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노씨 가문의 방주

홍수가 그치다

by 이 범


배경 및 인물 소개
백제 무령왕(武寧王) 23년(523년)
웅진성(熊津城) 근처 산골 마을
주인공:
노아(盧亞, 60세): 백제 귀족 출신, 불교 신자
설씨 부인(薛氏夫人, 57세): 노아의 아내
노선(盧善, 32세): 장남
노의(盧義, 29세): 차남
노백(盧白, 26세): 삼남
며느리들과 손자들
혜광 법사(惠光法師, 55세): 고승

물이 내려가기 시작하다
백오십 일째.
방주는 여전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아버님, 언제쯤 끝날까요?"
장남 노선이 물었다.
"모르겠구나. 부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끝나겠지."
노아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끝없는 물.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다.
"저희가 죽을까요?"
"아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
"어떻게 아십니까?"
"믿음(信)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衆生)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날 저녁,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여보, 바람이 붑니다!"
설씨 부인이 소리쳤다.
"정말이구나!"
노아가 밖을 보았다.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부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신다..."
혜광 법사가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모두가 함께 염불했다.
바람은 계속 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물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님! 물이 줄어듭니다!"
차남 노의가 외쳤다.
"정말이냐?"
"네! 어제보다 한 자는 낮아진 것 같습니다!"
노아는 무릎을 꿇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기억해 주셔서."
"자비(慈悲)를 베풀어주셔서."
산에 내려앉다
열흘이 지났다.
물은 계속 빠졌다.
스무날이 지났다.
백오십 일째가 되는 날.
방주가 흔들렸다.
"뭐지?"
"땅에 닿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드디어!"
"살았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노아는 조용히 기도했다.
일곱째 달 열이렛날.
방주는 완전히 멈췄다.
"아버님, 우리 어디에 있는 걸까요?"
"산 위인 것 같구나."
"어느 산입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택하신 곳이니 좋은 곳일 게다."
물은 계속 빠졌다.
열째 달이 되었다.
초하룻날.
"아버님! 저기 봐요!"
삼남 노백이 창문으로 손가락질했다.
산봉우리가 보였다.
물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
"다른 산들도 보이기 시작했구나."
"우리만 살아남은 건가요?"
"아니다. 저 산들도 살아남았다. 땅도 살아남았다."
"사람들은요?"
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비둘기를 보내다
사십 일이 더 지났다.
노아는 결정했다.
"창문을 열어야겠다."
"아버님,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제 괜찮을 것 같다."
노아는 방주 위쪽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아, 바깥 공기구나!"
사람들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노아는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았다.
검은 까마귀.
"가거라. 땅이 마른 곳을 찾아보거라."
까마귀를 창밖으로 내보냈다.
까마귀는 날아갔다.
한참 후 돌아왔다.
다시 날아갔다.
또 돌아왔다.
"까마귀가 왔다 갔다 하는군."
혜광 법사가 말했다.
"아직 땅이 마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잡았다.
하얀 비둘기.
"너는 평화의 새다. 가서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다오."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날아갔다.
한참을 기다렸다.
저녁이 되었다.
비둘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발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인가 보다."
노아는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들였다.
이레를 기다렸다.
칠 일째 되는 날.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너라."
비둘기가 날아갔다.
저녁때가 되었다.
비둘기가 돌아왔다.
"여보! 비둘기가 뭔가 물고 왔어요!"
설씨 부인이 소리쳤다.
노아가 비둘기를 받았다.
부리에 싱싱한 올리브 잎이 물려 있었다.
"올리브 나무잎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땅이 회복되고 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땅이 살아났습니다!"
노아는 또 이레를 기다렸다.
칠 일 후.
세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날아갔다.
저녁이 되었다.
밤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비둘기가 안 돌아옵니다."
"좋은 징조다. 밖에 살 곳을 찾았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도 나가도 됩니까?"
"아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방주에서 나오다
육백일 년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사람들이 눈을 가렸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
노아가 밖을 내다보았다.
땅이 보였다.
말라 있었다.
"땅이 말랐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부처님께 감사드려야겠다!"
하지만 노아는 서두르지 않았다.
둘째 달까지 기다렸다.
스무이렛날.
땅이 완전히 말랐다.
그날 밤, 노아는 또 꿈을 꾸었다.
부처님께서 나타나셨다.
"노아야."
"네, 부처님."
"이제 나와라."
"나가도 됩니까?"
"그렇다. 너와 네 가족, 그리고 모든 생명을 데리고."
"감사합니다, 부처님."
"세상을 다시 채워라. 생명으로.
다음 날 아침.
노아는 가족을 모았다.
"얘들아, 이제 나간다."
"드디어!"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이다."
노아가 문을 열었다.
일 년 만에 처음 여는 문.
삐걱.
밖의 공기가 들어왔다.
노아가 먼저 나갔다.
땅을 밟았다.
"아..."
설씨 부인이 따라 나왔다.
"땅이에요... 단단한 땅..."
아들들이 나왔다.
며느리들이 나왔다.
손자들이 나왔다.
혜광 법사가 나왔다.
총 열아홉 명.
모두가 땅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동물들도 나왔다.
소, 양, 염소...
돼지, 개, 닭...
새들도 날아 나갔다.
비둘기, 참새, 까치...
"모든 생명이 살아있구나."
노아는 감격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산 위였다.
아래로 계곡이 보였다.
멀리 평야도 보였다.
"여기가 어디일까?"
"옛 우리 마을과는 다른 곳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새로운 땅을 주신 것이다."
노아는 돌을 모아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
"무엇 하십니까?"
"제사를 드려야지. 부처님께."
가족들이 모두 도왔다.
제단이 완성되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 중 양 한 마리를 골랐다.
"부처님, 이 생명을 바칩니다."
양을 제물로 바쳤다.
불을 피웠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노아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기억해 주셔서."
"바람을 일으켜 물을 내려주셔서."
"새 땅을 허락해 주셔서."
"저희는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자비롭게 살겠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족들이 함께 염불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날 밤.
노아는 또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
"노아야, 잘 들어라."
"네, 부처님."
"나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생이다. 나는 너그럽게 봐주겠다."
"감사합니다."
"땅이 있는 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씨뿌리고 거두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너희는 살아가거라. 이 땅에서."
"명심하겠습니다."

새로운 백제
일 년이 지났다.
노씨 가문은 새 터전을 잡았다.
산 아래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궜다.
봄에 씨를 뿌렸다.
여름에 김을 맸다.
가을에 거두었다.
겨울에 쉬었다.
"부처님 말씀대로로구나."
노아가 말했다.
"계절이 돌아오는구나."
"네, 아버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 년이 지났다.
마을에 사람들이 늘었다.
손자들이 자라 장가들고 시집갔다.
증손자들이 태어났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여기 사람이 삽니까?"
"그렇소. 누구시오?"
"저희는... 멀리서 왔습니다."
"어디서?"
"옛 웅진성 근처에서요. 홍수 때 산 위로 피신했다가 살아남았습니다."
"오! 당신들도 살아남았소?"
"네. 저희 말고도 여럿 있습니다."
노아는 그들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시오. 함께 삽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은 점점 커졌다.
십 년이 지났다.
노아는 칠십 세가 되었다.
어느 날, 왕의 사자가 찾아왔다.
"노아 어르신이십니까?"
"그렇소."
"성왕(聖王)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예. 홍수에서 살아남으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노아는 왕궁으로 갔다.
성왕이 그를 맞았다.
"노아 경, 그대가 방주를 지은 사람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떻게 알았소? 홍수가 올 것을."
"부처님께서 꿈에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지었소?"
"그렇사옵니다."
성왕은 감탄했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오. 짐의 신하가 되어주시오."
"감사하옵니다만, 소인은 산골에서 살고 싶습니다."
"왜요?"
"부처님께서 그곳에서 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대의 마을을 특별히 보호하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노아는 마을로 돌아왔다.
이십 년이 지났다.
노아는 팔십 세가 되었다.
증손자가 스무 명이 넘었다.
어느 안식일.
온 마을이 모여 법회를 열었다.
노아가 법문을 했다.
"여러분, 제가 육십 세 때 홍수를 겪었습니다."
"백오십 일 동안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바람을 일으켜 물을 내리셨습니다."
"땅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노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러분, 부처님은 중생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악할지라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홍수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계절은 계속될 것이라고."
"씨뿌리고 거두는 일도 계속될 것이라고."
"이것이 부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날 밤, 노아는 일기를 썼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저를 기억해 주셔서."
"물 위에 떠 있을 때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을 보내주셨습니다."
"땅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새 삶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늙었습니다."
"하지만 제 자손들이 이 땅을 채울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를."
"부처님의 약속을."
"대대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노아는 팔십오 세에 입적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혜광 법사가 법문했다.
"노아 거사는 현세의 성인이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방주를 지으라 하시니 지었습니다."
"나오라 하시니 나왔습니다."
"제사를 드리라 하시니 드렸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노아의 증손자가 물었다.
"큰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자비로운 분이셨다."
"어떻게요?"
"모든 생명을 사랑하셨지. 사람도, 짐승도, 새도."
"그래서 방주에 다 태우셨구나."
"그렇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잘 생각했구나."
그 아이는 자라서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했다.
"옛날 백제에 큰 홍수가 있었다."
"하지만 한 의인이 있었다."
"그가 부처님께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백오십 일 동안 물 위를 떠다녔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그를 기억하셨다."
"바람을 일으켜 구원하셨다."
"우리도 기억하자."
"부처님은 중생을 버리지 않으신다."
"자비는 끝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때에 하느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바쳤다. 주님께서 생각하셨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 창세기 8:1-21

기억하심.
이것이 구원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기억하신다.
물 위에 떠 있어도.
절망 속에 있어도.
죽음이 가까워도.
기억하신다.
그리고 바람을 보내신다.
구원의 바람을.
노아는 기억받았다.
우리도 기억받을 것이다.
자비는 끝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월, 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