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서 지키는 길
장남 도준의 출가
칼을 들지 않는 아이
도준은 어려서부터 달랐다.
활발하되 거칠지 않았고, 호기심이 많되 남을 해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무칼을 들고 싸움놀이를 할 때, 도준은 한발 물러서 있었다.
“형, 왜 안 싸워요?”
성준이 물었다.
“싸우지 않아도 이길 수 있잖아.”
“뭘로?”
도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로… 아니면 그냥 돌아서면.”
이민호는 그 말을 우연히 들었다.
아들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내 길을 잇지 않겠구나.’
그 생각에 서운함은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예감만이 남았다.
도준은 죽음을 두려워했다기보다,
죽음이 만들어내는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
북방에서 전사한 병사의 이야기를 들은 날,
그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꼭 사람을 죽여야 나라가 지켜져요?”
윤서영은 한참 침묵하다 답했다.
“지키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란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으면 안 돼요?”
그 질문은 아이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절에서의 만남
열다섯이 되던 해,
도준은 아버지를 따라 남한산성 아래 절에 들렀다.
전투 중 전사한 병사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절은 조용했다.
풍경 소리만이 산바람에 흔들렸다.
그곳에서 한 늙은 승려가 도준을 바라보았다.
“젊은이, 얼굴에 칼자국이 없구나.”
“칼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들지 않았는데도 여기까지 왔구나.”
도준은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그날 밤, 그는 법당에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며칠 뒤부터 그는 몰래 절을 찾았다.
글을 읽고, 경을 듣고,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이민호는 아들의 변화를 느꼈다.
“요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구나.”
“아버지.”
“말해보아라.”
도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칼을 들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밤
그날 밤, 부자는 마주 앉았다.
등불 하나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출가하고 싶습니다.”
이민호의 손이 멈췄다.
“중이 되겠다는 말이냐.”
“예.”
“왜.”
도준은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을 지키고 싶습니다.
殺而守者 我不能也.”
긴 침묵.
이민호는 아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도망도, 반항도 없었다.
오직 결심만이 있었다.
“네가 중이 되면,
이 집안의 장남 자리는 비게 된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조롱도 감당해야 한다.”
“감당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칼로 나라를 지켰다.
너는 무엇으로 지키려 하느냐.”
도준은 조용히 답했다.
“비움으로.”
그 말에,
이민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거라.”
윤서영은 말없이 아들의 옷을 개켜 주었다.
마지막 밤, 그녀는 아들을 끌어안았다.
“두렵지 않니?”
“두렵지만… 가야 할 길 같습니다.”
“그래.”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디에 있든,
너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아라.”
이름을 내려놓다
출가의 날,
도준은 머리를 깎았다.
칼 대신 염주를 쥐었고,
이름 대신 법명을 받았다.
그날, 그는 더 이상 이도준이 아니었다.
산길을 오르며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절을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이 길도 올곧은 길이기를.’
이민호는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칼을 내려놓는 것도,
또 하나의 용기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말했다.
“이 집안의 장남은 벼슬길을 버리고 수행의 길을 택했다더라.”
그러나 이민호는 달리 생각했다.
‘버린 것이 아니다.
지키는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산 위 절에서는
젊은 승려 하나가 새벽마다 종을 쳤다.
그 종소리는
칼 소리보다 낮았으나,
그 무엇보다 오래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