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신의흔적 (19)

약사의 처방전

by 이 범


동네 약국. 약사 지영은 15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처방전을 받고, 약을 조제하고, 복용법을 설명하고.



오후 5시, 마지막 손님이 들어왔다. 70대 할아버지였다. 손에 처방전을 들고 있었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어르신, 처방전 주세요."

할아버지는 처방전을 건넸다. 지영이 확인하니 당뇨약, 고혈압약, 그리고 항우울제였다.

약을 조제하면서 지영은 할아버지를 살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괜찮아요... 아니, 사실 안 괜찮아요."

지영은 조제를 멈추고 할아버지 앞으로 갔다.

"무슨 일이세요?"

할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할멈이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50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제 혼자예요.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안 와요. 할멈이 옆에 없으니까요."

지영은 가슴이 먹먹했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항우울제를 처방했어요. 근데요, 약으로 이 마음이 나아질까요?"

지영은 약봉지를 내려놓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어르신, 약은 몸을 돕는 거예요. 하지만 마음은... 시간과 사랑이 필요해요."

"누가 나를 사랑해요? 이제 혼자인데."

"어르신을 사랑하는 분이 계세요. 지금도."

"누구요?"

"할머니요. 하늘에서 어르신을 보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지영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하나님도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평생 교회 한 번 안 가본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아실까요?"

"아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시고 사랑하세요.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영은 약국 서랍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슬픔을 이겨내는 기도문』이었다.

"이거 드릴게요. 제가 힘들 때 읽는 거예요. 어르신도 읽어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할아버지는 책자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약사님은 왜 이렇게 저를 도와주세요?"

지영은 미소 지었다.

"제 아버지도 어머니 돌아가시고 같은 상태였거든요. 그때 동네 약사님이 아버지를 많이 위로해 주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약사가 됐어요. 약으로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돌보는 약사가 되고 싶어서요."

할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약사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약국을 찾았다. 약을 받으러 오는 게 아니라, 지영과 이야기하러 왔다.

"약사님, 그 책자 읽었어요. 기도를 해봤어요.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라고요."

"다행이에요, 어르신."

"그리고요, 할멈 사진 앞에서 매일 이야기해요. '여보, 나 오늘 이런 일 있었어' 하고요. 그러니까 덜 외로워요."

지영은 할아버지의 변화를 지켜보며 기뻤다.

3개월 후, 할아버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지영이 다니는 교회였다.

"약사님이 다니는 교회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르신, 환영합니다."

6개월 후, 할아버지는 교회 어르신 모임을 만들었다. '배우자를 잃은 이들의 모임'. 같은 슬픔을 겪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약사님 덕분에 제가 또 살아갈 이유를 찾았어요. 저처럼 힘든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지영은 눈물을 흘렸다.

1년 후, 할아버지는 항우울제를 끊었다. 의사도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좋아지셨어요?"

"좋은 약사를 만났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약국에 꽃다발을 들고 왔다.

"약사님, 이거 받으세요."

"어르신, 이게 뭐예요?"

"감사의 표시예요. 약사님이 제게 준 건 약이 아니라 희망이었어요. 제 생명을 구해주셨어요."

지영은 꽃을 받으며 생각했다.




'내가 약사가 된 이유가 이거구나. 약으로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는 것.'

약국 벽에는 의료인의 기도문이 걸려 있었다.

"주님, 저를 당신의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지영은 그 기도를 매일 읽는다.

약사의 처방전에는 약 이름만 적혀 있지 않다. 사랑, 희망, 위로도 함께 처방된다.



신은 약국에도 계시고, 치유하는 손길 속에도 계신다.

월, 화,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