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란 (273)

비밀의 보따리

by 이 범


1923년 가을, 함평 이 씨 종가
저녁노을이 기와지붕을 붉게 물들이던 날,



이산갑은 하인 산돌이 와 함께 선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리, 저기 증조 어르신 묘소가 보입니다."
스물두 살 산돌이 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기영 어른의 묘다."
산 같은 예순일곱이었다. 이충헌의 차남으로, 할아버지 기영의 손자였다.
"나리, 증조 어르신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셨다."
판갑은 걸음을 멈추고 묘소를 바라보았다.
"증조할아버지는 평생 백성을 가르치셨다.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그렇지. 그래서 더 대단하신 거다. 옳다고 믿는 것을 세상이 반대해도 끝까지 하셨다."
산돌은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산돌은 어릴 때부터 이 집에서 자랐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되었을 때, 이산갑이 거둬주었다.
"산 돌아, 이리 오너라."
"예, 나리."
"너는 이제 우리 집 식구다. 비록 하인이지만, 나는 너를 내 자식처럼 여긴다."
그날 이후, 산돌은 이 집의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도회의 비밀
두 사람은 계속 내려왔다.
"산 돌아."
"예, 나리."
"오늘 저녁에 손님들이 오신다."
산돌은 무슨 손님인지 알고 있었다.
"한도회 어르신들이십니까?"
"그렇다. 조용히 준비해라."



한도회(韓道會).
겉으로는 유학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였다.
그러나 진짜 정체는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전국에 지부가 있었고, 수백 명의 회원이 있었다.
이산갑은 이 지역 한도회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산돌은... 한도회의 젊은 회원이었다.
"산 돌아, 너는 한도회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삼 년 되었습니다, 나리."
"그동안 잘해왔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너는 충실하고 용감하다. 나는 너를 믿는다."
산돌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산돌이 한도회에 들어간 것은 이산갑의 추천 때문이었다.
"산돌이는 비록 신분은 낮지만, 마음은 높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큽니다."
한도회 회원들은 산돌을 받아들였다.
"좋소. 신분이 무슨 상관이오. 뜻이 같으면 동지요."
그날 이후, 산돌은 한도회의 일을 해왔다.
주로 연락책이나 심부름을 맡았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산돌은 기꺼이 했다.


집에 도착하자 산갑은 사랑채로 들어갔다.
"산 돌아, 너는 저녁 준비를 도와라."
"예, 나리."
산돌이 나간 후, 산 같은 벽장에서 낡은 족보를 꺼냈다.
『咸平李氏世譜』
함평 이 씨 세보.
먼지를 털고 펼쳤다.


판갑은 족보를 쓰다듬었다.
'아버지... 형님... 그리고 할아버지...'
회상에 빠져들었다.


1905년, 할아버지의 죽음
산같이 아홉 살 되던 해였다.
할아버지 이충헌이 일본 경찰에게 고문당하고 돌아오셨다.
"할아버지!"
어린 산같이 달려갔다.
"... 반갑아..."
할아버지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마지막 날, 온 가족이 모였다.
"... 교육을... 멈추지... 마라..."
할아버지는 산갑을 보았다.
"... 반갑아..."
"예, 할아버지!"
"너는... 기억해라... 우리 집안의... 정신을..."
"예!"
"책 속에... 길이... 있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1919년, 아버지의 희생
산갑이 스물셋 되던 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아버지 이봉칠은 의사였지만,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대한독립만세!"
일본 경찰이 발포했다.
아버지는 총을 맞았다.
"아버지!"
산갑이 달려갔다.
"산갑아...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버지! 안 돼요!"
"너는... 살아남아라... 나라가... 광복될 때까지..."
"예... 예..."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라..."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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