"안녕하세요. 기도를 드리러 왔습니다."
"누구세요?"
"그냥 지나가던 목사입니다. 잠깐 기도해도 될까요?"
"... 네."
대화는 짧았다. 할아버지는 환자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했다. 길지도 않았다. 1분, 2분. 그러고 나서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수진은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기적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병을 고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도 기적이었다.
307호 앞에 섰을 때, 수진이 말했다.
"이 병실 환자분은... 특별해요."
"어떻게요?"
"혼자 세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면회 온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상훈 씨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수진이 들어와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상훈 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람들을 보며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누구세요?"
"저는 이 병원에 기도를 드리러 다니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제가 담당 간호사예요, 이상훈 씨."
이상훈 씨는 수진을 알아봤다. 매일 밤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 하지만 제대로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어요."
"알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그냥 앉아 있어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허락도 받지 않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수진도 반대편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이었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저 앉아서 이상훈 씨를 바라봤다. 판단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이었다.
한참 후, 이상훈 씨가 입을 열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 같은 사람한테."
"당신은 '저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에요."
"소중하다고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무슨 소중해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나는 혼자예요. 혼자 살다가 혼자 죽을 거예요."
이상훈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제일 무서운 게 그거예요. 혼자 죽는 게. 아무도 내 마지막을 지켜주지 않는 게. 죽고 나서도 한참 후에나 발견되는 게."
할아버지는 조용히 이상훈 씨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예요. 보면 알잖아요. 나는..."
"제가 있어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제가 매주 화요일마다 여기 올 거예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할아버지는 수진을 바라봤다. 수진은 이상훈 씨의 다른 손을 잡았다.
"저도 있어요. 매일 밤 올게요. 야근 아닐 때도 올게요."
이상훈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44년을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여기 있다는 것.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왜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왜냐고요?"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예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그날 밤, 세 사람은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말은 많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었다. 이상훈 씨는 처음으로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흘렀다. 수진은 약속을 지켰다. 매일 밤 307호에 들렀다. 일과 중에도 들렀고, 야근이 아닌 날에도 들렀다. 이상훈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 청년 시절 꿈, 후회되는 일들, 행복했던 순간들. 수진은 들어줬다. 판단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그저 들어줬다.
할아버지 목사도 매주 화요일마다 왔다. 때로는 성경을 읽어주고, 때로는 그냥 앉아 있었다. 이상훈 씨는 처음엔 믿음이 없다고 했지만, 점차 마음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기도를 듣고, 때로는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어느 화요일 밤, 이상훈 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혈압이 불안정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수진은 할아버지에게 연락했다. 할아버지는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상훈 씨의 양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무섭지 않아요, 이상훈 씨. 우리가 여기 있어요."
이상훈 씨는 산소마스크 너머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평생 혼자였는데... 마지막은 혼자가 아니네요..."
"네, 혼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거예요. 하느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조용히 기도를 시작했다. 수진도 함께 기도했다. 이상훈 씨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새벽 4시 23분, 이상훈 씨는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조용히 떠났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장례식은 소박했다. 참석자는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 목사, 수진, 그리고 몇몇 간호사들. 하지만 이상훈 씨는 혼자 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를 배웅했고, 기억할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수진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야근이 아니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45층 암 병동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걸으며 각 병실을 바라봤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이상훈 씨들이 있을까. 혼자 고통받고, 혼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수진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45층에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각 층에서 버튼을 눌러 멈췄다. 40층, 35층, 30층, 25층, 20층, 15층, 10층, 5층.
각 층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수진은 복도를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할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이 층에 계신 모든 분들이 평안하기를.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하기를.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기를."
1층에 도착했을 때, 수진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 의미 있다는 것을, 자신도 누군가의 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수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피곤했지만,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무기력한 눈빛이 아니었다. 거기엔 희망이 있었다.
그날 이후, 박수진은 달라졌다. 여전히 3교대 근무를 했고, 여전히 힘들었다. 하지만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더 많이 웃었고, 더 많이 손을 잡아주었고, 더 많이 들어주었다.
5년 후, 수진은 여전히 그 병원 암 병동에서 일하고 있다. 많은 동료들이 떠났지만, 수진은 남았다. 왜냐하면 이제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매주 화요일 밤, 할아버지 목사는 여전히 병원에 온다. 이제 85세가 되었지만, 35년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수진은 가끔 할아버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다. 45층에서 1층까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침묵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그 침묵은 기도로 가득 차 있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신이 말하고 계신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네 곁에 있다.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