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287)

식물도감, 희망의 씨앗

by 이 범

식물도감, 희망의 씨앗
가을이 깊어갈 무렵, 이산갑의 식물도감 원고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30여 년간 수집한 500여 종의 식물 정보와 세밀화가 담긴 방대한 작업이었다.
"아버님, 이제 출판사와 접촉해야 할 때입니다."
이계민의 말에 이산갑은 잠시 망설였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로 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을까?"
"식물도감입니다. 정치적인 내용이 없으니 가능할 것입니다."
한도회 모임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회원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이 시국에 조선어 책을 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미움을 사서 학당까지 폐쇄되면 어찌합니까?"
갑론을박 끝에 정혁진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서울의 지인을 통해 조심스럽게 접촉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출판 가능성부터 타진하고, 그다음 단계를 생각합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다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하며, 일본어 해설을 병기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일본어를 넣어야 한다니..."
이산갑은 씁쓸했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조선의 식물을 우리 말로 기록해 후대에 남기는 것이었다.
겨울이 오고, 이산갑은 일본어 해설 작업에 매달렸다. 이산호가 면사무소에서 익힌 일본어 실력으로 형을 도왔다.
"형님, 이 식물의 일본 이름은 이렇게 쓰면 됩니다."
"고맙다, 산호야. 네가 없었으면 이 일을 어찌 했을까."
형제가 함께 책상에 마주 앉아 원고를 다듬는 밤이 이어졌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어느 날 저녁, 정혁진이 급히 찾아왔다.
"형님, 큰일이네요. 면장이 학당을 주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자네가 식물도감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퍼졌네요. 혹시라도 불온한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입니다."
"식물도감에 무슨 불온한 내용이 있겠는가."
"우리야 알지만, 저들은 조선어로 된 모든 것을 의심하네. 조심하세요."
이산갑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생을 바친 연구가 오히려 화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며칠 후, 면사무소에서 호출이 왔다. 이산호가 먼저 달려가 상황을 파악했다.
"아버님, 면장이 원고를 검토하겠답니다. 거부하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순순히 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산갑은 원고 사본을 들고 면사무소로 향했다. 일본인 면장은 원고를 대충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풀이나 나무 그림이로군. 한심한 조선인들 같으니. 이런 것이나 연구하고 있으니 발전이 없는 거야."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이산갑은 꾹 참았다. 중요한 것은 출판 허가를 받는 것이었다.
"다만, 출판되면 사본 한 부를 면사무소에 제출하도록."
"알겠습니다."
면사무소를 나서는 이산갑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여전히 원고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식물도감이 아니었다. 조선의 땅, 조선의 자연, 조선의 언어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 덮인 들판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날아갔다. 이산갑은 그것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봄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씨앗을 지켜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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