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288)

어둠속의 등불

by 이 범


1944년 봄, 이산갑의 식물도감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영광의 식물』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조선어와 일본어가 병기된 특이한 형태였지만, 그 안에는 조선의 산과 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님, 책이 나왔습니다!"
이계민이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 보따리를 들고 달려왔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첫 장을 펼쳤다. 정성스럽게 그려진 식물 세밀화와 상세한 설명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펼쳐졌다.
"여보, 당신의 평생 공이 이렇게 결실을 맺었군요."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산갑도 뭉클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나 혼자의 공이 아니라네. 함께해준 모든 이들의 결실이지."
한도회에서는 작은 축하 모임이 열렸다. 회원들은 돌아가며 책을 펼쳐보며 감탄했다.
"이 책이 후세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국에 이런 의미 있는 일을 해내셨으니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정세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정혁진이 가져온 소식은 암담했다.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었네요. 이제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끌려가고 있어요."
"학당의 아이들도 안전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네요. 특히 열여섯 이상의 학생들은 요주의 대상입니다."
이산갑은 학당의 학생 명부를 꺼내보았다. 열여섯 이상의 학생이 일곱 명이었다. 그중 몇몇은 이미 징집 대상 연령에 근접해 있었다.
"이 아이들을 어찌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이산갑은 학생들의 가족을 조용히 만나기 시작했다. 어떤 집은 아들을 산속에 숨겼고, 어떤 집은 혼인을 서둘러 병역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여름이 되자 일제의 수탈은 더욱 극심해졌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쌀, 옷감, 심지어 놋그릇까지 거두어갔다.
"이러다가는 먹고살 것이 없겠어요."
아내의 걱정에 이산갑도 할 말이 없었다. 학당 운영도 점점 어려워졌다. 학생들은 부족한 식량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이산갑은 학당을 계속 운영했다. 한글을 가르치고,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고, 조선의 자연을 함께 공부했다. 식물도감은 귀중한 교재가 되었다.
"선생님, 이 꽃 이름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그래, 우리말은 참 아름답단다. 이 아름다움을 잊지 말거라."
가을이 깊어갈 무렵, 정혁진이 다급하게 찾아왔다.
"이보게, 일본이 패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네."
"정말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내년 안에는 전쟁이 끝날 것 같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아직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겨울이 왔다. 영광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연료가 부족해 학당에 불을 지피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학생들은 꿋꿋하게 학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이산갑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단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지.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야."
"선생님,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반드시 온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수업이 끝나고, 이산갑은 혼자 학당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 덮인 마을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생명은 숨 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영광의 식물』이 놓여 있었다. 이산갑은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하나하나의 식물을 다시 살폈다.
'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반드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밤이 깊어갔다. 학당의 작은 등불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은 작았지만, 미래를 향한 희망의 등불이었다.
이산갑은 등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도 학당에는 아이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글을 가르치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조선의 자연을 함께 공부할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는 법이다.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