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벽 한 월요일
완벽한 환경 기다림
Q: 왜 "조건이 갖춰지면"이라고 말할까요?
A: 실패의 변명거리를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지금 가진 것으로 시작하기"입니다. 완벽한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완벽한 월요일
완벽한 계획
이준호 대리는 일요일 밤 11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고, 화면에는 빼곡한 체크리스트가 떠 있었다.
"좋아,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정말 다르다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완벽한 업무 환경 구축 프로젝트'였다. 3개월 전부터 기획한 이 원대한 계획은 총 17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1단계: 새 모니터 구매 (27인치로는 부족하다. 32인치 듀얼이 필요하다)
2단계: 인체공학 의자 구매 (허리 건강이 최우선)
3단계: 기계식 키보드 구매 (타건감이 생산성을 좌우한다)
4단계: 책상 정리 (미니멀리즘이 답이다)
5단계: 업무 프로세스 최적화 (엑셀 매크로 완벽 구축)
준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날이 다음 주 금요일이니, 그때 새 모니터를 주문하면 다다음 주 월요일에 도착한다. 그럼 화요일에 설치하고, 수요일에 키보드를 주문하고, 목요일에...
"완벽해. 이렇게 하면 4월부터는 진짜 일을 시작할 수 있어."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같은 팀 막내 김신입 사원이었다.
"대리님, 내일 발표 자료 다 만드셨어요? 저 아직 반밖에 못했는데..."
준호는 헛기침을 했다.
"아, 그거? 그건... 음...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하려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더 중요한 일이요?"
"응. 장기적 생산성 향상 계획 수립."
전화를 끊고 준호는 다시 체크리스트를 응시했다. 발표 자료? 그건 조건이 갖춰지면 금방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먼저다.
현실의 벽
월요일 아침 8시 30분, 준호는 회사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오래된 모니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삐걱거리는 의자는 그의 허리를 괴롭혔다.
"조건만 갖춰지면..."
그가 중얼거릴 때, 박 팀장이 다가왔다.
"준호 대리, 오늘 10시 발표 준비 다 됐지?"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팀장님.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발표를 제대로 하려면 데이터 시각화 툴을 먼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파워포인트만으로는 한계가..."
"뭐?"
"그리고 새 모니터가 있으면 작업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고요. 듀얼 모니터 환경이 갖춰지면 제대로 된 자료를..."
박 팀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준호 대리. 지난달에도 똑같은 소리 들었는데? 그때는 새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팀장님,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작업해야..."
"야, 이준호!"
팀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다른 동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김 대리 봐. 저 사람은 10년 된 컴퓨터로 일하는데도 매번 마감 지킨다. 최 대리는 모니터 하나로 네 명 몫을 한다고!"
준호는 자리로 돌아와 황급히 파워포인트를 켰다. 빈 슬라이드가 그를 조롱하듯 빛났다. 2시간. 10장의 슬라이드를 만들어야 한다.
"조건이 갖춰지면 30분이면 끝낼 수 있는데..."
옆자리의 최연희 대리가 픽 웃었다.
"준호 씨, 작년에도 그 소리 했잖아요. '자격증만 따면', '영어 공부만 끝내면',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근데 아직도 같은 자리에 있네요?"
"그건..."
"저 봐요. 저는 조건 안 따져요. 그냥 해요. 망하면 어때요? 다시 하면 되죠."
연희는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커피 얼룩진 낡은 책상, 기울어진 모니터, 삐걱대는 의자. 그런데 그 위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들과 형광펜으로 체크된 업무 리스트가 있었다.
준호는 컴퓨터를 노려봤다.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놨다.
"아, 그런데 말이야. 이 발표를 제대로 하려면 시장 조사 데이터가 더 필요해. 그거 없이 하면 설득력이..."
딩동!
메신저 알림이 떴다. 박 팀장이었다.
"준호 대리, 9시 30분까지 초안이라도 보내. 안 보내면 발표 없던 걸로 하고 네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거야."
준호의 손이 떨렸다. 이 프로젝트는 승진과 직결되어 있었다. 프로젝트에서 빠진다? 그건 또 1년을 대리로 사는 거였다.
파국의 시작
9시 28분, 준호는 마침내 슬라이드 3장을 완성했다. 급하게 만들어서 폰트도 제각각이고, 도표도 엉망이었지만 일단 보냈다.
10시 회의실.
"이게... 뭡니까?"
전무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프로젝터에 비친 준호의 발표 자료는 참혹했다. 3장의 슬라이드 중 2장은 제목만 있었고, 나머지 1장은 글자가 화면 밖으로 삐져나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이준호 대리, 이 발표 준비 기간이 얼마였죠?"
"2주입니다만..."
"2주 동안 이게 전부라고?"
준호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제대로 된 자료를 만들려면 새로운 분석 툴을 배워야 하는데, 그 툴을 배우려면 먼저 통계 공부를 해야 하고, 통계 공부를 하려면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그 강의가 다음 달에 시작하거든요. 그리고 회사 컴퓨터 사양이 낮아서..."
"그만!"
전무님이 손을 들었다.
"김신입 사원, 자네가 준비한 거 있나?"
신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제가... 간단하게 만든 게 있긴 합니다만... 부족해서..."
"됐어, 어디 한번 보자."
신입의 슬라이드가 화면에 떴다. 준호는 입이 벌어졌다. 15장의 슬라이드에 깔끔한 데이터 시각화, 명확한 논리 전개, 그리고 실행 가능한 제안까지.
"이거... 언제 만들었어?"
신입이 쑥스럽게 웃었다.
"어제 대리님이랑 통화하고 나서요. 집에 있는 낡은 노트북으로 만들었습니다. 파워포인트 2007 버전이라 좀 불편했지만..."
전무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신입 사원, 이번 프로젝트 리더는 자네가 맡아. 준호 대리는... 보조로 들어가."
회의실을 나서는 준호의 귀에 동료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또 그러네, 준호 대리."
"맨날 조건 타령만 하더니..."
"작년에도 똑같았잖아. '준비가 되면' 하겠다더니 결국 아무것도 안 했어."
점심시간, 준호는 구내식당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때 연희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힘들어 보이네요."
"연희 씨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조건 안 따지고 그냥 한다는 게..."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비결이요? 간단해요. 저도 예전엔 준호 씨처럼 완벽주의자였어요."
"진짜?"
"네. 5년 전만 해도요. '시간이 더 있으면', '장비가 더 좋으면', '실력이 더 늘면'... 맨날 그런 생각만 했죠."
"그럼 어떻게 바뀐 거야?"
연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날 깨달았어요.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는 건 사실 겁먹은 거라는 걸. 실패가 무서운 거죠. '조건이 안 좋아서 못했어'라는 변명을 만들어두는 거예요."
준호는 할 말을 잃었다.
"제 조언 하나 할게요. 오늘 당장 뭐든 하나 시작해 보세요. 지금 가진 걸로.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은 시작
그날 저녁, 준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체크리스트를 다시 꺼냈다. 17단계의 완벽한 계획. 그는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여... 그 문서를 휴지통에 넣었다.
대신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은 '오늘 할 일'.
발표 자료 다시 만들기 (지금 있는 파워포인트로)
신입에게 사과하고 프로젝트 도와주기
팀장님께 솔직히 말씀드리기
마우스 커서가 깜빡였다. 준호는 심호흡을 하고 파워포인트를 켰다. 낡은 모니터, 불편한 의자, 느린 컴퓨터. 모든 게 그대로였다.
"좋아... 조건은 안 좋지. 근데 그게 뭐 어때?"
그는 웃으며 첫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았다. 폰트가 마음에 안 들었고, 색상도 촌스러웠다.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시간 후, 5장의 슬라이드가 완성되었다. 엉성했지만 내용은 있었다. 두 시간 후, 10장. 세 시간 후, 완성.
새벽 1시, 준호는 완성된 발표 자료를 바라봤다. 완벽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형편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이게... 시작이구나."
다음 날 아침, 그는 박 팀장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시 만들어왔습니다."
팀장이 자료를 훑어봤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음... 나쁘지 않네. 근데 이거 언제 만들었어?"
"어젯밤에요. 집에서 제 개인 노트북으로."
"그 낡은 거?"
"네. 그게... 조건은 안 좋았지만, 그냥 했습니다."
팀장이 피식 웃었다.
"드디어 정신 차렸네. 좋아, 신입이랑 같이 프레젠테이션 준비해. 둘이서 발표하는 걸로 하지."
복도로 나오는 준호에게 연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때요? 해보니까?"
"응... 생각보다 별거 아니더라. 그냥 하면 되는 거였어."
"그렇죠? 완벽한 순간은 안 와요. 그냥 지금이 완벽한 순간이에요."
그날 저녁, 준호는 책상을 정리하지 않았다. 새 모니터 장바구니도 비웠다. 대신 노트북을 열고 내일 할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신입이었다.
"대리님, 내일 발표 리허설 같이 해요?"
"그래, 지금 할까? 화상으로."
"진짜요? 근데... 저 집이 좀 지저분한데..."
준호가 웃었다.
"괜찮아. 조건 따지면 끝이 없어. 지금 하자."
화상 통화가 연결되었다. 신입의 배경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고, 준호의 배경에는 먹다 만 컵라면이 보였다. 둘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응. 지금 가진 걸로."
그날 밤, 준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는 건 사실 실패의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 나는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완벽한 것이라는 걸."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낡은 책상, 불편한 의자, 느린 컴퓨터. 하지만 이제 그것들이 변명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도구로 보였다.
"내일도... 그냥 하면 되겠지."
준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노트북을 덮었다. 완벽하지 않은 오늘, 그리고 완벽하지 않을 내일을 위하여.
3개월 후, 준호는 신입과 함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전히 오래된 모니터를 쓰고 있었고, 의자는 삐걱거렸다. 하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이달의 우수사원' 상패가 놓여 있었다.
시상식에서 전무님이 물었다.
"준호 대리, 비결이 뭔가?"
준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조건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 가진 걸로 시작했습니다."
회의실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희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고, 신입은 감동의 눈물을 훔쳤다.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후배들이 물었다.
"대리님, 저희도 항상 조건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는데... 어떻게 하면 대리님처럼 바뀔 수 있어요?"
준호는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간단해. 내일 당장 뭐든 하나 시작해 봐.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냥 해. 완벽한 순간은 안 와. 지금이 완벽한 순간이야."
그의 말에 회식 자리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소주잔을 부딪쳤다.
"지금 가진 걸로!"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하자!"
그날 밤, 준호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완벽한 환경은 없다. 완벽한 타이밍도 없다. 있는 건 지금, 여기, 그리고 시작하려는 의지뿐.'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변명이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채워갈 여백일 뿐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불완벽한 시작을 할까?"
그렇게 이준호의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