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신의흔적 (12)

엘리베이터의 기도

by 이 범


17층에서 멈춘 시간
오전 9시 5분, 엘리베이터가 17층에서 멈췄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10초가 지나고, 20초가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누군가 물었다.
안에는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이수진, 38세. 백화점 화장품 매장 판매사원. 늦잠을 자서 출근이 늦어진 참이었다. 오늘은 특히 중요한 날이었다. 오전 10시에 VIP 고객과의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고객 한 명이 한 달 매출의 10%를 차지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고객이었다.




강민호, 52세. 건물 관리소장. 출근하자마자 엘리베이터 점검 일정을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아내는 3개월 전 교통사고로 입원 중이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이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




정아라, 29세. 법률사무소 신입 변호사. 오늘 오전 9시 30분에 첫 재판이 있었다. 인생 첫 변론이었다. 7년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고, 오늘이 그 첫 무대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철수, 67세. 이 건물에서 청소 일을 하는 미화원.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잠깐 휴게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허리가 아팠지만, 참아야 했다. 손자의 학원비를 대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지우, 24세.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취업은 요원했다. 오늘도 지원했던 회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누가 비상벨 좀 눌러봐요."
수진이 말했다.
민호가 비상벨을 눌렀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네..."
다시 눌렀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관리실에 전화해 볼게요."
민호가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안 돼요. 여기 신호가 안 잡혀요."
다른 사람들도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모두 신호가 없었다.
"어떻게 하죠?"
아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곧 발견될 거예요."
민호가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갑자기 답답해졌다. 5명이 타기에는 넓지 않은 공간. 그리고 멈춰 있다는 사실이 그 공간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
수진은 시계를 봤다. 9시 7분. 10시까지는 53분 남았다. 지금 나간다고 해도 준비할 시간이 빠듯했다.
'제발... 빨리 나가야 하는데...'




갇힌 시간 속의 사람들
15분이 지났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비상벨도 작동하지 않았고, 핸드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아라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9시 30분까지 법원에 도착해야 했다. 늦으면 재판이 연기될 수도 있었다. 첫 재판에서 그런 실수를 한다면...
'안 돼. 절대 안 돼.'
철수는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 아침부터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일자리를 잃을까 봐.
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피곤했다. 어젯밤 편의점에서 10시간을 일했고, 그 전날은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웠다. 몸이 한계였다.




"괜찮아요?"
수진이 지우에게 물었다.
"네... 그냥 좀 피곤해서요."
"힘내세요. 곧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수진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민호는 계속 비상벨을 눌러봤다. 문도 두드려봤다. 소리도 질러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해요. 이 시간에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오늘 무슨 날인가요?"
철수가 물었다.
"아, 맞다. 오늘 건물 전기 점검 날이에요."
민호가 말했다.
"전기 점검?"
"네.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일부 층의 전기를 차단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미리 통보했어요."
"그럼 지금 전기가 나간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비상벨도 안 되고..."
"언제 복구되는데요?"
"10시요."
"10시?"
수진이 놀라서 물었다.




"네. 10시에 전기가 다시 들어와요."
수진은 절망했다. 10시면 이미 늦는다. VIP 고객과의 약속 시간이다.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9시 30분 재판. 절대 늦을 수 없는 시간.
"그럼 우리 여기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엘리베이터 점검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민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좁은 공간. 답답한 공기. 그리고 멈춰버린 시간.


마음의 문이 열리다
20분이 지났다.
수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10시에 나간다. VIP 고객은 10시에 온다. 연락할 방법도 없다. 고객은 기다리다가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한 달 매출의 10%. 그것은 곧 자신의 보너스에 직결되었다. 보너스가 없으면 이번 달 카드값을 내기 힘들었다.
'왜 하필 오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저기... 다들 힘드시죠?"
지우였다. 바닥에 앉아 있던 지우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도 힘들어요. 솔직히... 오늘 또 탈락 통보받았거든요. 취업."
"..."
"50군데 넣었는데, 다 떨어졌어요.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부모님한테는 거짓말했어요. 면접 잘 보고 있다고. 곧 붙을 것 같다고. 근데 사실은... 서류에서 다 떨어져요."
수진은 지우를 바라봤다. 24세.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였다.
"학생, 괜찮아요?"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지우가 울먹였다.
"지금 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처럼... 제 인생도 갇힌 것 같아요. 출구가 안 보여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라가 말했다.
"저도... 사실 두려워요."
"네?"
"오늘 첫 재판이거든요. 7년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는데... 첫 재판에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만약 실수하면... 의뢰인한테 피해를 주면... 그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요."
수진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저도 힘들어요."
"네?"
"오늘 중요한 고객이 있어요. 10시에. 근데 이렇게 갇혀 있으면... 놓치게 돼요."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고객 하나가 제 한 달 매출의 10%예요. 보너스도 거기에 달려 있고. 카드값도 내야 하고. 애들 학원비도 내야 하고..."
눈물이 났다.
"왜 하필 오늘인지... 왜..."
철수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래요."
모두가 철수를 바라봤다.
"저는 손자 학원비를 대주기로 했어요. 아들이 사업을 실패해서... 손자가 학원을 못 다니게 됐거든요."
철수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청소 일을 해요. 허리가 아파도 참아요. 손자가 친구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았으면 해서요."
민호도 입을 열었다.
"저는... 아내가 3개월 전에 사고를 당했어요."
"..."
"지금 입원 중이에요. 병원비가... 한 달에 300만 원이에요. 이 일을 잃으면... 아내를 돌볼 수가 없어요."
민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오늘 전기 점검 날인 줄 알면서도... 엘리베이터 점검을 미뤘어요. 혹시 문제 생기면 제 책임이 될까 봐 두려웠어요."
좁은 엘리베이터 안.
다섯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모두가 힘들었다.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혼자라고 생각했었다.


함께 나누는 무게
지우가 말했다.
"우리... 다 힘드네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지우가 계속 말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조금 나은 것 같아요."
"네?"
"혼자만 힘든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수진이 지우를 바라봤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아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제가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다들 두려워하시는 거죠?"
"그럼요."
철수가 말했다.
"인생이 원래 두려운 거예요. 나이 먹어도 마찬가지예요."
"정말요?"
"그럼요. 67세인 저도 매일 두려워요. 내일 일자리가 없어지면 어쩌나, 손자한테 실망을 주면 어쩌나..."
민호도 말했다.
"맞아요. 52세인 저도 그래요. 아내를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매일 그 생각뿐이에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달랐다. 답답한 침묵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침묵이었다.
지우가 말했다.
"근데...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요?"
"우리가 이렇게 갇혀 있는데... 조금 덜 답답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니까."
수진이 미소 지었다.
"정말 그러네요."
"저도요."
아라가 말했다.
"처음에는 10시가 되어야 한다는 게 지옥 같았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철수가 웃었다.
"우리가 친구가 된 건가요?"
"친구라기보다는..."
민호가 말했다.
"동료? 같은 배를 탄 사람들?"
"맞아요."
지우가 말했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 근데 모두 각자의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수진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우의 피곤한 얼굴.
아라의 떨리는 손.
철수의 구부정한 허리.
민호의 걱정스러운 눈빛.
모두가 힘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 힘내요."
수진이 말했다.
"네?"
"이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면... 각자의 전쟁터로 다시 가야 하잖아요."
"맞아요."
"그럼 힘내요. 우리 같이."
아라가 말했다.
"근데 어떻게 힘을 내요?"
수진은 잠시 생각했다.
"일단... 혼자가 아니라는 거 기억해요. 우리 모두 힘들다는 거."
"맞아요."
지우가 말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힘들어도."
철수가 말했다.
"왜냐하면..."
민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한테는 가족이 있었다.
아라한테는 의뢰인이 있었다.
지우한테는 부모님이 있었다.
철수한테는 손자가 있었다.
민호한테는 아내가 있었다.
"맞아요. 우리한테는 이유가 있어요."
수진이 말했다.
"힘들어도 계속 가야 하는 이유."


문이 열리는 순간
9시 55분.
엘리베이터 안의 다섯 사람은 함께 앉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50분 동안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고, 서로의 아픔을 나눴다.
"10시 되면 전기 들어온대요."
민호가 말했다.
"네. 이제 5분 남았네요."
아라가 시계를 봤다.
"나가면... 다들 어디로 가세요?"
지우가 물었다.
"저는 백화점이요. 늦었지만... 가야죠."
수진이 말했다.
"저는 법원이요. 재판은 늦겠지만...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주시겠죠."
아라가 말했다.
"저는 관리실이요. 사과문부터 써야겠어요."
민호가 웃었다.
"저는 청소하러 가야죠."
철수가 말했다.
"저는... 집에 가서 자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다시 이력서 넣을 거예요."
지우가 말했다.
"50군데 더요?"
"네. 51번째에는 붙을 수도 있잖아요."
모두가 웃었다.
그때, 불이 켜졌다.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나가네요."
"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느껴졌다.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바깥은 환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다섯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럼... 다들 힘내세요."
수진이 말했다.
"네, 언니도요."
지우가 대답했다.
"변호사님도 재판 잘하세요."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허리 조심하시고요."
"하하, 고맙습니다."
"관리소장님도... 아내분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다섯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50분 동안 함께 갇혀 있었던 사람들.
처음에는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위로가 되었던 시간.
"그럼..."
"네..."
하나씩 흩어졌다.
각자의 길로.
각자의 전쟁터로.
에필로그 - 각자의 전쟁터에서
수진은 백화점에 도착했다. 10시 20분.
VIP 고객은 없었다. 이미 돌아간 것 같았다.
수진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아, 그러셨어요? 괜찮아요. 사실 저도 조금 늦었거든요."
"네?"
"다시 갈 수 있을까요? 30분 후에?"
"네! 물론이죠!"
전화를 끊고, 수진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감사했다.
아라는 법원에 도착했다. 10시 10분.
재판은 연기되었지만, 판사님이 사정을 들어주셨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고요? 힘드셨겠네요. 오후에 다시 하시죠."
"감사합니다, 판사님."
아라는 준비실로 돌아왔다.
손은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았다.
'나만 두려운 게 아니야. 다들 두려워해. 그래도 계속 가는 거야.'
지우는 집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51번째에는 붙을 수도 있어.'
그 생각이 웃음을 만들었다.
핸드폰을 꺼내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다시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철수는 청소를 계속했다.
허리는 아팠지만, 참을 수 있었다.
'손자를 위해서.'
그 생각이 힘을 주었다.
민호는 관리실에서 사과문을 썼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 전기 점검 날이었잖아요. 괜찮아요."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네요."
퇴근 후, 민호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보."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좋은 일이 있었어."
"좋은 일?"
민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 다섯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것.
"그래서 깨달았어. 우리만 힘든 게 아니구나. 다들 힘들지만, 다들 포기하지 않고 있더라."
아내가 민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 고생 많아요."
"아니야. 당신이 더 고생하지."
"우리 같이 힘내요."
"응. 같이."

월, 화,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