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79) 용서 못함

恨의 江 (한의 강)

by 이 범

용서 못함
Q: 왜 오래된 상처를 계속 붙잡고 있을까요?
A: 용서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용서는 그들을 위한 게 아니라 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恨의 江 (한의 강)

불타는 마을
一九五一년 겨울,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 청학동이 불타던 날을 박민수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엄마! 아버지!"
열세 살 소년의 비명이 총성과 화염 속에 묻혔다. 그날 밤 빨치산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아버지 박정호는 면서기였다는 이유로, 형 민철이는 청년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어머니와 어린 누이는 불타는 집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민수는 뒷산 토굴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봤다. 아버지와 형이 마을 어귀 느티나무에 묶인 채 총살당하는 모습을.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비명이 메아리치는 그 아비규환을.
그리고 그는 봤다. 붉은 완장을 찬 반란군 대열 속에서 동네 형 최두만의 얼굴을. 스물다섯이던 그는 아버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박면서기, 이 반동아! 오늘이 네 목숨 끝나는 날이다!"
두만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방아쇠를 당기는 그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砰!**
총성 한 방에 민수의 인생이 무너졌다. 그날 이후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恨(한)이 뼛속 깊이 새겨졌다.

잿더미 위의 맹세
戰爭(전쟁)이 끝나고 이십 년이 흘렀다.
민수는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밤 열두 시까지 일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작은 무역회사에 입사해 十年(십 년)을 미친 듯이 일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성공해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복수할 수 있었다.
一九七一년, 서른세 살의 박민수는 자신의 무역회사 '대한실업'을 설립했다. 사무실은 을지로 뒷골목 반지하 十坪(십 평)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하늘을 찔렀다.
"사장님, 이번 베트남 수출 건이 성사되면 대박입니다!"
부사장 김철수가 흥분된 얼굴로 보고했다.
"계약서 받아오기 전까지는 방심하지 마. 우리한테 기회는 이번 한 번 뿐이야."
민수는 냉정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은 약점이었다. 그가 가진 유일한 감정은 恨(한)뿐이었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오 년 만에 직원 백 명, 십 년 만에 천 명 규모가 됐다. 一九八五년, 대한실업은 강남에 十層(십 층) 빌딩을 지었다. 민수는 이제 재계의 신흥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불타는 집, 느티나무의 시신들, 그리고 최두만의 얼굴.
"그놈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민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사립탐정을 고용해 찾아냈다. 최두만은 改名(개명)해서 '최철호'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지리산 근처 작은 도시에서 날품팔이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가족도 없이 혼자였다.
"죽여버릴까..."
민수는 수없이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냥 죽이는 건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복수를 원했다. 그놈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만들고 싶었다.
운명의 재회
一九八六년 봄, 인사팀장 이 과장이 민수의 사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사장님,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뭔데?"
"신입 사원 서류 중에... 이 사람 인적사항이 좀 의심스럽습니다."
민수가 서류를 받아 봤다. 이름: 최철호. 나이: 예순. 경력: 건설 현장 노무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사진은?"
"여기 있습니다."
그 얼굴. 三十五年(삼십오 년) 만에 보는 그 얼굴. 주름이 깊이 패고 머리는 희끗희끗했지만, 민수는 단번에 알아봤다. 최두만이었다.
"이 사람...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지?"
"청소부 자리입니다. 아마 이름을 개명한 걸 모르고 지원한 것 같습니다."
민수의 손이 떨렸다.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復讐(복수)의 기회.
"채용해."
"예? 하지만 나이도 많고..."
"내가 채용하라면 채용하는 거야!"
민수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일주일 후, 최철호는 대한실업 야간 청소부로 출근했다. 그는 사장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민수는 그를 숨어서 지켜봤다. 늙고 초라한 그의 모습을. 허리를 굽혀 복도를 닦는 그의 뒷모습을.
"이제 시작이다..."
민수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미소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憎惡(증오)의 미소였다.
그는 최철호를 서서히 괴롭히기 시작했다. 일부러 더러운 일을 시켰다. 화장실 청소, 쓰레기 분리, 새벽 네 시 출근. 다른 청소부들보다 두 배로 일했지만 월급은 더 적게 줬다.
최철호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묵묵히 일했다. 그 모습이 민수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왜!"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민수는 최철호를 사무실로 불렀다.
"최철호 씨, 앉으세요."
"예, 사장님."
최철호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처음 보는 사장의 얼굴이었다.
"일은 잘하고 계신가요?"
"네, 감사합니다. 이 나이에 일자리 주셔서..."
"청학동 출신이시죠?"
순간, 최철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 어떻게..."
"저도 청학동 출신입니다. 박정호 면서기의 아들, 박민수예요."
**쿵.**
최철호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 사장님..."
"이제 기억나시나요? 一九五一년 겨울. 당신이 우리 가족을 몰살시킨 그날."
"아... 아닙니다. 저는..."
"거짓말 마세요! 제가 다 봤어요. 당신이 아버지에게 총을 쏘는 걸. 우리 집에 불을 지르는 걸!"
민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三十五年(삼십오 년) 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최철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흘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요? 그렇게 쉽게? 당신 때문에 제 인생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어요. 가족의 비명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요!"
"사장님... 저도... 저도 지옥에서 살았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최철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도 깊은 苦痛(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날... 저는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거부하면 가족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핑계입니다. 저는 겁쟁이였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
"당신 아버지를 쏜 건 제가 아닙니다. 정치위원이 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말릴 수도 있었는데 안 했습니다. 저는 공범입니다."
최철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쟁이 끝나고 저는 도망쳤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습니다. 매일 밤 당신 아버지의 얼굴이 보입니다. 용서해 달라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는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가 흘렀다.
"죽여주십시오.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민수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이 순간을 三十五年(삼십오 년) 동안 꿈꿔왔다. 원수가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이 순간을.
그런데 왜일까. 가슴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허했다.
"나가세요."
"사장님..."
"나가라고 했어요!"
최철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나갔다.
恨에서 和解로
그날 밤, 민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철호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눈물, 그 절규.
'그놈도 고통받고 있었구나...'
새벽 네 시, 민수는 회사로 갔다. 청소하는 최철호를 찾기 위해.
그런데 복도에서 쓰러진 최철호를 발견했다.
"이봐요! 최철호 씨!"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병원으로 이송됐다.
의사가 나왔다.
"과로와 영양실조입니다. 며칠만 늦었으면 위험했어요. 보호자이십니까?"
"아... 네."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민수 자신도 몰랐다.
병실에서 최철호가 깨어났다.
"사장님... 왜..."
"그냥 지나가다가."
민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 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최철호 씨, 아니 최두만 씨. 나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예..."
"당신은 그 三十五年(삼십오 년) 동안 뭘 했습니까? 숨어만 살았습니까?"
최철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는... 贖罪(속죄)하려 했습니다."
"속죄?"
"제가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해야 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통장을 꺼냈다.
"이건... 전쟁고아들을 위한 기부금 통장입니다. 삼십 년 동안 모은 돈입니다. 천만 원 정도 됩니다. 제가 번 돈의 전부입니다."
민수는 통장을 받아 봤다. 낡고 해진 통장. 매달 오만 원, 십만 원씩 적립된 기록들.
"왜 이걸..."
"제가 만든 고아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 같은... 제 손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 贖罪(속죄)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최철호의 목소리가 멎었다. 눈물이 흘렀다.
민수의 가슴이 무너졌다. 이 남자도 三十五年(삼십오 년) 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자신처럼.
"최철호 씨."
"예..."
"나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평생 용서 못할 겁니다."
최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
"전쟁은 우리 모두를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둘 다 피해자입니다."
민수는 창밖의 햇살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내려놓읍시다. 그 恨(한)을."
"하지만..."
"내가 당신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겁니다. 三十五年(삼십오 년) 동안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던 나 자신을."
민수는 돌아서며 말했다.
"퇴원하면 회사 복지팀으로 오세요. 전쟁고아 후원 사업을 맡길 겁니다. 당신의 經驗(경험)이 필요합니다."
"사장님... 정말입니까?"
"우리가 함께 贖罪(속죄)하는 겁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민수는 병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이... 이제 편히 쉬세요. 제가 이제 그 恨(한)을 내려놓겠습니다.'
尾聲 - 새로운 시작
一年(일 년) 후, 대한실업은 '청학희망재단'을 설립했다. 전쟁고아와 遺族(유족)들을 돕는 재단이었다. 이사장은 박민수, 사무총장은 최철호였다.
두 사람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울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청학동을 찾았다. 폐허가 된 마을은 이제 평화로운 농촌이 되어 있었다. 느티나무만 그대로 서 있었다.
나무 아래서 두 사람은 술잔을 나눴다.
"사장님, 아니 민수 씨."
"예, 철호 씨."
"고맙습니다. 저를 살려주셔서."
"나야말로 고맙습니다. 저를 恨(한)에서 구해주셔서."
두 사람은 느티나무를 올려다봤다.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民樹는 깨달았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恨(한)을 붙잡고 있는 것은 과거에 갇히는 것임을.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여는 것임을.
"철호 씨, 이제 시작입시다. 새로운 시작."
"네, 민수 씨. 함께."
두 노인은 손을 맞잡았다. 그 손엔 더 이상 恨(한)이 없었다. 和解(화해)가 있었다. 希望(희망)이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서 봄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상처를 어루만지는 바람이었다.

(後記)
욜서는 加害者(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被害者(피해자)인 自身(자신)을 自由(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恨(한)은 독약입니다. 그것을 삼키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박민수와 최철호. 두 사람은 戰爭(전쟁)이 남긴 상처를 平生(평생) 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相對(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自身(자신)이 幸福(행복) 해지는 것임을.
歷史(역사)는 반복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恨(한)의 고리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和解(화해)로 끊을 것인가.
그 選擇(선택)이 우리의 未來(미래)를 결정합니다.
恨을 放下(방하)하고 和平(화평)을 取하라. 이것이 眞正(진정)한 勝利(승리) 니라.**
(끝)

월, 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