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신의흔적(6)

도서관의 책갈피 (1)

by 이 범

도서관의 책갈피
끝없는 낙방(落榜)
2024년 11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정수아는 오늘도 도서관으로 향했다. 26세. 취업 준비생 3년 차. 아니, 정확히는 백수(白手) 3년 차였다.
"수아야, 오늘도 도서관 가?"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엄마. 오늘은 금융공기업 자소서(自所書, self-introduction) 마감이에요."
"그래... 힘내라. 이번엔 꼭 될 거야."
어머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이번엔 꼭 될 거야.' 하지만 수아는 알았다. 어머니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위로일 뿐이라는 것을.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30분 거리. 수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부러웠다. 저들에게는 갈 곳이 있었다. 자신은? 3년째 같은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안 될까.'
수아는 자책했다. SKY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도 아니었다. 지방 사립대 경영학과 졸업. 토익(TOEIC) 900점. 자격증 몇 개. 평범했다. 아니, 평범 이하였다. 요즘 취업 시장에서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봉천 열람실(閱覽室)'. 24시간 운영하는 구립 도서관이었다. 수아는 3년 동안 이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5층 구석자리. 그녀만의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자기소개서 파일을 열었다. 빈 화면이 그녀를 맞았다.
"지원 동기(志願動機, application motive)를 작성하시오. (1000자 이내)"
수아는 한숨을 쉬었다. 지원 동기? 솔직히 말하면 '일자리가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거창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회사에 대한 열정, 비전, 꿈. 하지만 수아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취직하고 싶을 뿐이었다.



2시간을 끙끙대며 썼다. 진부한 문장들. '귀사의 핵심 가치(core value)와 제 인생 목표가 일치하여...', '글로벌 경쟁력(global competitiveness)을 갖춘 인재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거짓말 같은 문장들을 늘어놓았다.
"휴..."
수아는 자소서를 제출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또 떨어질 것 같았다. 아니, 확신했다. 이런 자소서로는 서류도 통과 못 할 것이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저녁까지 4시간. 수아는 책을 읽기로 했다. 자기 계발서(自己啓發書, self-help book). 요즘 베스트셀러라는 '포기하지 않는 힘'이라는 책이었다.




서가(書架)로 향했다. 3층 자기 계발 코너. 책을 찾았다. 책을 빼는 순간, 뭔가 떨어졌다. 책갈피였다.
'이상하네. 내가 꽂아둔 책갈피가 아닌데.'
수아는 책갈피를 주워 들었다. 낡은 종이였다. 손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15명의 희망(希望)
책갈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You are not alone)"
2021년 3월 - 김지민, 27세, 6 수생
"저는 6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봤습니다. 매년 떨어졌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수없이 울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버텼습니다. 그리고 2021년 3월, 합격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2021년 7월 - 박준호, 30세, 백수 4년 차
"위 메시지를 보고 울었습니다. 저도 4년째 취업 준비 중입니다. 오늘 이 책을 빌리면서 제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언젠가 저도 합격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당신, 우리 함께 힘냅시다."
2021년 11월 - 이서연, 25세, 취준생 2년 차
"두 분의 메시지에 힘을 얻었습니다. 오늘 첫 면접을 봤습니다. 떨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도전했다는 게 뿌듯합니다.
이 책갈피를 보는 당신도 용기 내세요."
2022년 2월 - 박준호 (again)
"저 박준호입니다. 7개월 전 메시지를 남긴 사람입니다.
합격했습니다! IT 기업 개발자로요!
여러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기적은 옵니다."
2022년 4월 - 최민수, 28세, 백수 5년 차
"준호 님 축하드립니다. 저는 5년째입니다. 솔직히 희망이 안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갈피를 보니 조금 힘이 나네요.
조금만 더 버텨보겠습니다."
2022년 8월 - 이서연 (again)
"서연입니다. 11월에 메시지 남긴 사람이에요.
합격했어요! 마케팅 회사예요!
민수 님,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 차례도 꼭 올 거예요."
2022년 10월 - 정하늘, 24세, 취준생 1년 차
"이 책갈피 너무 감동적이에요. 저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힘들어요.
선배님들 메시지 보고 힘내겠습니다."
2023년 1월 - 최민수 (again)
"민수입니다. 합격했습니다. 중소기업이지만 정규직입니다.
하늘 님, 그리고 이 책갈피를 보는 모든 분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간은 반드시 옵니다."
2023년 5월 - 강태준, 26세, 재수생
"수능 재수 중입니다. 작년에 실패했어요. 너무 힘듭니다.
이 책갈피 보고 울었어요. 저도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2023년 9월 - 윤지아, 29세, 경력단절 여성
"결혼 후 7년 만에 재취업 준비합니다. 두렵고 떨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이야기가 용기를 줍니다."
2023년 12월 - 강태준 (again)
"태준입니다. 대학 합격했습니다! 서울 소재 대학이에요!
지아 님, 응원합니다!"
2024년 3월 - 송민재, 31세, 백수 6년 차
"31살입니다. 6년째 방황 중입니다.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책갈피를 믿어보겠습니다."
2024년 6월 - 윤지아 (again)
"지아예요. 합격했어요! 파트타임이지만 시작입니다!
민재 님, 나이는 숫자일 뿐이에요. 31살, 충분히 젊어요!"
2024년 8월 - 한소희, 23세, 취준생 6개월 차
"이제 시작했는데 벌써 지쳐요.
하지만 이 책갈피의 기적을 믿어볼게요."
2024년 10월 - 송민재 (again)
"민재입니다. 드디어... 드디어 합격했습니다.
소희 님, 그리고 이 책갈피를 보는 모든 분들께.
기적은 존재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수아는 책갈피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눈물이 났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15명의 이야기. 그들도 수아처럼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버텼다. 그리고 결국 해냈다.
수아는 책갈피를 꼭 쥐었다. 가슴이 뜨거웠다. 3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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