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에든 사람
악으로 가득한 세상
2025년 가을, 서울.
김지훈은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남의 고층 빌딩들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두웠다.
"부장님, 계약서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비서 강태수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괜찮은 거야?"
"물론입니다. 법적으로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하청업체는 망하잖아."
"그게 우리 문제입니까? 계약서에 다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훈은 펜을 들었다. 망설이다가 서명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지훈에게 아내 수진이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별일 없어."
"거짓말. 당신 얼굴 보면 알아요."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작은 회사 하나를 죽였어."
"뭐라고요?"
"계약서 조건을 바꿔서. 법적으론 문제없지만, 그 회사는 망할 거야. 직원 스무 명이 거리로 나가겠지."
수진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했어요?"
"회사 이익을 위해서.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게... 옳은 일인가요?"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딸 민서가 방에서 나왔다.
"아빠, 용돈 좀."
"저번에 준 게 벌써 다 떨어졌어?"
"친구들이랑 놀아야 하잖아."
"넌 맨날 노는 것만 생각하냐?"
"아빠도 맨날 돈 벌 생각만 하잖아!"
민서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요."
"다들 그래. 세상이 원래 이런 거야."
"정말요? 당신 고등학교 때는 안 그랬잖아요."
지훈은 먼 옛날을 떠올렸다
무너지는 것들
다음 날, 지훈은 회사에서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하청업체 사장이 자살했습니다."
비서 태수가 보고했다.
"뭐?"
"어제 계약 파기 통보를 받고... 투신했다고 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유가족이 우리를 고소하려나?"
"법적으로 문제없습니다. 계약서가 완벽하니까요."
"그럼 됐네."
상무가 말했다.
지훈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점심시간, 지훈은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느님..."
그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법적으론 문제없지만... 제가 죽인 겁니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지훈아."
돌아보니 박신부였다. 고등학교 은사였다.
"신부님? 여기는 어떻게..."
"자네 회사에 미사 드리러 왔지. 근데 자네 얼굴이 왜 그래?"
지훈은 무너져 내렸다.
"신부님, 저... 저..."
박신부는 지훈을 안았다.
"울어라. 그냥 울어."
지훈은 사십오 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남 앞에서 울었다.
"신부님,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알고 있다."
"어떻게요?"
"뉴스에 나왔더구나. 하청업체 사장 자살 사건."
박신부는 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만 그런 게 아니야. 이 세상이 다 그래."
"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해.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나 악하기만 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인정하는 거야. 자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지훈은 고개를 숙였다.
"인정합니다. 제가 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