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93)경쟁중독

민준의 여유

by 이 범

주말, 민준은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20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야, 민준아! 오랜만이다!"
제일 먼저 반가워한 건 절친이었던 태수였다.
"태수야! 너 뭐 해?"
"나? 작은 동네 서점 운영해."
"서점? 요즘 서점이 돈이 돼?"
민준의 질問(질문)에 태수는 웃으며 답했다.
"돈은 많이 못 벌지. 그래도 행복해. 동네 사람들이랑 책 얘기하고,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고. 그런 게 좋더라고."
"그래도 수입은..."
"민준아, 너 아직도 그래? 고등학교 때부터 넌 모든 걸 1등, 2등으로 나눴잖아."
"그게 뭐가 문제야? 경쟁에서 이겨야 인정받는 세상이잖아."
태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리 서점에 자주 오는 할머니가 계셔. 평생 남과 비교하며 살았대. 자식도, 집도, 옷도, 다 남보다 나아야 한다고. 그런데 70이 넘어서 깨달았대. 그렇게 살다 보니 정작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더래."
민준은 불편했지만, 태수의 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동창회가 끝나고, 민준은 수진에게 전화했다.
"수진아, 미안해. 지난번에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오빠..."
"근데 말이야, 나는 정말 경쟁해서 이기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틀린 건가?"
수진은 한참을 침묵하다 말했다.
"오빠, 나 사실 요즘 많이 힘들었어. 오빠랑 있으면 내가 뭘 해도 부족한 것 같고, 자꾸 비교당하는 것 같고. 연애가 경쟁이 되는 것 같아서..."
"그건 내가 너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오빠, 난 이미 충분해. 그리고 오빠도 충분하고. 우리가 꼭 누군가보다 나아야만 가치 있는 건 아니잖아."
전화를 끊고 나서, 민준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민준은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다. 8시 30분. 이미 몇몇 동료들이 와 있었다.
"민준 과장님, 오늘은 늦으셨네요?"
"응, 그냥... 좀 천천히 왔어."
그날 점심, 민준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했다. 예약도 하지 않고, 先後(선후)도 따지지 않았다. 그냥 함께 걸으며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
"재현아, 너 요즘 프로젝트는 어때?"
"응, 그럭저럭. 근데 민준아, 너 오늘 좀 다르다?"
"뭐가?"
"몰라, 그냥 편해 보여."
오후, 신입사원 지훈이 다시 찾아왔다.
"과장님, 저번 일은..."
"지훈씨, 미안해요. 내가 당신 아이디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팀장님께 정정하겠습니다."
지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네. 사실 나도 요즘 생각이 좀 많아서요. 내가 너무 경쟁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민준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헬스장에 가는 대신 한강 공원을 걸었다. 옆 사람보다 빨리 걷지도, 더 멀리 걷지도 않았다. 그냥 걸었다.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민준은 자문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2등을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
"민준아, 1등은 누구야?"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수현이요."
"그럼 다음엔 수현이를 이겨야지. 2등은 의미 없어."
중학교 때, 미술 대회에서 銀賞(은상)을 받았을 때.
"金賞(금상)은 누가 받았니?"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과학 프로젝트로 상을 받았을 때.
"네가 주도적으로 한 거야, 아니면 친구가 한 거야? 네 공이 더 커야지."
민준은 깨달았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기지 않은 자신'을 가치 있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께 배웠고, 학교에서 배웠고, 사회에서 배웠다.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32년,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던가?
민준은 스마트폰을 꺼내 각종 랭킹 앱들을 살펴봤다. 만보기 1위, 독서 상위 5%, 운동 시간 3위.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나를 규정하는 전부인가?'
그는 천천히 앱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랭킹을 보여주는 모든 기능을 꺼버렸다.
다음 날, 민준은 팀장을 찾아갔다.
"팀장님, 제가 그동안 팀워크를 해쳤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달라지겠습니다."
"민준 과장, 무슨 마음의 變化(변화)가 있었나요?"
"네. 저는 인생이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진다고. 그래서 제가 계속 이겨야 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어떤 착각이요?"
"우리 모두 함께 잘될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제가 지훈씨의 아이디어를 인정해 준다고 제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죠. 오히려 팀 전체가 성장하는 거잖아요."
팀장은 微笑(미소)를 지었다.
"좋은 깨달음이네요."
그날 오후, 팀 회의에서 민준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A팀과 B팀이 協力(협력)해서 진행하면 어떨까요?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잘하는 부분을 나눠서요."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민준 과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미안해요, 그동안. 나 혼자 이기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 함께 성공하는 걸 생각하고 싶습니다."
회의실에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녁, 민준은 수진을 만났다.
"수진아, 그동안 미안했어. 나는 네가 더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네가 나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었던 것 같아."
"오빠..."
"나는 네가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걸 몰랐어. 아니, 나 자신도 경쟁에서 이겨야만 가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수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오빠, 고마워. 그 말 들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수진아, 우리 앞으로는 서로 비교하지 말고, 각자 하고 싶은 걸 응원해 주자.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거고, 내가 행복하면 너도 행복한 거니까. 제로섬이 아니라 win-win이야."
두 사람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몇 주 후, 회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민준이 주도한 협력 프로젝트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A팀과 B팀이 경쟁하는 대신 協業(협업)한 결과, 예상보다 훨씬 좋은 成果(성과)를 냈다.
"민준 과장님, 이번 프로젝트 정말 대단했어요!"
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훈씨 아이디어가 핵심이었죠. 다 같이 잘한 거예요."
"예전 과장님 같으면 절대 이렇게 안 말씀하셨을 텐데요."
"맞아요. 나 많이 변했죠?"
회식 자리에서, 팀원들은 민준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민준 과장님, 요즘 되게 편해 보이세요."
"맞아, 예전엔 술잔 개수도 세시더니."
민준은 웃으며 답했다.
"제가 좀 病的(병적)이었죠? 경쟁 중독이었나 봐요."
"그래도 이제 治癒(치유)되신 것 같은데요?"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에요. 가끔 아직도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그게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재현이 물었다.
"그럼 뭐가 행복하게 해요?"
민준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우리가 함께 성장하는 거요. 내가 이긴다고 누군가 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요.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무한 게임이더라고요."
"무한 게임?"
"네. 이기고 지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게임을 계속하는 게 목적인 거죠. 우리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진짜 목표 아닐까요?"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오늘 깨달았다. 나는 32년간 남들과 경쟁하느라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 1등이 되는 것이 목표였지, 왜 1등이 되고 싶은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알겠다. 진짜 가치는 상대적 위치가 아니라 絶對的(절대적) 성장에 있다는 것을. 남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진짜 競爭力(경쟁력)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우리는 다 같이 잘될 수 있다. 내가 잘된다고 누군가 못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함께 잘될 때 더 큰 시너지가 생긴다. 人生(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었다."
몇 달 후, 민준은 사내 강연에 초청받았다. 주제는 '協力의 힘'.
"여러분, 저는 오랫동안 경쟁 중독자였습니다."
강연장이 조용해졌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봤죠.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행복, 人間關係(인간관계), 그리고 진정한 성장을요."
민준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나눴다.
"제로섬 게임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協同(협동)하고 協業(협업)할 때, 모두가 win할 수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한 젊은 직원이 다가왔다.
"과장님, 저도 요즘 고민이 많았어요. 맨날 동기들이랑 비교하게 되고, 불안하고..."
"그 마음 이해해요. 근데 물어볼게요. 당신은 왜 그 일을 하나요? 동기보다 앞서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 일 자체가 의미 있어서인가요?"
젊은 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외부의 基準(기준)이 아니라, 내면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날 저녁, 민준은 태수에게 전화했다.
"태수야, 네 말이 맞았어."
"뭐가?"
"인생을 경쟁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거. 나 이제 좀 알 것 같아."
"다행이다, 친구. 이번 주말에 우리 서점에 놀러 와. 좋은 책 많아."
"그래, 갈게. 아, 그리고 태수야."
"왜?"
"고마워. 네가 나한테 진실을 말해줘서."
민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났다. 저 별들도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빛을 낸다. 그리고 그 모든 별이 모여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든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민준은 生覺(생각)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면 된다. 누가 더 밝은지 比較(비교)할 필요 없이. 그저 각자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면 된다.
그리고 때로는 함께 빛날 때, 더 큰 빛이 된다는 것.
민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수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빠, 오늘 회사에서 칭찬받았어! 그런데 1등은 아니야. 그냥 내가 잘했다고 칭찬받은 거. 그게 더 기쁜 것 같아."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축하해! 네가 행복하니까 나도 행복해. 이게 진짜 win-win이구나."
그날 밤, 민준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強迫(강박)도 없이. 그저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자신을 인정하며.
꿈속에서 그는 넓은 들판을 걷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누가 앞서고 뒤처지는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하지만 함께.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민준은 처음으로 진정한 自由(자유)를 느꼈다.
경쟁이 아닌 協奏(협주). 比較(비교)가 아닌 尊重(존중). 제로섬이 아닌 共同成長(공동성장).
그것이 민준이 32년 만에 깨달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였다.
끝 -
에필로그
1년 후, 민준의 팀은 회사에서 가장 創意的(창의적)이고 協力的(협력적)인 팀으로 評價(평가)받았다. 개인의 성과도 중요했지만, 팀 전체의 시너지가 더 큰 價値(가치)를 만들어냈다.
민준은 더 이상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지 않았다.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전보다 더 행복하고 生産的(생산적)이었다.
수진과의 관계도 한층 깊어졌다. 서로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실패를 함께 위로했다. 競爭(경쟁) 대신 共感(공감)이 그들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진정한 勝利(승리)는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成長(성장)하는 것임을.
人生(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우리 모두 함께 잘될 수 있다.
이것이 강민준이 배운, 가장 소중한 삶의 眞理(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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