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종소리

잊혔던 종소리

by 이 범


십이월의 찬바람이 뺨을 스치는 저녁이었다.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캐럴송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명동 거리. 서른두 살의 민준은 회사 회식 자리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딸랑딸랑. 익숙한 종소리가 들렸다. 붉은 자선냄비 앞에 선 구세군 자원봉사자가 추위에 떨며 종을 흔들고 있었다. 민준은 무심코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냄비에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과 부딪혔다.
아, 죄송해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짙은 갈색 머리를 한 여자가 미안한 듯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도 지폐가 쥐어져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민준이 먼저 돈을 넣었고, 그녀가 그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자원봉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민준도 화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근처 카페로 이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자선냄비에 기부하는 것이 작은 의식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어려웠거든요. 그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조금이라도 나누는 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 된 것 같아요.
민준은 그녀의 진솔함에 마음이 끌렸다.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학 시절 장학금이 없었다면 학업을 포기했을 거라고. 그날 밤, 두 사람은 눈이 내리는 거리를 함께 걸었다. 냄비의 종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이 년 후, 민준과 수진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날짜는 다름 아닌 십이월 이십오 일, 크리스마스였다. 처음 만난 그날을 기억하고 싶었다. 결혼 초반은 행복했다. 주말이면 함께 시장을 보고, 영화를 보러 갔다. 수진은 민준의 늦은 귀가를 따뜻한 식사로 맞아주었고, 민준은 수진의 학교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은 무뎌졌다. 민준은 승진을 위해 야근이 잦아졌고, 수진은 학교 업무와 교육청 프로젝트로 주말도 반납하기 일쑤였다. 대화는 짧아졌고,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어? 미안, 회의가 늦게 끝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이런 대화가 일상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도 특별한 날이 아니게 되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는 함께 명동에 가서 자선냄비에 기부하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그다음 해부터는 바쁜 일정 때문에 그저 집에서 간단히 식사만 하고 끝났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이는 오지 않았다.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다는 말만 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는 의사의 말에, 두 사람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십오 년이 흘렀다. 민준은 부장이 되었고, 수진은 교감이 되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정작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대화는 업무 이야기와 생활비 이야기로 채워졌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결혼 이십 주년이 다가왔다. 민준은 기념일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수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인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업무 뒤로 밀려난 것 같았다.
십이월 이십사 일 저녁, 민준은 회사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일찍 끝난 자리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아파트로 가는 길, 문득 이십 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눈이 내리던 날, 자선냄비 앞에서 수진을 만났던 그 순간. 내일이 크리스마스구나. 민준은 발걸음을 멈췄다. 명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버스에 올랐다.
같은 시각, 수진도 학교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녀도 지하철역을 지나치며 명동 방향 버스를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그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명동 거리는 이십 년 전과 달라져 있었지만,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민준은 기억 속 그 장소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딸랑딸랑. 귀에 익은 종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리를 따라가자, 붉은 자선냄비가 보였다. 젊은 자원봉사자가 추위에 떨며 종을 흔들고 있었다. 민준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냄비에 넣으려는 순간, 또 누군가 그의 손과 부딪혔다.
어머.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수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진의 손에도 지폐가 쥐어져 있었다.
수진아. 민준 씨.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던 그날, 서툴게 데이트하던 날들, 프러포즈하던 날, 결혼식 날,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간 수많은 날들.
너도 여기에? 응, 그냥 발걸음이 이쪽으로 향하더라.
두 사람은 동시에 돈을 냄비에 넣었다. 자원봉사자가 밝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민준과 수진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십 년 전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민준이 먼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수진이 대답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이십 년 전 그랬던 것처럼. 거리의 불빛이 눈처럼 반짝였고, 캐럴이 흘러나왔다.
기억나?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잊겠어. 이십 년 전 오늘.
정확히는 이십 년 전 내일이지. 십이월 이십오 일.
민준이 걸음을 멈추고 수진을 돌아봤다. 미안해. 왜? 요즘 아니, 지난 몇 년간 너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아. 곁에 있으면서도 함께하지 못했어.
수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도 미안해. 나도 똑같았어. 일에 치여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우리가 왜 함께하기로 했는지 잊고 살았던 것 같아.
민준이 수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십 년 전 그날도 그랬다. 이렇게 손 잡은 게 얼마 만이야? 글쎄 일 년? 아니, 더 됐을지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처음 만났던 카페는 이미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 근처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음료를 앞에 두고, 그들은 오랜만에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일 이야기가 아닌, 마음 이야기를. 외로웠던 순간들, 그리움을 느꼈던 순간들, 그러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은 할 수 없었던 이유들.
나는 여전히 널 사랑해. 민준이 말했다.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을 뿐이야.
나도 그래. 수진이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오늘 여기 온 게 기적 같아. 마치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것 같아.
자선냄비 종소리가? 응. 우리를 만나게 해 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준.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다시 서로를 바라볼지, 매주 데이트하는 날을 정하자는 약속, 아침마다 사랑한다고 말하자는 약속. 카페를 나설 때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십 년 전 그날처럼.
내일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수진이 말했다. 이십 주년. 어떻게 보낼까?
민준이 생각에 잠기더니 웃었다. 집에서 둘이 조용히 있자. 요리도 같이 하고, 옛날 사진도 보고. 그리고. 그리고? 너랑 나, 우리가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를 시작하자.
수진이 민준의 팔을 꼈다. 그들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희미하게 자선냄비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그것은 그들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사랑을 일깨우는, 감사를 떠올리게 하는, 함께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은빛 종소리.
다음 날 아침, 민준은 수진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수진이 부엌으로 들어오자, 민준이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결혼 이십 주년 축하해. 고마워. 사랑해. 나도 사랑해.
창밖으로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울릴, 그들을 이어주는 은빛 종소리가. 그날 오후, 두 사람은 함께 명동으로 나갔다. 손을 잡고, 웃으며, 자선냄비를 찾아갔다. 함께 기부하고, 자원봉사자에게 인사하고, 처음 만났던 그 감정을 되새기며.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지만, 결국 같은 시간이 그들을 다시 만나게 했다. 사랑은 잊힐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소음 속에서 희미해질 수 있지만, 어떤 순간 다시 선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자선냄비의 종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나눔의 소리,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소리, 그리고 민준과 수진에게는 사랑을 되찾게 해 준 기적의 소리였다. 그들은 이제 안다. 함께한다는 것은 단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느끼는 것임을. 그리고 그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때로 멈춰 서서, 귀 기울이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은빛 종소리는 오늘도 어디선가 울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만남을, 누군가의 재회를, 누군가의 사랑을 축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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