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헌의 급제
장남 이충헌 (李忠憲, 1834-1905)
출생과 어린 시절 (1834-1845)
충헌은 기영이 열아홉, 연화가 열일곱 때 태어났다.
"축하합니다! 아드님입니다!"
산파의 외침에 기영은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안았다.
"우리 아들..."
할아버지 성준이 이름을 지었다.
"충성 충(忠), 드러날 헌(憲). 충헌(忠憲)이라 지어라. 나라에 충성하고, 법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충헌은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다.
"아버지, 이 글자가 무슨 뜻이에요?"
다섯 살에 벌써 글자에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사람 인(人)'이다."
"사람 인..."
충헌은 금방 외웠다.
일곱 살에 『천자문』을 떼었다.
"天地玄黃 宇宙洪荒..."
"우리 충헌이 똑똑하구나!"
할머니 화정이 기뻐했다.
기영은 아들을 보며 흐뭇해했다.
'이 아이는 학자가 될 것이다.'
청년 시절과 과거 급제 (1846-1854)급제
충헌은 아버지를 닮아 학문에 뛰어났다.
열다섯 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래, 좋다. 그러나 먼저 더 배워야 한다."
스무 살(1854년)에 충헌은 과거에 응시했다.
아버지는 과거를 거부했지만, 충헌은 달랐다.
"아버지, 저는 벼슬을 해서 안에서 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길이다. 가거라."
충헌은 생원시에 합격했다.
"축하한다, 충헌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다만 한 가지 잊지 마라."
"무엇입니까?"
"벼슬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관직 생활과 환멸 (1855-1880)
충헌은 스물하나에 지방 관아의 낮은 벼슬을 얻었다.
처음에는 희망에 차 있었다.
'나는 여기서 백성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봐, 신참. 이 돈을 이리 나눠."
"...이것은 백성에게서 거둔 세금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쓰는 거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네 이놈, 감히!"
충헌은 상관의 부패를 고발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좌천이었다.
"네가 감히 상관을 고발해?"
"부정을 보고 가만있을 수 없었습니다."
"네 이놈! 조용히 있었으면 승진도 시켜줬을 텐데!"
충헌은 더 외진 곳으로 쫓겨났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1880년, 충헌은 마흔여섯의 나이에 관직을 사직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아니다. 네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기영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패한 관료로 남는 것보다,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이 낫다."
교육자로의 전환 (1880-1894)
고향으로 돌아온 충헌은 아버지처럼 서당을 열었다.
"저도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이다."
충헌은 '영신서당(永新書堂)'을 열었다.
"영원히 새로워지는 서당이라는 뜻입니다."
충헌의 서당은 아버지의 서당과 달랐다.
한문뿐 아니라 산술, 지리, 역사도 가르쳤다.
"너희는 한문만 알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충헌은 신식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제는 서당이 아니라 학교가 필요합니다."
충헌은 '영산학교'를 세웠다.
교과목은 한문, 한글, 산술, 지리, 역사, 과학.
"학생들이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을미의병 지원 (1895-1896)
1895년 을미사변 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충헌의 제자 중 일부가 의병에 합류하고 싶어 했다.
"선생님, 저희는 의병에 가고 싶습니다."
충헌은 고민했다.
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아버님, 제자들이 의병에 합류하고 싶다고 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충헌아, 이것은 각자가 선택할 문제다."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충헌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선택하거라. 다만, 의병이 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임을 알아라."
열 명 중 셋이 의병에 합류했다.
충헌은 남은 제자들과 함께 의병을 지원했다.
은밀히 식량과 정보를 제공했다.
"선생님, 위험합니다. 발각되면..."
"알고 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항일 교육 (1905-1910)
1905년 을사늑약 후, 충헌은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 교육에 나섰다.
"우리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제는 이를 눈치챘다.
"이 학교는 불온한 교육을 하고 있다!"
일본 경찰이 학교를 수색했다.
"여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선 역사? 그것은 금지되었다!"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왜 금지됩니까?"
충헌은 체포되었다.
석 달 동안 투옥되었다.
"네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자백해라!"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그것이 반일 교육이다!"
"반일이 아닙니다. 친조선입니다."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충헌은 굴하지 않았다.
석방된 후, 학교는 폐쇄 명령을 받았다.
"학교를 닫아야 합니다."
그러나 충헌은 비밀리에 교육을 계속했다.
집에서, 밤에, 몰래.
"선생님,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해도 해야 한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죽음 (1905)
1905년 겨울, 충헌은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늙은이가 끝까지 버티는군!"
"더 세게!"
충헌의 몸은 망가졌다.
석방되었을 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온 충헌은 병상에 누웠다.
"아버지..."
아들들이 모였다.
"너희... 아버지의 뜻을... 이어라..."
"예, 아버지."
"교육을... 멈추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게..."
1905년 겨울, 충헌은 일흔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선생님은 순교자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충헌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교육자 이충헌지묘
(1834-1905)
敎學相長
교학상장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