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의 후예들

이준호의 도시

by 이 범


성읍을 세운 사람들
이준호는 건축가였다.
서울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40대 중반의 성공한 남자. 그의 이름으로 설계된 빌딩들이 강남 곳곳에 서 있었다.
"이준호의 도시"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가 설계한 건물들로 가득한 거리를.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유언이 그를 괴롭혔다.
"준호야, 우리 집안은... 카인의 후손이다."
임종 직전, 할아버지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6.25 때. 그 피가 우리 핏줄에 흐른다."
"할아버지, 무슨..."
"너도 조심해라. 카인의 피는... 도시를 세우지만, 평화는 세우지 못한다."
준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성경을 펼쳤다.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카인이 도시를 세웠다고?'
준호는 놀랐다.
살인자 카인. 하느님께 저주받은 그가 문명을 시작했다는 것이.
"우리도 그래."
어느 날 아내 민지가 말했다.
"당신이 세운 빌딩들, 멋있어. 근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무슨 소리야?"

"당신 설계한 오피스텔, 입주자들 불만 많대. 너무 비좁고, 햇빛도 안 들고."
"수익성을 생각해야지. 건축주가 돈을 벌어야..."
"그래, 돈. 돈만 생각하니까 사람은 생각 안 하는 거야."
민지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후손들의 재능
준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장남 진우는 스물여덟. 목장을 운영했다.
"아버지, 저 회사 안 다닐래요. 제주도에 목장 차리고 싶어요."
"뭐? 서울대 경영학과 나와서 목장을?"
"전 동물이 좋아요. 사람들에게 건강한 유기농 우유를 주고 싶어요."
진우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집짐승을 치며 천막에 사는 이들의 조상..."
준호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차남 진성은 스물다섯. 음악을 했다.
"아빠, 저 음대 갈래요."
"음대? 너 이과인데?"
"바이올린 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요."
진성은 바이올린을 켰다.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비파와 피리를 다루는 모든 이의 조상..."
준호는 또 성경을 떠올렸다.
막내딸 진아는 스물. 공대생이었다.
"아빠, 저 로봇공학 전공할래요."
"오, 그거 좋지. 아빠처럼 건축 쪽으로..."
"아니요. 장애인을 돕는 로봇 만들고 싶어요. 의족, 의수, 그런 거요."
진아는 작은 기계 부품들을 만지며 말했다.
"기술은 사람을 위한 거잖아요."
"구리와 쇠로 된 온갖 도구를 만드는 이..."
준호는 세 자녀를 보며 깨달았다.
'우리는 카인의 후손이다. 도시를 세우고, 가축을 치고, 음악을 하고, 도구를 만든다. 문명을 창조한다.'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았다.
"준호 씨."
어느 날 신부님이 찾아왔다.
"당신 설계한 빌딩 때문에 교회가 철거됐어요. 50년 된 작은 성당이었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재개발 계획에..."
"알아요. 법적으로 문제없죠. 근데 그 성당에 다니던 할머니들은 어디로 가야 하죠?"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인의 후손들은 위대한 문명을 세웠어요. 하지만 그 문명 안에 하느님은 계셨을까요?"
신부님의 말이 마음에 꽂혔다.
라멕의 노래
준호의 사촌 형 상철이 사고를 쳤다.
술 취한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
"준호야, 도와줘."
상철이 전화했다.
"피해자가 합의를 안 해. 고소하겠대."
"형, 잘못했으면 책임져야죠."
"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이 지역 유지였어. 내가 감옥 가면 체면이..."
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가족 모임이 열렸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사촌들. 모두 모였다.
"상철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큰아버지가 말했다.
"얼마를 줘서라도 합의해. 우리 집안 명예가 걸린 문제야."
"명예?"
준호가 반문했다.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명예가 먼저입니까?"
"준호야, 네가 뭘 알아.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대로 뭡니까? 카인의 후손입니까?"
방안이 조용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우리 집안이 카인의 후손이라고."
"그게 무슨..."
"증조할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셨어요. 그 피가 우리한테 흐른다고."
준호는 성경을 꺼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이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작은 상처에도 과도하게 복수하고, 명예를 지킨답시고 정의를 외면하고."
상철이 벌떡 일어났다.
"야, 너 지금 나보고 살인자래?"
"아니, 우리 모두 그래요. 카인의 후손들은."
준호도 일어섰다.
"우리는 위대한 문명을 세웠어요. 도시, 음악, 기술. 근데 그 안에 사랑은 없었어요. 정의도 없었어요. 하느님도 없었어요."
"허튼소리 말고 나가!"
큰아버지가 소리쳤다.
준호는 집을 나왔다.

새로운 도시
그날 밤, 준호는 오랫동안 기도했다.
"하느님, 저도 카인의 후손입니다."
"저도 도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안 계신 도시를요."
"용서해주소서."
다음 날, 준호는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대신 철거된 성당 터를 찾아갔다.
할머니 몇 분이 그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할머니들, 제가 미안합니다."
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성당을 없앴어요. 제 설계 때문에."
"괜찮아요, 청년.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준호는 눈물을 흘렸다.
"제가 새 성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무료로."
"청년..."
"아니, 무료가 아니에요. 제 회개의 표시예요."
준호는 그날부터 달라졌다.
재개발 프로젝트를 재검토했다.
"수익성만 볼 게 아니라, 주민들 삶을 봐야 합니다."
"사장님, 그러면 이익이..."
"이익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새 설계가 나왔다.
좁은 원룸 대신 넓은 공간. 커뮤니티 센터. 작은 공원.
"이러면 투자금 회수가 늦어지는데요?"수연이
건축주가 불평했다.
"천천히 하시죠. 급하면 다른 건축가 찾으세요."
준호는 타협하지 않았다.
어떤 건축주들은 떠났다. 하지만 새로운 이들이 찾아왔다.
"진짜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고 싶어요."
"좋습니다. 함께 해봅시다."
일 년이 지났다.
새 성당이 완공됐다. 작지만 아름다웠다.
"할머니들, 이제 여기서 기도하실 수 있어요."
"고맙네, 청년. 하느님께서 축복하실 거야."
봉헌 미사가 열렸다.
신부님이 강론하셨다.
"카인은 성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성읍에 하느님은 안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성전을 봉헌합니다. 이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이준호 건축가님, 당신은 카인의 후손이지만,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준호는 눈물을 흘렸다.
세 자녀도 함께 있었다.
진우는 목장에서 기른 우유를 가져왔다.
"신부님, 성당에서 쓰세요. 무료예요."
진성은 바이올린으로 찬양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성당을 채웠다.
진아는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경사로를 설계했다.
"아빠, 제가 설치할게요. 모두가 성당에 올 수 있게."
준호는 세 자녀를 끌어안았다.
"너희는 진짜 카인의 후손이구나."
"네?"
"도시를 세우고, 가축을 치고, 음악을 하고, 도구를 만드는. 근데 너희는 다르다. 하느님을 위해, 사람을 위해 하니까."
아이들이 웃었다.
"아빠도 변하셨잖아요."
그날 저녁, 가족은 새 성당 앞에 앉아 있었다.
"아빠, 라멕의 노래 기억나세요?"
진성이 물었다.
"응, 일흔일곱 곱절로 복수한다는..."
"예수님이 그 노래를 바꾸셨어요."
진성이 성경을 펼쳤다.
"베드로가 물었어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어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멕은 일흔일곱 곱절로 복수했지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구나."
"맞아요. 그게 카인의 후손과 예수님의 제자의 차이예요."
그날 밤, 준호는 오랜만에 평안히 잠들었다.
석 달 후.
준호는 사촌 형 상철을 만났다.
"형, 어떻게 됐어요?"
"합의했어. 피해자분한테 사과하고, 치료비 다 내기로 했어."
"잘하셨어요."
"너 말이 맞더라. 우리가... 너무 교만했어."
상철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살아볼게."
준호는 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모두 카인의 후손이에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응?"
"카인에게 표를 찍어주셨듯이,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두 사람은 함께 성당에 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느님, 저희는 카인의 후손입니다."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만들었지만, 당신을 잊었습니다."
"라멕처럼 복수했고, 교만했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용서해주소서."
"이제 저희는 새로운 후손이 되겠습니다."
"일흔일곱 번 용서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아멘."
5년 후.
준호가 설계한 건물들이 상을 받았다.
"가장 인간적인 건축"
"공동체를 살리는 공간"
시상식에서 준호는 말했다.
"저는 카인의 후손입니다."
청중이 웅성거렸다.
"카인은 최초의 도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음악과 기술을 발명했죠. 위대한 문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명에는 하느님이 없었습니다. 사랑도, 정의도 없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돈과 명예를 위해 건축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저를 바꾸셨습니다."
"이제 저는 하느님을 위한, 사람을 위한 도시를 세웁니다."
"카인의 후손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날 밤, 준호는 가족과 함께 식사했다.
진우의 목장은 번창했다. 윤리적 축산으로 유명해졌다.
진성은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봉사 연주를 했다.
진아는 장애인을 위한 로봇을 개발했다. 여러 사람을 도왔다.
"아빠, 우리 참 축복받았죠?"
진아가 말했다.
"응, 카인의 후손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로."
준호는 성경을 펼쳤다.
"카인의 자손들은 위대한 문명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다음 장을 넘겼다.
"셋의 자손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둘 다야."
준호가 말했다.
"카인의 재능을 가졌지만, 셋의 믿음도 가졌어."
"문명을 세우지만, 하느님을 예배해."
"기술을 발전시키지만, 사람을 사랑해."
"복수하지 않고, 용서해."
가족은 함께 기도했다.
"하느님, 저희는 카인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은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재능을, 기술을, 음악을,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일흔일곱 번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그날 밤, 서울의 하늘에 별이 빛났다.
준호가 설계한 건물들 사이로.
그 건물들은 이제 달랐다.
카인의 도시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시였다.
사람이 사는, 사랑이 있는, 용서가 흐르는 도시.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 창세기 4:17*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 창세기 4:24*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 18:22*
*우리는 카인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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