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의 무게
"축하합니다, 최수진 주무관. 이번 공개채용 최종 합격자입니다."
전화를 끊은 수진은 멍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7급 공무원 공개채용 최종 합격. 3년간 준비한 시험에 드디어 붙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엄마, 나... 붙었어."
"정말? 우리 딸! 그래, 엄마가 믿었지!"
어머니의 기쁨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수진은 억지로 밝은 척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밀려온 건 기쁨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내가 정말 이 자리를 받을 자격이 있나?'
수진은 서울대도, 연고대도 아닌 지방 국립대 출신이었다. 학점도 3.8로 나쁘지 않았지만, 4.5 만점자들 사이에서는 평범했다. 토익은 900점이었지만, 만점자도 많았다. 합격자 명단을 보니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화려한 스펙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만 여기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첫 출근 날, 수진의 불안은 현실이 됐다.
"신규 임용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인사담당관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올해는 특히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뽑혔습니다. 서울대 출신만 5명, 각종 어학시험 만점자도..."
수진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옆에 앉은 동기가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행정학과 나온 김태현이라고 합니다. 서울대 학부, 대학원은..."
"아, 네... 저는 최수진이라고 합니다. ○○대학교..."
"아, 거기도 좋은 학교죠!" 태현이 웃었지만, 수진에게는 그 웃음이 어딘지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수진은 배정받은 부서로 향했다. 기획예산과. 시청의 핵심 부서 중 하나였다.
"어서 오세요, 최수진 주무관님. 저는 박민서 주무관입니다. 3년차예요."
민서는 따뜻하게 맞아줬다. 하지만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며 수진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이게 예산편성 프로그램이에요. 복잡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화면에 떠오른 복잡한 코드들. 수진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저... 질문 있으면 물어봐도 되죠?"
"당연하죠! 처음엔 다들 그래요. 나도 첫해에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물어봤어요."
민서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지만, 곧 다른 동기가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는 모습을 보며 수진은 다시 주눅이 들었다.
'역시 나만 못하는 거야...'
승(承) - 전개
한 달이 지났다.
"수진아, 이번 예산안 검토 좀 부탁해도 될까?"
권재훈 과장이 서류 뭉치를 건넸다. 수진은 밤늦게까지 남아 검토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수진 주무관, 이리 와봐요."
과장실로 불려 들어간 수진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보고서 말인데..." 재훈이 서류를 펼쳤다. "정말 잘했어요. 특히 이 부분, 타 지자체 사례까지 조사해온 건 좋은 접근이었어요. 나도 미처 생각 못 한 부분인데."
"저, 정말요?"
"왜 그렇게 놀라요? 당연히 잘했죠."
수진은 믿기지 않았다. 분명 다른 사람이 했으면 더 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장님, 사실은... 제가 다른 동기들보다 학교도 별로고, 스펙도 별로라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싶었어요."
재훈이 잠시 수진을 바라보더니,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수진 주무관, 나도 그랬어요."
"예?"
"나도 신규 때 똑같았어요. SKY 출신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지방대 나왔죠. 동기들은 다들 화려해 보이고, 나만 여기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수진은 놀란 눈으로 과장을 바라봤다. 재훈은 시청에서 가장 능력 있는 과장 중 하나로 소문났었다.
"근데 10년 넘게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학벌이나 스펙이 일을 잘하는 거랑 별로 상관없더라고요. 중요한 건 성실함, 책임감, 그리고 배우려는 자세죠."
"하지만..."
"수진 주무관, 당신이 여기 온 건 우연이 아니에요.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온 거잖아요. 그건 당신에게 자격이 있다는 증거예요."
재훈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지만, 수진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수진은 민서와 퇴근길에 만났다.
"선배님,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그럼, 뭔데?"
"선배님은 처음 발령받았을 때 어땠어요? 자신감 있으셨어요?"
민서가 픽 웃었다. "자신감? 전혀. 나도 매일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뿐이었어."
"정말요?"
"응. 특히 첫 프로젝트 발표할 때, 떨려서 목소리가 계속 갈라졌어. 발표 끝나고 화장실 가서 울었던 기억도 나네."
"그런데 어떻게...?"
"극복한 게 아니라, 받아들인 거야. 완벽할 필요 없다는 걸.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걸."
수진은 민서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말이야," 민서가 덧붙였다. "가면 증후군이라고 들어봤어?"
"가면... 증후군요?"
"응. 성공한 사람들이 '나는 가짜고, 언젠가 들킬 거야'라고 생각하는 심리 현상이야. 특히 능력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심하게 느낀대. 넌 지금 그걸 겪고 있는 거야."
"저는 능력도 없는데요..."
"바로 그게 가면 증후군이야!" 민서가 웃었다. "수진아, 너 예산안 검토한 거 과장님이 칭찬하셨잖아. 그게 다 네 능력이야."
전(轉) - 변화
전환점은 3개월 후에 찾아왔다.
시청에서 '신규 공무원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선배 공무원과 신규 공무원을 1대1로 매칭해 고민을 나누는 제도였다.
수진의 멘토는 기획조정실의 이현주 사무관이었다. 15년차 베테랑이었다.
"수진 주무관, 요즘 어때요? 적응은 잘되고 있어요?"
첫 만남에서 현주가 물었다. 수진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사실... 자꾸 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동기들은 다들 잘하는 것 같은데, 저만 뒤처지는 것 같고..."
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 너무 잘 알아요."
"사무관님도요?"
"당연하죠. 나도 신규 때 맨날 그런 생각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가끔 그래요."
"지금도요?"
"응. 작년에 국장님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셨는데, '왜 하필 나한테? 다른 사람이 더 잘할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
수진은 놀랐다. 15년차 베테랑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
"근데 말이야," 현주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조심스럽게, 더 열심히 일하게 되거든요. 자만하는 사람보다 낫죠."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요.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다.' 당신을 뽑은 사람들은 당신의 잠재력을 본 거예요. 당신 스스로는 못 봐도, 다른 사람들은 본 거죠."
"제 잠재력을..."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 완벽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실수할 수 있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거예요."
현주는 수진에게 공책 하나를 건넸다.
"이거, 내가 신규 때 썼던 '성공 노트'예요. 매일 내가 잘한 일 하나씩만 적는 거예요. 아무리 작은 것도 좋아요. 전화 친절하게 받았다, 보고서 오타 없이 제출했다, 뭐든지."
"이게 도움이 될까요?"
"해봐요. 일주일만. 그럼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잘하고 있다는 걸."
수진은 반신반의하며 노트를 받았다.
첫날 밤, 수진은 노트를 펼쳤다.
'오늘 내가 잘한 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한 줄을 적었다.
'예산 서류 검토하면서 오류 하나 찾아냄.'
다음 날.
'민원인 전화 응대 친절하게 함. 상대방이 고맙다고 말해줌.'
사흘째.
'회의 자료 준비. 과장님이 깔끔하다고 칭찬하심.'
일주일이 지나자, 노트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수진은 노트를 다시 읽어 내려가며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는 것을.
한 달 후, 수진은 현주를 다시 만났다.
"어때요? 노트 효과 있었어요?"
"네... 신기하게도요. 제가 생각보다 많은 걸 하고 있더라고요."
"그쵸? 우리는 자꾸 잘못한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잘한 것을 기록해야 해요."
"그리고 사무관님, 하나 더 깨달은 게 있어요."
"뭔데요?"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건,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걸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줬는데, 정작 저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현주가 환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어요. 이제 스스로 인정할 차례예요."
결(結) - 마무리
1년이 흘렀다.
"신규 공무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도 선배가 됩니다."
인사담당관의 말에 수진은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새 1년차를 마치고, 후배들을 맞이할 시간이 된 것이다.
"특히 올해는 최수진 주무관이 신규 우수공무원상을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진은 믿기지 않아 주위를 둘러봤다. 재훈 과장이 엄지를 치켜세워 주고, 민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후배 한 명이 수진에게 다가왔다.
"선배님, 축하드려요. 근데...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그럼, 뭔데?"
"저... 사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다른 동기들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저만 못하는 것 같고... 제가 이 자리를 받을 자격이 있나 싶어요."
수진은 1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어." 수진이 부드럽게 말했다. "정확히 1년 전에, 너랑 똑같은 생각 했었어."
"정말요?"
"응. 근데 말이야, 그건 가면 증후군이라는 거래. 성공한 사람들이 '나는 가짜고, 언젠가 들킬 거야'라고 느끼는 심리 현상이야."
수진은 자신의 '성공 노트'를 꺼내 후배에게 보여줬다.
"이거 봐. 내가 1년 동안 적은 거야. 매일 내가 잘한 일 하나씩."
후배는 노트를 넘기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많이 적혀 있네요."
"처음엔 나도 뭘 적을지 몰라서 고민했어. 근데 하다 보니까 알게 됐어. 내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해내고 있었다는 걸."
"저도 해볼게요."
"그리고 하나 더." 수진이 후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다는 걸 인정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건, 너한테 자격이 있다는 증거야. 남들이 인정했으면, 이제 네가 스스로를 인정할 차례야."
후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마워요, 선배님. 그 말 듣고 싶었어요."
그날 저녁, 수진은 현주와 저녁을 먹었다.
"수진 주무관,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랑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다 사무관님 덕분이에요. 성공 노트 주신 것, 정말 큰 도움 됐어요."
"아니에요. 그건 다 수진 주무관 스스로 해낸 거예요. 나는 그냥 방향만 알려준 것뿐이고."
수진은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처음엔 모든 게 불안하고 두려웠다.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무관님,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자격이 있다는 게 뭔지."
"그게 뭔데요?"
"완벽해서가 아니라, 계속 노력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있다는 거요.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에서 배우는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거요."
현주가 흐뭇하게 웃었다. "정답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차례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불안해하는 후배들한테, 제가 받은 도움을 돌려줘야죠."
"그게 바로 선순환이에요. 당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3년이 흘렀다.
수진은 이제 중견 공무원이 됐다. 후배들을 이끄는 팀장이 됐고, '신규 공무원 멘토링 프로그램'의 공식 멘토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신규 공무원이 상담을 신청했다.
"최수진 주무관님, 저... 도움이 필요해요."
"어떤 고민인데요?"
"저는 지방대 출신에 스펙도 별로 없어요. 다른 동기들은 다들 명문대 출신이고... 제가 이 자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수진은 3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미소 지었다.
"그 마음, 너무 잘 알아요. 나도 똑같았거든요."
"정말요?"
"응.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확신해. 자격이라는 건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걸."
수진은 서랍에서 낡은 공책을 꺼냈다. 3년 전, 현주 사무관에게 받았던 그 '성공 노트'였다.
"이거, 내가 첫해에 썼던 노트야. 매일 내가 잘한 일을 적었어. 처음엔 뭘 적을지 몰라서 고민했는데, 지금 보면 정말 많은 걸 해냈더라고."
신규 공무원은 노트를 넘기며 감탄했다.
"너도 한번 해봐. 그럼 알게 될 거야. 네가 생각보다 훨씬 자격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정말 효과 있을까요?"
"있어. 나뿐만 아니라, 내가 도와준 후배들 모두 똑같이 말했어. 자신을 인정하게 됐다고."
수진은 새 공책을 하나 꺼내 건넸다.
"이거 줄게. 오늘부터 시작해봐. 그리고 기억해.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다는 걸. 수백 명 중에 당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그리고 하나 더." 수진이 덧붙였다. "완벽할 필요 없어. 우리는 다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거야. 실수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어. 그게 인간이고, 그게 성장하는 거야."
신규 공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희망이 보였다.
퇴근길, 수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3년 전, 자신이 이 자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했던 자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자격이라는 건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쌓아가는 거라는 것을.
스마트폰이 울렸다. 오늘 상담했던 신규 공무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선배님, 오늘 노트에 첫 줄 적었어요. '오늘 나는 도움을 청했다. 그것도 용기다.' 고마워요."
수진은 미소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잘했어. 넌 충분히 자격이 있어. 매일 그걸 증명해가면 돼."
그리고 자신의 '성공 노트' 최신 페이지를 펼쳤다. 오늘 적을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었다. 내가 받은 도움을 돌려줬다. 그게 자격이다.'
수진은 노트를 덮으며 생각했다. 가면 증후군은 여전히 가끔 찾아온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더 나아지고 싶다는 신호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이 있는 한, 자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다."
수진은 그 말을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제 확신에 차 있었다.
끝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