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일상의 이면
평화로운 일상의 이면
1943년 8월의 영광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는 여전히 노인들이 장기를 두었고,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얼음장 같았다.
이산갑은 아침 일찍 학당으로 향했다. 산감 직분을 내려놓은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처음에는 손에서 일을 놓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제는 학당 경영과 한도회 일에 온전히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학당 마당에서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산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이곳만큼은 우리말과 우리 글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자꾸나."
학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계민이 먼저 와서 교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청년이 된 계민은 이산갑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 어젯밤에 정리하신 식물도감 원고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삽화 부분을 조금 더 보완하면 출판사에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네가 그림 실력이 일취월장했구나."
이산갑은 아들이 정성스럽게 그려놓은 식물 세밀화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수십 년간 산과 들을 누비며 모은 자료들이 이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이산호가 도시락을 들고 학당으로 왔다.
"아버님, 형님, 식사하세요."
산호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보리밥에 된장국, 김치 몇 점이 전부였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는 따뜻했다.
"산호야, 요즘 면사무소 분위기는 어떠하냐?"
이산갑의 물음에 산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갈수록 징병 압박이 심해집니다. 이번 달에만 우리 면에서 다섯 명이 징집영장을 받았습니다."
"그래... 조선의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가는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는 매미 소리만 요란했다.
저녁 무렵, 이산갑은 정혁진을 만나기 위해 마을 뒷산 정자로 향했다. 정혁진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이번에 들은 소식은 심상치 않네요."
정혁진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일본군이 남태평양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네. 그래서인지 징병이 더욱 거세질 것 같아."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더 희생되어야 할지..."
두 사람은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평화로운 저녁 풍경 속에, 전쟁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