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이름
Q: 왜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할까요?
A: 사랑받고 싶어서입니다. 해법은 "나를 잃으면서까지 얻은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를 깨닫는 것입니다. 진정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사회
민준은 하루에도 수십 번 자기 이름을 잃었다.
회사에서는 “민준 씨” 대신 “이 건 담당자”, 집에서는 “장남”, 친구들 사이에서는 “분위기 맞춰주는 애”, 연인 앞에서는 “괜찮은 남자”로 불렸다. 이름은 있었지만, 불릴 때마다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침 7시 20분. 알람이 울리기 전 민준은 이미 눈을 떴다. 오늘도 지각은 없어야 했다. 팀장의 눈빛, 동료들의 미묘한 한숨, 평가표의 빈칸들이 머릿속에서 먼저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할 틈 없이 셔츠를 골랐다. 어제보다 덜 튀고, 오늘 회의에 적당히 무난한 색.
지하철 안에서 민준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읽씹’ 하지 않기 위해, ‘늦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센스 없다’는 평가를 피하기 위해. 그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응, 네 말이 맞아.”
“괜찮아, 내가 할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문제없을 것 같아.”
문장들은 부드러웠지만, 그만큼 자신은 희미해졌다.
기대라는 이름의 사건
사건은 별것 아닌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이번 기획안, 민준 씨가 총괄하면 좋겠어요.”
팀장의 말에 회의실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이미 맡고 있는 일이 세 개나 있었지만,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는 순간 떠오를 얼굴들이 먼저 떠올랐다. 실망, 불편, 부담.
“할 수 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동료 지연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민준은 웃었다. 웃는 연습은 오래전에 끝마쳤다.
“괜찮아. 원래 내가 이런 거 잘하잖아.”
그날 밤, 민준은 야근 후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몸은 지쳤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팀장의 기대, 부모의 걱정, 연인의 바람.
‘너는 이 정도는 해줘야지.’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너니까 가능해.’
그 모든 말 끝에는 같은 전제가 붙어 있었다.
너는 네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너여야 한다.
민준은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싫다”라고 말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균열
결정적인 날은 연인의 한마디에서 왔다.
“민준아, 너는 늘 착한데… 가끔은 없는 사람 같아.”
카페 창밖에는 퇴근 시간의 사람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 바쁘고, 모두 중요해 보였다. 민준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무슨 말이야?”
연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네 의견이 없다는 말이야. 아니, 있는 것 같은데 늘 내 쪽으로 맞추잖아. 그게 고마우면서도… 무서워.”
그날 밤 민준은 처음으로 약속을 취소했다. 이유는 “몸이 안 좋아서”였다. 사실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 집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만약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일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민준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말들이 모두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민준, 가족의 민준, 연인의 민준. 하지만 ‘나 자신으로서의 민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노트를 꺼내 처음으로 솔직한 문장을 적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남아 있는 것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작았다.
다음 회의에서 팀장이 추가 업무를 제안했을 때, 민준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번 건은 어렵겠습니다. 지금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고, 팀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분께 맡기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는 무너지지 않았고, 민준은 해고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연인에게 그는 처음으로 솔직한 말을 했다.
“난 항상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어.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내가 없어졌어. 이제는… 나를 지키고 싶어.”
연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게 네 진짜 모습이라면, 난 그걸 알고 싶어.”
민준은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흔들리고, 여전히 기대는 무겁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나를 잃으면서까지 얻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나를 지켜도 남는 사람이 진짜다.
밤이 깊어갈 무렵, 민준은 노트에 다시 문장을 적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문장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