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무소의 악마 (惡魔)
다음 날 아침.
이산갑은 면사무소로 향했다.
일제강점기의 관청 건물.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 현관 위에는 일장기(日章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저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힌다.'
이산갑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성표 면서기를 만나러 왔습니다."
"누구시오?"
"이산갑이라고 합니다."
직원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2층 집무실로 오라고 합니다."
이산갑은 계단을 올라갔다.
복도 끝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 나왔다.
"들어오시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뒤에 박성표가 앉아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사내.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비열한 눈빛.
"오, 이산갑 씨. 무슨 일이오?"
박성표는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김산돌 건으로 왔습니다."
"김산돌? 아, 징용 대상자 말이오?"
"예."
"그게 어쨌다는 거요?"
"산돌이는... 아직 스물둘입니다. 그리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산돌이 가 가면 그 집은 굶어 죽습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오."
박성표는 냉정하게 말했다.
"징용은 국가의 명령이오. 거부할 수 없소."
"하지만..."
"이산갑 씨."
박성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혹시 다른 방법을 찾으러 온 거요?"
"... 무슨 말씀입니까?"
"허허,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돈 이야기 아니오?"
이산갑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정말... 그런 짓을 하고 계십니까?"
"무슨 짓?"
"돈을 받고 징용 명단을 조작하는 짓 말입니다!"
"조용히 하시오!"
박성표가 주위를 둘러봤다.
"함부로 말하면 명예훼손(名譽毁損)으로 고소하겠소!"
"명예? 당신 같은 인간에게 무슨 명예가 있습니까!"
이산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당에 불을 지르고, 윤서영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는 우리 청년들을 지옥으로 보내면서 돈까지 뜯어내는 당신이!"
"닥쳐!"
박성표가 벌떡 일어났다.
"이산갑,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
"나는..."
"당신도 조심하시오. 한도회 운운하면서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고 있소!"
박성표는 책상을 쾅 쳤다.
"시마다 상께 한마디만 하면, 당신도 요시찰 대상(要視察對象)이 될 수 있소!"
이산갑은 박성표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요. 하시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은 대가를 치를 겁니다."
"뭐?"
"이 땅이 다시 우리 것이 되는 날, 당신 같은 친일파들은 모조리 심판받을 겁니다."
"허, 이 미친놈이..."
박성표가 전화기를 집어 들려는 순간.
"잠깐."
이산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돈뭉치였다.
"이게..."
"얼마면 됩니까? 산돌 이를 명단에서 빼는 데."
박성표의 눈빛이 변했다. 탐욕이 번뜩였다.
"음... 오십 원."
"오십 원?"
"그렇소. 그 정도면 빼줄 수 있소."
이산갑은 돈을 세어 책상 위에 놓았다.
"여기 오십 원 있습니다."
박성표는 재빨리 돈을 집어 서랍에 넣었다.
"좋소. 김산돌은 명단에서 빼주겠소."
"감사합니다."
이산갑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 장면을 잊지 않겠다. 반드시 기억하겠다.'
면사무소를 나서는 이산갑의 뒤에서 박성표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허허, 결국 돈으로 해결하는구먼. 위선자 같으니라고."
이산갑은 주먹을 쥐었다.
'나는... 위선자가 맞다. 산돌이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돈을 썼다. 하지만 다른 네 명은 여전히 끌려간다.'
'철수, 영식이, 춘삼이, 용팔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산돌이 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